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97화 (97/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7화

*

관광지(?)도 있고, 관광객도 있는데, 식도락이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음식을 파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지?’

일단 만들 사람이 없었다. 음식의 달인인 미아가 있긴 했지만, 가뜩이나 지금도 바쁜데 그녀에게 관광지에서 팔 음식까지 맡기는 것은 거의 죽으라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음료를 파는 건 어떨까?’

과일을 갈아서 팔든, 홍차를 우려서 팔든, 맹물을 팔든. 음식보단 음료가 품이 덜 들었다. 재료를 준비하기도 편했고.

심지어 온도 조절이 가능한 불꽃도 대기 중이었다.

고온은 물론, 얼음장같이 차가운 불꽃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음료 만들기에 최적이었다.

애초에 이런 관광지(?)에서는 맛보다는 느낌이 더 중요했다. 느낌만 있으면 대충 맛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큰 물통에 불꽃을 넣어서 불꽃 음료라고 홍보한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할 것이다.

일단은 시험 삼아 물부터 판매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레이나가 빈 상자 하나를 음료대 위에 올려놓았다.

“응? 이게 뭐죠?”

음료대 앞에 앉아 있던 펠릭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레이나가 상자에 ‘결제’라고 적은 뒤 아이에게 말했다.

“구경 온 사람들에게 물을 팔아. 금액은 마음대로 넣으라고 하고.”

그러고는 식수가 든 물통에 각각 차가운 불꽃과 뜨거운 불꽃 하나씩을 넣었다.

“거기 대머리! 근처 마을에 가서 찻잎 좀 넉넉히 사 와.”

레이나의 외침에 무수한 대머리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제법 머리카락이 올라온 상태였지만, 타인과 비교해선 아직도 대머리에 가까웠다.

개중 가장 가까운 놈을 지목하자, 그가 성은이라도 입은 듯 감격을 금치 못했다.

“예!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씩씩하게 근처 마을에 다녀온 대머리 덕분에 음료를 팔 준비가 끝났다.

“주문받으면 대머리 네가 잔에 따라서 줘. 펠릭스, 너는 ‘돈은 마음만큼만 넣어 주시면 돼요.’라고 말하면 되고. 아, 일꾼들에게는 무료로 줘. 알겠지?”

“네!”

역시 아동 착취는 안 될 일이었다. 험궂은 일은 힘세고 튼튼한 어른이 제격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를 끝내고, 대머리와 펠릭스가 호객 행위에 나섰다.

“어? 음료라고?”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것도 없던 탓에 구경꾼들이 곧 관심을 가졌다.

“어어? 뭐야, 이거! 물에 불꽃이 있어!”

“정말이잖아?!”

물에 넣어 둔 레이나의 불꽃도 한몫했다. 심지어 그게 물을 뜨겁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차갑게도 한다는 점이 사람들을 몹시도 놀라게 했다.

“차가운 불꽃이라니……!”

“마, 만져 볼 순 없겠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데, 불행히도 식수 한가운데 넣어 놓은 상태라서 만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쉬움만 남기고 주문을 했더니 음료값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마음만큼만 넣어 주시면 돼요!”

“어어…….”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펠릭스의 웃음이 해맑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물을 따르는 대머리가 그렇게 말했다면 대충 시세에 맞춰서 냈을 텐데, 어린아이가 그리 말하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레이나의 불꽃이 있으니 그녀가 파는 것이 분명하거늘.

작은 아이가 힘들게 물을 길어 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때문에 레이나의 계획대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값을 시세보다 더 많이 내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장남인 줄도 모르고, 어린 것이 고생한다며 쓸데없이 측은지심을 가졌다.

물론 개중에는 펠릭스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공작저에서 일을 하는 하인이었다.

모처럼 휴일을 맞이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대량의 검은 마법이 생겼다고 하여 부랴부랴 와 보았더니, 세상에.

“도, 도련님……?”

대체 왜 도련님께서 여기에 계시는 거지? 아니, 왜 도련님께서 음료 나부랭이를 팔고 계시는 거지……?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끔뻑이자, 펠릭스가 서둘러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쉿! 쉿!”

“합……!”

하인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까치발을 들어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펠릭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내 이름 말하지 마! 누님께 절대 들켜선 안 돼!”

그제야 하인은 검은 마법의 주인이 루벨라이트 공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지?! 절대 안 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 둬! 응? 부탁이야!”

끄덕끄덕. 펠릭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기에 하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레이나가 평야 한가운데 박혀 있던 거대한 바위를 박살 냈다.

