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6화
그 순간, 루벨라이트 공작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가 기겁하며 레이나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 그, 그것은 제 딸이 아닙니다! 죽은 전 부인이 밖에서 만들어 온 끔찍한 것입니다……! 저,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레이나와 자신의 연관성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딴 건 황태자에게 중요치 않았다.
황태자는 루벨라이트 공작이 지금까지 레이나의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마왕의 상징인 검은 마법을 쓰는 것은 참인가 보군.”
“그, 그건……!”
핏줄이 터진 공작의 눈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관계만 부인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래서 어디에 있지?”
황태자가 싸늘하게 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목을 날릴 기세였다.
공작은 허겁지겁 대답했다.
“부, 북북서 끝에 있는 시, 심연의 저택입니다……!”
“쓰레기 같은 자식.”
휙!
공작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이 그의 팔로 향했다.
툭,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작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우선 마왕부터 처리하고 그 뒤에 죽여 주마.”
황태자가 미련 없이 공작의 방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전전긍긍하고 있던 부집사와 하인들이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
황태자는 기사들을 대동하여 곧장 북북서로 향했다.
마왕의 은신처를 알아냈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북북서 끝, 심연의 저택에는 말로만 듣던 검은색 마법이 잔뜩 깔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새카만 검은색이었다. 신탁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기가 막히는군.”
이렇게 대놓고 능력을 사용했는데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리고 대놓고 과시하듯 능력을 전시한 레이나에게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황태자는 저택을 둘러싼 검은 마법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파지직-!
그러자 마법에 닿았던 손에 정전기가 오르며 소매의 일부가 소멸되었다.
화상을 입거나 다치진 않았지만, 찌릿한 충격이 남아 있었다. 강제로 통과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가 동행한 기사 한 명을 레이나의 마법 장벽으로 떠밀었다.
파지지지지직-!
“으아아아악!”
그 순간, 기사의 갑옷과 옷은 물론이거니와 머리카락을 비롯한 전신의 털이 사라졌다.
장벽에서 튕겨 나온 기사가 감전이라도 된 듯 바닥에 쓰러져 사지를 떨었다.
“아아악!”
다른 기사도 떠밀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전우들의 끔찍한 모습에 남은 기사들이 긴장했다. 서둘러 상태를 살펴보자,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두 번으로 표본은 충분했던 모양인지, 더는 황태자가 마법 속으로 누군가를 밀어 넣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란 듯이 검은 마법을 전시해 놓고, 닿으면 옷과 머리카락을 없애다니.’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었다. 황태자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반드시 목을 쳐서 황성 앞에 걸어 놓을 것이야.’
결심을 새긴 황태자가 저택 주변을 살피며 어떻게 해야 마왕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저택 안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어어?! 화, 황태자 전하?!”
용사 레오였다. 저택 안에 쌓인 돌을 밖으로 내다 버리던 그가 황태자를 알아보고 서둘러 달려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정중히 예를 차린 그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황태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레오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황태자의 말투에 날이 잔뜩 서 있었다.
평소 눈치가 없는 레오였지만, 황태자가 왜 이리도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저택에 침입하려는 자들이 많아져 저택 주변의 경계를 올려 놓은 참이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으로 왔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침입을 시도했던 모양인지 황태자의 소매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전라의 상태로 쓰러져 있는 기사들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방어를 하기 위함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수치스러움과 함께 경미한 고통이 따르긴 했으나, 상대는 무단 침입자들이다.
살의를 갖고 남의 집에 마음대로 침입하려고 한 것의 대가치고는 아주 약한 벌이었다.
사정이 긴 터라 오해를 풀 필요가 있었다. 연갈색 눈을 빛낸 레오가 일단 황태자의 물음에 힘차게 대답했다.
“돌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안에서 일을 돕고 있거든요.”
“여기서 일을 돕고 있다고? 마왕의 밑에서?”
“어, 그렇습니다만, 검은색 불꽃을 쓴다고 해서 공녀님이 마왕인 것은-”
아니라고 말을 이으려고 했는데, 검을 뽑아 든 황태자가 곧장 레오에게 휘둘렀다.
샥-!
반사적으로 피하긴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치명상을 겨우 면한 레오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복부를 붙들고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저, 전하……! 오해가……! 윽!”
황태자는 분노에 차 있었다.
빨리 오해를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는데, 황태자가 재차 검을 날렸다.
몸을 굴린 레오가 서둘러 레이나의 마법 장벽 뒤로 숨었다. 불꽃에 닿은 검의 끝부분이 파스슥 소리와 함께 소멸됐다.
그때,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레오를 발견한 케일란이 무슨 일이냐며 그에게 다가왔다.
“어?”
그가 레오의 복부에서 흐르는 혈흔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야! 너 무슨 일이-!”
“케일란 모어. 네놈도 여기서 마왕의 일을 돕고 있나?”
케일란은 뒤늦게 검은 장막 뒤에 있는 황태자를 발견했다.
황태자의 질문에 케일란이 반사적으로 부인했다.
“황태자 전하? 레이나는 마왕이-”
그녀는 마왕이 아니라고 하려 했으나, 황태자가 끝이 사라진 검을 케일란에게 겨누었다.
파스슥-!
장막에 닿은 검의 일부가 또다시 소멸됐다. 장벽 밖으로 나갔다간 곧장 베어 버릴 기세였다.
오해가 있으니 풀어야 할 것 같은데, 황태자는 설명이라는 것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당장 장벽을 뚫고 넘어와서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젠장 할.’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레오만 부축한 채 장벽 너머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나타나지 말아야 할 인물이 상황을 목격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근처를 산책하고 있던 레이나였다. 그녀가 장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을 보고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복부에 자상을 입은 레오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케일란, 그리고 장막 너머에서 검을 쥔 수상한 남자, 그의 뒤로 보이는 기사들까지.
안나 이후로 누군가가 다친 것은 오래간만이었지만,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다짜고짜 남의 저택에 쳐들어온 침입자가 레오를 공격한 것이 분명했다.
‘감히 겁도 없이.’
오랜만에 레이나가 분노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새카만 어둠이 치솟았다.
힘을 사용한 그녀가 황태자가 쥐고 있던 검을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그 뒤에 있던 기사들의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
놀란 황태자가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정교한 마법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손짓 하나로 말이다.
그는 갑자기 현실을 깨닫고 긴장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공포심도 들었다.
그사이 레이나의 손끝에서 다시금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차디찬 얼굴로 물었다.
“너희들 뭐야? 뭔데 남의 집에 멋대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려?”
당장이라도 황태자를 헐벗길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에 이를 악문 레오가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윽, 고, 공녀님! 윽, 화, 황태자 전하십니다……!”
“황태자?”
생각지도 못한 정체에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침입자라고 하더라도 황태자를 대머리로 만들 순 없었다. 그 정도의 사리 분별은 가능했다.
레이나는 잠시 황태자를 관찰했다. 무기를 잃은 그가 미약하게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쉽게 대화가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레오를 부축한 케일란의 어깨를 레이나가 가볍게 건드렸다.
“……케일란, 레오 데리고 들어가서 치료해 줘.”
하필이면 지난번에 다쳤던 복부를 또 다친 상태였다. 조속한 치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빨리. 걔 죽어.”
레이나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어서 케일란이 반박했으나, 소용없었다.
치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고, 누군가는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차라리 서둘러 레오를 옮기고, 체이스와 아덴을 불러와야겠다고 생각한 케일란이 레오를 등에 업고 저택 본관 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