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7화
빠르게 사라진 케일란과 레오를 확인한 레이나가 황태자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좋게 만난 인연이 아니기에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태자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사납게 말했다.
“신탁의 마왕, 널 체포하겠다!”
“하아…….”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놈이 제국의 황태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슨 명목으로? 내가 왜 신탁의 마왕인데? 증거라도 있어?”
설마 고작해야 검은색 마법을 썼다고 마왕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지금 몸에 두르고 있는 검은색 마법만으로도 충분하다!”
응,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이가 없었지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 본 소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맞긴 하지만.’
마왕으로 태어난 건 맞으나, 아직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마 전에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노래까지 들었다.
인생이 이토록 기구할 수도 있구나.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게 거의 자이로드롭 수준이었다.
레이나는 문득 서부 공작인 노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주눅 들고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탁이 전부인 세상도 아니고요.”
맞는 말이었다.
타고난 운명이 어떻든 간에-그리 살지 않기로 결심했고,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칠 필요는 없었다.
“황태자 전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마왕이 아니면 어쩔 건데? 세상에 검은색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어? 네가 그토록 신뢰하는 신탁이 그러든?”
그러자 황태자가 증인을 내세웠다.
“아닐 리가 없다. 성녀가 직접 네가 마물을 부리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걔 미친 거 아니야?”
레이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누가 뭘 보았다고? 성녀가? 자신이 마물을 부리는 것을?
착각에도 자유가 있다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성녀는 분명 자신이 마물을 없애고 있을 때 나타났으니까.
심지어 마물을 다 없애고 대화까지 나누었다. 비록 좋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대신관도 별말 없었다. 정리가 끝난 것 같으니 돌아가자며 그녀와 함께 사라졌었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내가 마물을 부리는 장면이 있었던 건데?’
분명 잘 설명하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좋게 해결해서 각자 갈 길을 가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뒤에서 이딴 소리나 하고 다닌 걸 보면 말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걔 말만 믿고 날 체포하겠다고?”
“안 될 이유는 뭐가 있지? 그녀는 성녀다. 네가 부른 마물들을 처리하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기까지 했지.”
“내가 부른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믿을 수 없다.”
“성녀는 믿고?”
“당연하지. 성녀니까.”
으아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지른 레이나가 제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어뜯었다.
황태자가 왜 성녀의 말을 덮어놓고 믿는지 알 것 같았다.
‘둘이 똑같아! 답답해! 완전체야!’
멋대로 오해하고, 곡해하고, 아주 소설을 쓰고 앉아 있었다.
황태자의 전신을 불태우는 상상을 하여 겨우 분노를 다스린 레이나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싫다면?”
“싫다니?”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런 가정은 있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 몰라?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기 전까진 동행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가야지. 어떤 방법을 써서든.”
그의 손이 제 허리춤에 닿았다. 레이나를 공격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라진 검을 찾은 것이었다.
“감히 나를? 정말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멍청한 놈.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의 무기를 없앤 장본인인 레이나가 전신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 과연 내가 진짜 마왕이라면 가만히 있을까?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신탁의 마왕인데?”
일렁이는 불꽃이 장벽을 넘나들었다. 기사들이 잔뜩 긴장했다.
황태자 역시 처음 레이나를 마주했을 때처럼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황태자가 거머쥔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발가벗은 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썩 꺼지라는 말을 하려던 때였다.
케일란에게 소식을 전달받은 레이나의 부하들이 떼거리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 공녀님!”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사람들을 따라서 허둥지둥 예를 차린 베로니카의 머리카락이 장벽 밖으로 삐죽 튀어 나갔다.
황태자의 난폭한 눈이 이를 놓치지 않고 훑었다. 아까 레오를 망설임 없이 베어 버렸던 그 눈이었다.
당장이라도 잡아채 끌어내려는 찰나, 서둘러 걸음을 옮긴 레이나가 베로니카의 앞을 가리고 섰다.
