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5화
*
로스틴과 함께 땅 확인을 끝낸 레이나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갔다.
불꽃을 놓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주 많은 사람을 부려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는 것뿐이었다.
“예?! 정말이십니까?! 저희를 모두 고용하시겠다고요?!”
“응. 곡창 지대로 활용할 아주 좋은 땅은 발견했거든. 몹시 넓어서 너희 모두를 고용해도 모자랄 정도야. 동부와의 경계에 있는 곳인데, 다들 거기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네.”
“세상에! 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저도요!”
“근처에 집을 지어서라도 꼭 일하고 싶습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일거리를 얻게 된 사람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터 일하면 되겠냐며, 지금 당장도 괜찮다며 성급하게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일단 계획 좀 짜고 다시 알려 줄게. 그러니 돌아가서 작물 재배 공부 좀 하고 있을래? 얼마 걸리진 않을 거야. 주변에 더 일할 사람 없나 홍보도 좀 해 주고.”
“예!”
“그럼요! 알겠습니다!”
신이 난 사람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나둘 저택을 떠났다.
그들에게 말했던 대로 구체적인 계획을 짜야 했기에, 레이나는 베로니카, 로스틴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댄 레이나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베로니카에게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북부 사람들의 식량을 전부 충당하실 생각이시라고요……?”
너무 규모가 큰 이야기라 그녀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응. 그리고 베로니카가 그 일을 도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제가요?!”
북부 사람들의 식량 전체를 담당하는 곡창 지대를?! 내가?!
베로니카가 당장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되물었다. 그에 레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응, 베로니카 아니면 누가 하겠어? 케일란? 아덴? 체이스? 아니면 나?”
당연히 넷 다 불가능했다. 여기서 작물 재배에 관한 지식이 제일 많은 이는 단연 베로니카였다.
“그, 그렇지만……!”
자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부였는데. 이제 막 조금 작물을 키웠을 뿐인데.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레이나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전문가를 붙여 줄 테니.”
그러면 그냥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일 아닌가?
베로키나의 표정이 그리 말하고 있었기에 레이나가 한마디 덧붙였다.
“세상에 전문가는 많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그러니까 베로니카가 맡아 줬으면 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니 책임감만 더 강해졌다.
결의라도 다진 듯한 얼굴의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녀님과 북부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문가는 내가 수소문해 보도록 하지.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여럿을 고용하는 게 좋겠지.”
로스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냉큼 낚아챘다.
괜히 머뭇거리고 있다가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맡는 것보다는, 개중에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선수 치는 게 나았다.
게다가 북부를 위해 타 지역 출신의 공녀인 레이나가 힘을 쓰겠다는데, 가만히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열심히 도와서 레이나의 사업과 북부 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좋아. 결정. 그럼 뭘 심지?”
“밀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주식이라서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는 품목이기도 하고.”
제국에선 빵이 주식이었기에 밀은 필요 불가결한 작물이었다. 남으면 수출하거나, 잘 보관해 뒀다가 흉년에 써먹으면 그만이기도 했다.
“확실히.”
밀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찾기 힘들었다. 레이나가 사랑하는 디저트에도 상당수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노트에 ‘전문가는 여러 명.’, ‘작물은 밀이 좋음.’이라고 적었다.
“감자도 좀 심을까? 간단하게 먹기 좋잖아. 쌀…… 은 다들 안 먹겠지? 애초에 여기에 쌀이라는 것도 있나? 있어야 하는데. 가끔 쌀밥이 먹고 싶거든.”
그러면서 혼자 무어라 계속 중얼거렸다.
“그럼 이렇게 해야겠다. 관리가 까다로운 건 근처에서 재배하고, 대량으로 소비하는 걸 곡창 지대에 심어야겠어. 물론 전문가의 의견도 들어 봐야겠지만.”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규모가 큰 탓에 세세한 관리가 어려울 테고, 꼼꼼한 온실을 만들 수가 없어서 재배가 어렵지 않은 작물이 좋았다.
“감자도 꽤 자주 먹곤 하지. 북부는 모르겠지만, 쌀을 먹는 지방도 있다고 들었고.”
“진짜?! 그럼 감자랑 쌀도 좀 심을까?!”
레이나가 노트에 감자와 벼를 적었다. 어딘가 신이 나 보였다.
작게 웃은 로스틴이 곧장 장단을 맞췄다.
“그래, 아주 넓은 평야이니 다른 종류도 꽤 심을 수 있을 거야. 고구마 같은 것도 함께 심는 건 어때?”
