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9화
설마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지 성녀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레이나가 마물을 부리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건 아니었다.
그녀가 본 것은 그저 검은 마법 속에서 포효하던 마물 떼뿐이었다.
심지어 마법과 함께 마물들이 소멸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레이나의 마법에 갇혀서 포효하던 마물들이 마법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본 것이었다.
스스로가 주장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었던 것이다.
‘어쩌지……?!’
성녀는 갈등했다. 여기서 말을 번복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일 테고, 번복해도 거짓말이 되었다.
단, 전자는 끝까지 우기다가 착각을 했다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후자는 알면서도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잘못 본 것 같다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선택지.
“사, 사실이에요! 북부에서 마물을 부리던 걸 보았어요!”
“내가 마물을 어떻게 부렸는데?”
하지만 곧장 레이나의 지적이 들어왔다. 그녀가 어디 한번 자세히 설명해 보라며 눈을 깜빡였다.
거기에 대한 대답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성녀는 다시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하나 레이나가 마물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현명하게 대답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대량의 검은 마법을 사용해서 엄청난 수의 마물을 부렸잖아요? 제가 똑똑히 보았어요. 마물들이 그 속에서 끔찍하게 포효했는걸요. 대신관님도 같이 보셨어요. 그렇죠?”
묘하게 질문을 벗어난 대답에 레이나의 눈이 가라앉았다.
황태자 역시 그녀의 증언이 레이나를 처형장까지 데리고 가기엔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방금 성녀가 대신관과 함께 보았다는 말을 한 상태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신관이니, 성녀가 빼먹은 자세한 설명을 보태 준다면 굳이 재판까지 끌고 갈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이 가능했다. 때문에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대신관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평소와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사실 저는 상황이 다 마무리된 뒤에 도착해서,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째서인지 대신관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며 부정했다.
그리되니 성녀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레이나가 마왕인 것은 명명백백하니 분명 편을 들어 줄 줄 알았는데, 대신관이 너무나도 깔끔하게 선을 그어 버린 것이다.
“대, 대신관님……?”
처량한 눈의 성녀가 대신관을 간절하게 응시했다. 왜 도와주지 않느냐는 얼굴이었다.
‘무슨 꿍꿍이야?’
한편 레이나의 눈은 의심으로 물들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을 몰아세울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다른 증인들이 있어서 그런가.’
괜히 거짓을 고했다가 지금의 성녀처럼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가 성녀를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생각했던 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그의 목소리가 몹시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봐! 혹시 또 다른 증인은 없나? 성녀가 본 것을 그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다른 자 말이야.”
성녀와 대신관이 단둘이 움직이진 않았을 테니, 다른 이의 증언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성녀는 곧장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름 함께 마물을 상대한 기사였다.
“아, 아덴! 아덴이요! 아덴이라는 분도 보셨어요!”
비록 만나자마자 마물들 사이에 그녀를 내버린 전적이 있었지만, 그는 몹시도 마왕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아아, 아덴 크로니클. 크로니클 자작가의 차남 말하는 거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풀네임이 레이나의 입에서 나왔다.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읊는 그녀에, 성녀의 표정이 굳었다.
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아덴도 그곳에 있었지. 그리고 또 있어. 귀족만 추리면 로스틴 윈터스노우 공작과 케일란 모어 백작 영식도 꼽을 수 있겠네. 그들에게서도 꼭 증언을 받길 바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거든.”
심지어 축제 중이었기에 아이스베리 마을 사람들도 모두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레이나가 마음껏 물어보라며 여러 인물의 이름을 언급하자, 황태자가 반박했다.
“그들의 뭘 믿고 증언을 받지?”
그는 조금 아까 레이나의 저택에서 케일란과 아덴을 모두 목격한 뒤였다.
두 사람 다 그녀의 편임을 확인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그걸 왜 자신에게 묻냐며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덴의 이름은 성녀가 먼저 꺼냈잖아? 게다가 북부 공작이 헛소리할 리가 없지 않아? 그는 누구보다 마왕을 증오하는 자인데, 거짓 증언을 할 이유가 있겠어?”
더는 반박할 말이 없어진 황태자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런 모욕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시선이 성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말을 믿고 데려온 것인데, 헛소리만 늘어놓아 상황을 이따위로 만든 장본인을 그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저, 저는……. 저는 그저……! 검은색 마법을 쓰니까……! 마물들이 마법에 갇혀 있기도 했고……!”
성녀는 울먹이며 말을 이으려다가 말았다.
말을 꺼낼 때마다 상황만 악화되니, 드디어 입을 닫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상황이 얼추 종료된 것 같아 레이나가 소파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럼 나 이제 가도 돼? 슬슬 배가 고파져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싶은데.”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가 검은색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니 절대 풀어 줄 수 없다.”
황태자가 단언했다. 그는 레이나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까지 그녀를 감옥에 가둬 둘 생각이었다.
일이 쉽게 끝이 나나 싶었는데, 다시금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럴 거면 성녀랑 대신관은 왜 데려온 건데?’
어차피 검은색 마법을 사용한다는 이유 하나로 잡아 둘 생각이었다면-증인이네, 어쩌네 하면서 왜 괜히 쑤시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쯤 되니 레이나는 약간 해탈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마음대로 하라며 다시 소파에 몸을 누였다.
“좋아, 그렇게 해. 성녀가 말했던 증인과 북부 대공도 꼭 불러 주고.”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만인의 앞에서 재판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새 인생을 살자, 싶었다.
“성녀, 너도 꼭 참석해서 오늘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하길 바랄게. 알겠지?”
“……!”
방긋 웃으며 덧붙인 레이나의 말에 수치와 모멸감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성녀가 감옥에서 쏜살같이 도망쳤다.
아무래도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레이나가 성녀의 뒤를 따라 감옥을 벗어나려던 대신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쪽이라도 대신 재판에 참석해서 오늘 했던 그대로 말해 줄래?”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 사사로운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대신관 역시 증언을 거절했다.
그는 자꾸 이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이 짜증이 난 상태였다.
지금은 레이나의 정체를 밝힌다거나, 몰아세워 정면 대치를 할 때가 아니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힘을 손에 넣은 그녀였기에, 자칫 잘못했다간 도리어 당하는 수가 있었다.
그럴 경우 모든 게 끝이었다. 신탁을 완수하기 위해 천 년이라는 시간을 버틴 자신의 인내 또한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때문에 그가 인사도 없이 감옥을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사색이 된 기사가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 저, 저, 전하! 크, 크, 큰일이! 큰일 났습니다! 마, 마물이!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마물?”
마왕이 여기에 갇혀 있는데? 설마 레이나를 구출하러 온 것인가 싶어 황태자가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대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 외엔 부를 수 없는 마물이 나타났다는 말에 그가 빠르게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으아아악!”
“마, 마물이다! 마물이야!”
“사, 살려 줘!”
마물이 소환된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갑자기 황성에 떼거리로 나타난 마물들에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기사들이 최선을 다해 마물을 상대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황태자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젠장! 성녀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방금 전에 나갔거늘, 하필이면 이럴 때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꺄아아악!”
그사이 희생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더는 성녀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황태자가 빠르게 기사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다들! 모여서 싸워라! 흩어지면 승산이 없다!”
그는 정신없이 각개전투를 벌이던 기사들에게 뭉치라고 지시한 뒤, 마물들을 차례차례 해치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리 강한 마물들이 아닌 덕에 마물의 수가 점점 줄어 갔다.
더불어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전투에 합류하는 기사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곧 전세가 역전될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희망이 보였다.
전신에 검은색 불꽃을 드리운 장신의 남자가 황성 담 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