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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93화 (93/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3화

다름 아닌 대신관이었다.

“성녀! 어딜 가려는 겁니까?”

평소와는 달리 표정이 깨져 있는 그가 성녀의 팔을 단단히 잡고 물었다.

성녀가 눈에 한가득 고인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요……? 저는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니까요……!”

어딜 가든 이제 대신관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대신관의 곁에는 자신이 아닌 루벨라이트 공녀가 더 어울릴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잡힌 팔을 뿌리치며 달아나려 하자, 표정을 굳힌 대신관이 손바닥으로 성녀의 눈을 가렸다.

“아니, 일단 자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녀가 정신을 잃었다. 그녀를 안아 든 대신관은 곧장 신전으로 돌아갔다.

“대신관님! 돌아오셨습니까! ……어?! 성녀님?!”

“헉, 성녀님?!”

의식을 잃은 성녀를 안고 나타난 대신관에 화들짝 놀란 신관들이 무슨 일이냐며 부산을 떨었다.

그에 대신관은 굳어 있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신관들에게 성녀를 떠넘겼다.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기절하셨습니다. 방에서 푹 쉬게 도와주십시오. 깨어나면 바로 제게 알려 주고.”

“네,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성녀를 데리고 사라지는 신관들을 물끄러미 보던 대신관은 바로 침묵의 방으로 향했다.

탁, 문이 닫힘과 동시에 대신관이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조금 아까 성녀가 보았던 것을, 대신관 역시 똑똑히 보았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신탁을 다시 훑어보았다.

[동부의 공작가에서 마왕이 태어났습니다! 성인이 된 그가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까지 마물을 계속 불러내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세요! (사전 고지 불가)]

그러나 아무리 다시 보아도 신탁은 레이나가 마왕임을 알리고 있었다.

신탁은 절대적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신탁의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니 변수가 생길 리가 없었다. 아니, 생길 수가 없었다. 신탁의 내용을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이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이상.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대신관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마왕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꾸민 건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신탁에서 벗어난 행동을 벌였으니까.

애초에 타이밍 좋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마물을 소환하는 자가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했다.

누명을 벗기 위해 대역을 세우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맞아. 운명을 피하려고 대역을 세운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 어떤 미친 사람이 스스로가 마왕이라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말인가.

애당초, 마왕의 운명을 타고난 자가 농작물이나 재배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미래를 바꾸려고 헛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끝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해야 할 일도 명확했다.

‘마왕이든, 마왕의 대역이든. 전부 해치우면 그만이야.’

일단은 마왕의 대역부터 찾아서 없애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요행을 부리며 마왕이 아닌 척 헛짓거리를 하는 레이나보다는, 만인의 앞에서 대놓고 마물을 부리는 가짜를 상대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 뒤엔 필시 진짜가 힘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 신탁대로 상황을 정리하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대신관은 곧 침묵의 방을 나섰다.

한데 어째서인지, 늘 고요함을 유지하던 신전에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갈 거예요! 갈 거라고요……! 이거 놔요! 난 이제 성녀가 아니라고요……!”

그 속에는 성녀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루는 더 자도록 능력을 사용하였는데, 불행히도 벌써 깨어난 모양이었다.

대신관이 서둘러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내려갔다.

“무슨 일이죠?”

“대, 대신관님!”

기다렸던 구세주를 만난 듯 신관들이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몇몇은 눈물을 흩뿌리며 당장 신전을 떠나겠다는 성녀를 붙들고 있었다.

“성녀님께서 자꾸 신전을 떠나시겠다고 하여서……!”

“저는, 저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니까요! 아무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걸요……!”

대신관이 나타나서 더욱 서러워진 모양인지 성녀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에 대신관이 성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아닙니다. 성녀님이 없으면 마왕도, 가짜 마왕도 해치울 수가 없는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아이를 달래듯 나긋했다. 길고 예쁜 손이 성녀의 손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그런 대신관에게 홀린 성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신관에게 물었다.

“가짜, 마왕이라니요……?”

“마왕을 붙잡자마자 타이밍 좋게 만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 마물을 부른 남자라니, 수상하지 않습니까? 마물들을 공녀가 곧장 없앤 것도요.”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냐는 물음도 함께였다.

성녀는 눈을 떨며 대답했다.

“다, 다들 그녀가 마왕이라고 의심하지 않게 되었어요…….”

“네. 그리고 성녀님께서도 더는 스스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죠. 성녀님 말고는 아무도 마왕을 물리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럼 누가 가장 이득을 보는 걸까요?”