“고구마도 좋지!”
생각지도 못한 작물이었던 모양인지, 레이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고구마 먹어 봤어? 구워 먹어야 제 맛인데.”
“메인 요리에 곁들여서 먹은 적은 있다.”
“아, 그건 진짜 고구마가 아니라고. 호일에 싸서 환경호르몬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인데…….”
“그래? 그럼 공녀께서 재배한 고구마를 그렇게 먹어 볼까?”
“으음, 아쉽게도 쿠킹 호일을 구할 수가 없어서. 쇠 위에 올려놓고 먹으면 좀 비슷하려나?”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잘 모르겠으나, 노트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추가하는 레이나를 보며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뭔가, 분위기가…….’
중간에 끼어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베로니카가 저도 모르게 귓불을 긁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는데, 분위기가 좀 달달했다. 소싯적 자신과 남편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쇠를 얇게 저미고 썰어서(?) 고구마를 감싸 굽자는 레이나의 말에 로스틴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 다 맞고 재미있었다.
“저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작물이 좀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쩐지 이쯤에서 빠져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예를 차린 베로니카가 조용히 응접실을 나섰다.
그 뒤에도 레이나와 로스틴의 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
며칠 뒤.
마음을 가다듬으려 공작저 근처의 작은 동산을 산책하던 루벨라이트 공작은 갑자기 동부 경계 너머에 나타난 검은 마법을 발견하곤 숨을 멈췄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 그동안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공작저가 북부 경계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레이나의 마법이 똑똑히 보였다.
심지어 규모가 범상치 않았다. 몇 개의 마을을 합친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대체, 대체 왜, 왜 저게……!”
기겁한 공작은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라며 고함을 쳤다.
‘저, 저게 도대체 뭐야……?!’
이를 목격한 것은 공작의 장남인 펠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나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검은색 마법에 사색이 된 그가 경계 지역으로 향하는 공작의 마차 짐칸에 몰래 숨어 탔다.
그렇게 조금 달려 동부와 북부의 경계에 다다르자, 마차가 성급하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에 맞은편 의자에 머리를 박을 뻔한 공작이었으나, 일말의 타박도 하지 않은 그가 서둘러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 헉!”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거대하고 새카맸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덮쳐 버릴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어둠에 심장을 부여잡은 공작이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누구시죠?”
그런 공작을 발견한 한 여성이 누구냐고 물었다가, 이내 그의 복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레이나를 불렀다.
“고, 공녀님! 루벨라이트 공녀님!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뭐 잘못됐어?”
다급한 목소리에 레이나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전문가가 오면 바로 작물을 심으려고 미리 땅을 정비하려 부랴부랴 사람들을 불러왔거늘.
대체 무슨 안 좋은 일이 터진 건가 싶어서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루벨라이트 공작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볼 때마다 기겁하고 있는 볼품없는 모습이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여긴 뭐 하러 왔어?”
“거, 거, 거, 검은, 검은, 마, 마법……!”
“-을 쓰지만 내가 마왕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소문을 통해서 듣지 않았어? 새삼스럽게 볼 때마다 놀라네.”
허리에 손을 짚은 레이나가 삐딱한 자세로 되물었다.
물론 공작도 그 소식을 듣긴 했다. 황성에 나타난 마물들을 그녀가 손수 물리쳤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그건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마왕은 제 딸인 레이나가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해가 된다며 힘을 사용한 레이나가 공작을 뒤로 밀쳤다.
“도와줄 거 아니면 꺼져 줄래? 아, 다 못 준 양육비를 더 주려거든 있어도 돼.”
정중하진 않았지만 폭력을 쓴 것도 아니거늘. 공포에 질린 공작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이를 마차 뒤에 숨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펠릭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게, 내 누이……?’
분명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죽일 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살아 있었구나.
심지어 늘 호통만 치던 아버지를 몇 마디 말로 제압하다니. 광활한 대지에 끝이 보이지도 않을 검은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대단한 힘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머, 멋있어……!’
검은 마법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만,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니면 조금 자란 그 머리카락들을 다시 태워 줘?”
레이나가 손에 불꽃을 만들어 내며 묻자, 화들짝 놀란 공작이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다, 당장 도, 돌아가!”
그와 동시에 마부가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 바람에 마차 뒤에 숨어 있던 펠릭스가 아주 어정쩡한 얼굴로 레이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 아, 아, 안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