콰쾅!

“오오오오!”

“와아아아아!”

집채만 한 바위가 시원하게 파괴되는 광경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펠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제 누이의 화려한 마법을 보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불행히도 그 광경을 목격하지 못한 것은 펠릭스에게 시선을 쏟고 있던 공작저의 하인뿐이었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이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자신도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하여 아가씨의 엄청난 마법을 구경해야 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주머니에 있던 돈을 대충 집어 상자에 넣곤 서둘러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시세보다 열 배나 더 비싼 값을 치렀다는 것을 집에 간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

루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심연의 저택 돌담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로스틴이 불꽃을 가져다준 이후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전까지 거의 매일 출근했던 탓에, 습관처럼 계속 오게 되었다.

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청명했다. 덤으로 다들 곡창 지대를 만든다며 외출을 한 상태였기에 조용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기분도 꽤 좋았다. 레이나가 귀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모르는 아이와 귀가하기 전까지 그러했다.

“우와! 우와아! 소형 이동석을 이렇게나 쉽게 사용하는 분은 처음 봐요!”

레이나의 손을 잡고 곡창 지대에서 저택까지 순식간에 이동한 펠릭스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한다던데, 제 누이는 어떻게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이 먼 거리를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것인지.

심지어 그녀가 함께 손을 잡고 이동한 이는 펠릭스뿐만이 아니었다. 베로니카도 함께였다.

단번에 두 사람을 데리고 꽤 먼 거리를 움직인 레이나에게 펠릭스가 존경의 시선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덴과 케일란, 그리고 집사도 무사히 저택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레이나가 곡창 지대에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의 안부를 살폈다.

“공녀님! 돌아오셨군요!”

“공녀님, 식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출출하실 텐데 어서 드시지요.”

“고마워, 미아. 역시 미아밖엔 없어. 다들 고생했어. 별일은 없었지?”

“그럼요!”

“평소처럼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레이나는 여전히 펠릭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에 돈통을 꼭 붙든 아이를 데리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이를 루카가 열심히 깡충깡충 뛰어 뒤쫓았다.

쟤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데려온 걸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 다 같이 먹는 건가요?”

신분의 차이가 명백하거늘, 한 식당에서 모두 같이 음식을 먹겠다는 말에 펠릭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식당이 이렇게나 넓은데 굳이 따로 먹을 필요가 없잖아?”

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펠릭스가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리도 배포가 크시지?’

자비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뒤, 펠릭스는 미아가 만든 훌륭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포근한 방까지 배정받았다.

공작저의 제 방보다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넓고 깨끗하고 따뜻한 방이었다. 오늘 막 만난 정체도 모를 아이에게 주기에는 몹시도 과분했다.

“푹 쉬고, 내일도 잘 부탁해.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니까, 마음 편히 지내고.”

“저 오늘 잘했어요?!”

인사를 끝으로 돌아가려는 레이나에게 펠릭스가 급히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잘했어. 그러니 오늘 번 돈의 절반은 네가 가지렴. 나머지 절반은 함께 고생한 대머리에게 주고.”

“저, 절반이나요?!”

그렇게나 많이?! 펠릭스가 기겁했다.

공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그녀가 여타 귀족들처럼 사치스럽지 않아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이 꽤 많았다.

때문에 아이치고는, 귀족치고는 현실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오늘 번 돈이 자신이 갖기에는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이건 너무 많아요……!”

“글쎄, 그렇지만 네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니 네 몫인걸. 불행히도 내게는 푼돈이고. 그러니 받아 둬.”

사실 레이나도 펠릭스가 갖게 될 돈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아이가 빨리 돈을 벌어 일을 그만두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순순히 받아 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 그렇지만……!”

너무 많아서 다시금 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데, 이걸로 대화는 끝이라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든 레이나가 성큼성큼 제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빠르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펠릭스가 돈이 잔뜩 든 상자를 소중히 품에 껴안았다.

‘누님은 정말 멋지고 착하고 대단하신 분이야……! 우리 가문도 저렇게 멋진 분이 이끄셔야 하는데……. 그럼 지금과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

아이의 눈이 존경과 선망으로 반짝였다.

한편, 그때까지 작은 몸을 열심히 숨기며 레이나와 펠릭스를 따라다니던 루카가 동그란 눈을 끔뻑였다.

대체 저 작은 놈은 누구란 말인가. 이곳에 작은 놈은 자신 하나로 충분한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빠진 루카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