“……?!”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챈 성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 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

성녀라는 신성한 이름을 한 차례 빼앗아 간 적이 있던 사람.

‘아니야, 한 번이 아니야.’

이번에도 그러했다. 모두의 앞에서 보란 듯이 불길한 마법을 사용하고는 성녀라는 이름까지 빼앗아 갔다.

다행히 아주 멍청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답을 찾은 듯한 성녀의 표정에 대신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왜 성녀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간 수많은 마물을 해치우고, 다친 사람들까지 치유해 줬는데요. 보십시오.”

근처에 있던 성기사의 검을 빼 든 그가 망설임 없이 제 다리를 베었다.

“대신관님?!”

“헉!”

경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긋하게 웃은 그가 어서 자신을 치료하라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치, 치, 치유의 빛! 치유의 빛! 치유의 빛-!”

사색이 된 성녀가 서둘러 치유의 빛을 사용했다.

한 번으로도 충분하거늘. 사모하는 대신관이 다친 걸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몇 번이고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그에 대신관의 상처가 순식간에 치료됐다.

“제 상처도 이리 깨끗이 낫지 않았습니까. 마물을 죽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녀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요. 진짜는 성녀님 단 한 명뿐입니다.”

성녀를 응시하는 대신관의 금안이 기묘한 색으로 반짝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더는 마왕이 부린 잔재주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성녀께선 할 일이 명확하니까요. 여기서 멈춰선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그에 잠시 이상함을 느낀 성녀였으나, 자신밖에는 없다는 말에 현혹된 그녀가 이내 눈물을 꾹 참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레이나를 찾은 북부의 사람들은 갑자기 저택에서 열린 티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같은 북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고생하여 저택에 찾아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었다.

물론 사람의 수가 너무 많고, 당장 준비할 디저트가 없어서 바닥에 천을 깔고 따뜻한 차를 건넨 것이 전부였다.

부족한 찻잔은 아이스베리 마을과 공작 성에서 충당했다. 마을과 성에서 알고 자발적으로 가져다준 것은 아니고, 새로 생긴 대머리 군단이 열심히 발품을 판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를 지도하게 된 것은 케일란이었다. 갑자기 다수의 부하가 생긴 그가 의자에 편히 앉아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너, 설거지 다 했어? 야! 넌 마당 청소해. 너희 셋은 창문 닦고, 너희 넷은 저택 마루 닦아.”

“예!”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아무것도 못하고 쫓겨나면 어쩌나 했는데, 잡일이지만 할 일이 생긴 대머리들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면서 남아 있겠다는 걸까. 세계관 최강자인 탓에 강자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모르는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북부 사람들과 마저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근처 마을이 검은 불꽃으로 활활 타고 있던데, 공녀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저주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는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응, 맞아. 다들 춥다길래. 농사도 짓고 싶다고 했었고.”

“농사요?”

북부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 여성이 되물었다.

북부에서 농사라니,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남부 해안에서 눈꽃 축제를 열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기에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땅이 얼어 있어서 불꽃으로 좀 도움을 주었어. 이렇게 말이야.”

손바닥에서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 낸 레이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던졌다.

“으악!”

“꺄아악!”

그 바람에 놀란 사람들이 날아온 불꽃을 피해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꽃이 사방에 깔린 다른 불꽃처럼 따뜻한 열기만 띤다는 것을 깨닫곤 신기해하며 모여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너희들이 마시는 차도 그렇게 재배한 건데.”

열심히 일을 하는 대머리들에게 채찍질하던 케일란이 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찻잎을 재배하는 데 조금이나마 공헌한 것이 있어서인지, 그의 말투에서 우쭐함이 묻어났다.

각양각색의 찻잔을 손에 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부에서 농사와 찻잎 재배라니……!”

“저어, 공녀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구경해 봐도 될까요? 북부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서 온실은 처음이라…….”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이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갑자기 온실 투어가 시작되었다.

단순히 땅을 녹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재배가 원활하도록 여러 가지 설치를 해 놓은 것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녀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이걸 근처 마을에서도 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런 것 같아. 세상에, 나도 예전에는 텃밭을 가꾸곤 했었는데……. 부러워라…….”

“나도 그래. 나는 농장에서 일하다가 결혼 때문에 북부로 왔는걸.”

공세권이라서 덕을 보는 아이스베리 마을 사람들을 모두가 부러워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사람들의 혼잣말을 유심히 듣던 레이나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

“흐음, 그래? 너희들도 불꽃 필요해? 좀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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