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0화
눈을 제외한 모든 신체를 가린 탓에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의 정체는 명명백백했다.
“시, 시, 신탁의 마, 마왕……?!”
누군가가 이를 유추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붉은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한 차례 훑은 그가 손을 뻗어 새카만 소환진을 만들어 냈다.
“……!”
그 순간, 그것이 무언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다시 숨을 고르기도 전에 사내가 만든 소환진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당장 후퇴해! 피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물에 기사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당황하며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방어에 급급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 기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붉은 눈을 부드럽게 접은 남자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사고가 마비된 황태자는 얼음처럼 굳었다.
‘분명, 분명 마왕은 감옥에 잡아 두었는데……?’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건만.
어째서, 왜, 다른 이가 그녀와 같은 검은색 마법을 몸에 두르곤 마물까지 소환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검은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둘이나 되다니…….
“키에에에엑!”
“쿠아아악!”
그런 그를 향해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기사들은 재빨리 후퇴한 상황이었기에, 그 혼자 덩그러니 전방에 떨어진 상태였다.
때문에 황태자의 주위로 몰려든 수많은 마물들이 막 그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였다.
화르륵-!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 불꽃이 몰려든 마물들을 전부 소멸시켰다.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불꽃의 주인은 다름 아닌 레이나였다. 마물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자 그녀가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황태자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에, 주변에 검은 장막을 세워 마물들의 공격을 차단한 레이나가 그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짝-!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힘을 실어 황태자의 뺨을 두 번 더 때리자, 파르르 눈꺼풀을 깜빡인 그가 드디어 레이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왜 여기에……?”
“정신이 들어?”
“마물들이 왜 너를 공격하고-아니, 아까 그 남자는 대체……! 왜 검은 마법을……?”
아직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인지, 묻는 말에 대답은커녕 그가 횡설수설했다.
“정신 안 차려?”
레이나가 다시금 그의 뺨을 후려쳤다.
수차례나 얻어맞아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듯, 그가 새빨갛게 부어오른 제 뺨을 더듬더듬 부여잡았다.
눈빛도 상당히 맑아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나는 사심을 담아 그의 반대쪽 뺨을 한 번 더 힘차게 갈겼다.
“윽!”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이제 정말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마왕이 나타났던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그놈이 마물들을 부른 거지? 검은색 마법 쓰던 놈 말이야. 너도 봤어?”
황태자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레이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간 마왕 행세를 하던 놈을 드디어 찾은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밍이 몹시도 좋았다. 그 모습을 만인이 보았으니 말이다.
잘만 이용하면 신탁의 마왕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마물들을 없애며 황태자에게 말했다.
“빨리 나한테 부탁해.”
“부탁……?”
황태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설명했다.
“마왕이 소환한 마물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라고. 네가 부탁하면 지금 당장 전부 없애 줄 테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태자가 눈을 끔뻑였다. 그는 아직 레이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아직도 그의 정신이 나가 있는 모양이라고 착각한 레이나가 황태자의 뺨을 한 대 더 후려친 뒤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부, 부탁한다!”
뺨을 맞은 충격 때문인지, 엉겁결에 황태자가 레이나에게 마물을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전신에서 검은색 불꽃이 만개했다.
빠른 속도로 피어오른 불꽃은 단숨에 황성 전체로 뻗어 나갔다.
그 순간, 마물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멎었다. 사람들의 비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뒤, 검은 마법이 걷히자 마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
“마, 마물이 사라졌어……!”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는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진 마물에, 서둘러 주변을 확인하던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네가 소환하고 네가 없앤 건…….”
“마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모처럼 자비를 베풀어서 마물들을 없애 주었더니, 헛소리나 하는 황태자의 뺨을 한 번 더 갈겨 줄까 생각하던 레이나가 손을 풀며 말을 이었다.
“마물을 소환하는 수상한 남자도 함께 봤잖아? 게다가 마물을 없애 달라는 부탁도 네가 한 거야.”