기회를 놓친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보자 레이나는 괜스레 걱정이 들었다.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자신에게는 딸린 식구가 여럿이나 있었다. 그들은 물론이거니와, 로스틴이나 아이스베리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황태자 놈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후 어떤 일을 꾸밀지 몰랐다. 괜한 사람을 협박하거나 죽여서라도 어떻게든 자신을 데려가려고 할 게 분명했다.
아니, 필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고민하던 레이나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좋아, 가자.”
“……가겠다고?”
방금 전까지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려고 했으면서 갑자기 가겠다고 하는 말에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안 가도 어차피 계속 올 거잖아?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니 가서 정정당당하게 재판을 받겠어.”
정정당당일지, 비겁일지, 편협일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마법을 쓰고 있는 이상 언제까지고 상황을 피할 순 없었다.
그러느니 제 발로 걸어가 무죄임을 명백하게 주장하는 편이 나았다.
‘……그게 안 먹히면 안타깝게도 진짜 마왕 하는 거고.’
성녀에게 배신당해 그녀에 대한 호감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에게 상황을 털어놓고 우호 관계로 지내자는 꿈이 박살 난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사는 인생, 마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마력을 2,000이나 찍은 마왕이 얼마나 무서운지 톡톡히 보여 주겠어.’
성녀는 거짓말을 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황실의 대는 여기서 끊어질 것이고.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진짜 마왕을 불러올지, 말지의 기로이기도 했다.
그런 뜻을 담은 싸늘한 눈으로 황태자를 노려보던 레이나가 차갑게 물었다.
“안 가?”
“……!”
잡아가는 입장이건만, 어째서인지 황태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검은 불꽃을 사용해 자신을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려운 티를 낼 순 없었기에 그가 도리어 과장된 허세를 부렸다.
“제대로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겠다.”
퍽이나 가능할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레이나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싶었다.
저택을 떠나기 전, 레이나가 체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로스틴에게 말 좀 전해 줘. 변호사 백 명 정도 선임해 달라고. 비용은 차후에 정산할 테니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놈들로만 꾸리라고 해. 그리고 너희들 전원, 당분간 장벽 밖으로 나오지 마. 가족들을 불러서 함께 지내도 좋아.”
“예, 예! 공녀님! 알겠습니다!”
변호사 같은 게 이 세상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체이스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당장 그리하겠다고 답하는 걸 보니 있는 모양이었다.
안심한 레이나가 그제야 황태자 무리와 함께 저택을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뜻 모를 표정을 지은 트리버가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레이나가 저택을 떠난 직후, 체이스는 다급히 말을 달려 공작 성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소형 이동석이 떨어져 바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한 시간은 걸릴 거리를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그가 급한 마음에 말에서 내리다가 굴러떨어졌다.
“어어어?! 체이스?! 괜찮나?!”
“이봐! 무슨 일이야?!”
성벽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놀라 체이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들에게 대답도 하지 않은 체이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로스틴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공작님!”
노크도 없었다. 그는 곧장 문을 박차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로스틴은 부재중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는 그이거늘, 왜 하필 오늘 자리를 비운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체이스는 서둘러 동료 기사에게 로스틴의 행방을 물었다.
“공작님? 영지를 둘러보신다면서 나가셨는데.”
“뭐?!”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한시가 시급한데 순찰을 나가셨다니. 하늘이 무너진다는 기분이 이런 게 분명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알아?!”
“북동쪽으로 가신다는 이야기밖엔 못 들었는데.”
그렇다면 북동쪽 전반을 훑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추적도 불가능했다.
“으아아아아!”
체이스가 포효했다.
“혹시라도 공작님 돌아오시면 빨리 심연의 저택으로 가 보시라고 전해!”
기사들에게 전언 하나를 남기곤 체이스는 북동쪽을 향해 다시 말을 달렸다. 부디 로스틴이 바로 옆 마을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