“…….”
확실히 보았다. 그리고 수치스럽지만, 그녀에게 부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뒤에 지금처럼 마물이 깨끗하게 사라지게 되었고.
“그럼 이제 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겠어?”
레이나가 팔을 꼬며 물었다.
황태자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미…… 안,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과했다. 물론 조금 발음을 뭉개고 얼버무려서 잘 안 들리긴 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그의 최선이었다.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더는 양보할 수 없었다.
“응, 좋아. 알겠어. 그 사과 잘 받을게.”
다행히 레이나는 그런 사소한 발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오해가 풀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거기에 아까 황태자의 뺨을 수차례나 때려 분을 푼 뒤이기도 했다.
“근데 말이야. 나는 이대로 끝내도 괜찮은데, 레오한테는 따로 사과해 줄래? 오늘 네가 벤 그 자리, 얼마 전에도 다쳤거든.”
걔 지금 죽어 갈걸. 레이나가 덧붙이자 황태자는 뒤늦게 레오에게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상금을 보내도록 하지.”
물론 레오에게는 따로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었기에, 적당히 보상금을 보내면 되겠지 싶었다.
“자필 편지가 있으면 더 기뻐할지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레이나가 적당한 장난을 섞자, 황태자가 정색하며 본연의 말투로 돌아갔다.
“그건 공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그래도 이쯤이면 충분했다. 황태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까지 받았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돌아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돌아가라. 황성 후원에 이동석이 있으니.”
같은 마음이었는지, 돌아가는 교통편까지 친히 설명한 황태자가 이만 피해 상황을 알아봐야겠다며 황성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황성에 퍽 익숙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야-! 레이나! 너 괜찮아?!”
“무사한 것 같군.”
“공녀!”
케일란과 아덴, 마지막으로 로스틴이었다.
어째서인지 눈매가 발갛게 달아오른 케일란이 헐레벌떡 레이나에게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안 다쳤어?! 여기 왜 이래?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다친 사람들은 뭐고? 설마 네가 팬 거야?! 그런 거야?! 설마 황태자 전하도 패 버린 건 아니지?!”
아니야. 그리고 시끄러워. 물론 황태자는 좀 패긴 했지만.
요란을 떨던 케일란이 뒤늦게 황태자를 발견했다.
세 남자의 시선이 황태자의 빨갛게 부푼 뺨으로 향했다.
황태자가 저도 모르게 제 뺨을 감쌌다. 그의 눈이 아주 잠깐 레이나에게 향했다.
상황이 상황인 터라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를 갖추지 않을 순 없었기에 세 남자가 짧게 묵례하며 간소한 인사를 마쳤다.
평소 같았다면 시건방지다며 한 소리 했을 황태자였겠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으로 무례한 자들에 대한 질책을 끝냈다.
이내 그가 외투에 달린 다이아몬드 단추를 전부 뜯어 케일란에게 던졌다.
케일란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다이아몬드를 모두 받아 냈다.
“보상금은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
이로써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끝내겠다며 그가 황성 본관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거대한 다이아몬드 여러 개를 쥐게 된 케일란이 대체 이게 무엇이냐는 얼굴로 레이나를 응시했다.
왠지 아까보다 조금 더 피곤해진 레이나가 등 뒤에 선 로스틴에게 몸을 기대었다.
“하나는 너 갖고, 나머지는 레오 줘. 미안하대.”
“……미안하다고 했다고?”
그 황태자가? 조금 아까 그렇게 칼을 휘두르고 갔으면서?
“음, 일단 잘 해결됐으니까, 나머지는 돌아가서 설명해 줄게. 아주 큰 뉴스도 있거든. 황태자가 이동석 마음대로 쓰라고 했으니 어서 돌아가자.”
그리 대답한 레이나가 로스틴의 손을 잡고 이동석 쪽으로 끌고 갔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순순히 레이나에게 끌려갔다. 그 뒤를 케일란과 아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