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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98화 (98/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8화

루카는 왠지 화가 났다.

‘내가 다시는 여기에 오나 봐라! 흥!’

눈을 매섭게 뜬 루카가 분노로 뚱땅거리며 저택을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1층 홀에 있던 레이나와 딱 마주쳤다.

그녀가 반색하며 루카를 반겼다.

“삐이!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보고 싶었잖아.”

몸을 굽히고 손을 뻗으니, 잠시 머뭇거리던 루카가 레이나의 손에 올라갔다.

그러자 활짝 웃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루카를 쓰다듬었다. 몇 번 만져 보아서 녹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손길이 퍽 섬세했다.

“자주 좀 놀러 와. 맛있는 거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

레이나가 자신을 너무나도 반겨서인지, 뾰족하게 솟았던 루카의 마음이 어느새 둥글게 깎여 버렸다.

방금 보았던 그 조그만 놈과 자신을 대하는 차이도 어마어마했다.

누가 보아도 자신의 승리였다. 아까 걔는 그냥 적당한 호의로만 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조금 서운하고, 섭섭하고, 화가 났었지만, 이제 괜찮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봐줘도(?) 될 것 같았다.

모처럼 큰마음을 먹은 루카가 레이나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갑자기 애교를 부리는 루카에 레이나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지금 알겠다고 대답하는 거야? 응? 그런 거야, 삐이?”

“삐이.”

어쩜, 귀엽기도 하지. 동그란 눈을 끔뻑이며 대답하는 것이, 꼭 토끼 같았다.

“삐이가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너도 가족이 있을 테니 그건 어렵겠지? 그러니까 자주 놀러 와.”

아, 물론 최근에는 곡창 지대를 만드느라 바빴기에 와도 아무도 없긴 했다.

“내가 없어도 미아가 잘 챙겨 줄 거야. 미아도 널 좋아하니까.”

그에 대답하듯 다시금 눈을 깜빡인 루카가 레이나의 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오해가 풀렸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역시 이 구역의 작은 놈은 자신이 짱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루카는 자신의 몸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돌아왔네.”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고 말랑말랑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처럼 사람이 된 날이었다. 1분 1초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어?! 작은 주인님!”

“루카 님! 오늘은 몸이 괜찮으십니까?”

“엄청 일찍 일어나셨네요! 안색이 좋아 보이셔요!”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반색하며 루카에게 인사했다. 그런 그들에게 루카가 대충 눈인사를 보냈다.

사람들은 루카가 눈 뭉치로 변하는 것을 몰랐다. 그가 받은 저주는 단순히 몸이 아픈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루카가 절대 눈 뭉치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루카 혼자만의 생각일 뿐,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공작 성을 매번 몰래 오가는 눈 뭉치를 목격한 참이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작고 귀엽다고는 하더라도, 마물은 마물.

마음대로 성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성에 마물이 나타났다며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에게 로스틴은 엄포를 놓았다.

“해를 끼치지 않는 작고 착한 짐승이니, 내버려 두도록. 녹을지도 모르니까 만지지도 말고, 공격하지도 마. 내쫓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마. 절대로 다치게 해선 안 돼. 절대.”

그가 이렇게나 강조하며 주의를 준 적은 처음이었기에, 다들 눈 뭉치를 절대 건드려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렁뚱땅 루카는 투명 마물 취급을 받게 됐다.

그것을 전혀 알 길이 없는 루카는 오랜만에 되찾게 된 인간의 몸으로 성 여기저기를 열심히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들르게 된 곳이 로스틴의 집무실이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로스틴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기에 눈을 빛낸 루카가 집무실 이곳저곳을 살폈다.

열 살밖에 되지 않은 그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없었으나, 로스틴이 늘 여기에 틀어박혀 있는 터라 뭘 하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한참을 무의미한 서류만 뒤적이던 루카의 눈에 뜻밖의 편지 한 장이 들어왔다.

[성인식 초대장]

“성인식 초대장?”

북부에서 성인식이라는 걸 했었나? 5년 전의 사건 이후로 그 어떤 축제나 행사도 열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성인식이라니.

게다가 굳이 공작 성에서 성인식을 열지 않아도 귀족들은 황성에서 열리는 성인식에 참석했다.

때문에 손에 든 초대장이 몹시도 낯설었다.

‘누구에게 보내는 거지?’

제국에서 성인은 만 열여덟 살로 규정하고 있었기에, 스물두 살인 제 형이 받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루카는 수취인을 확인하려고 초대장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뒷면 오른쪽 구석에 적힌 이름을 찾아냈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작 영애]

“레이나?”

레이나가 열여덟 살이었구나.

‘그럼 나랑 여덟 살 차이인 건가?’

대단한 능력을 지녔길래 엄청나게 어른인 줄 알았는데, 여덟 살 차이라니. 딱히 많이 나는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제 형보다 어려 보이기는 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손에 초대장을 든 루카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정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당사자에게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럼 그냥 내가 가져다주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누군가가 가져다줘야 할 초대장이라면, 마침 한가한 자신이 가져다주는 것이 마땅했다.

생각을 마친 루카가 품에 초대장을 넣곤 조금 상기된 얼굴로 하인을 찾았다.

“나 씻을 거야! 그리고 옷! 신발! 제일 멋진 것으로 가져와 줘!”

갑자기 외출복을 찾는 루카에 잠깐 놀란 하인이었으나, 근처를 산책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다 넘기며 그의 치장을 도왔다.

그리하여 꽤 그럴듯하게 꾸민 루카가 마차까지 타고 심연의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다.

“심연의 저택이요……? 이렇게 일찍 도련님께서 거긴 어쩐 일이십니까?”

마부가 의아해하자 루카는 당당하게 성인식 초대장을 내보였다.

“초대장 주려고.”

자신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진 않았지만-어쨌든 보내야 하는 편지이고, 가져다주면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가져다줘도 돼. 형은 바쁘니까.’

번거로운 일을 굳이 대신 처리해 주는 것이니 오히려 잘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아! 그렇지 않아도 곧 성에서 성인식이 열릴 거라고 다들 준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초대장을 전해 주러 가시는 거였군요.”

물론 왜 그런 잡일을 루카가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시는 도련님이 그렇다고 하는데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루카는 심연의 저택에 도착했다.

꽤 자주 온 곳이거늘,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괜히 긴장되었다.

‘복장이 흐트러지진 않았겠지?’

루카가 제 차림을 확인했다. 너무 오랜만에 차려입어서 조금 어색하고, 잘 입은 건지 불안했다.

그러는 사이, 저택 주변을 청소하고 있던 집사가 루카를 발견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고급스러운 마차와 복장이었기에, 그가 퍽 정중하게 용건을 물었다.

그에 루카가 당당하게 초대장을 내보였다.

“초대장 주러 왔어. 루벨라이트 공녀에게.”

“실례지만 누구신지……?”

“루카 윈터스노우.”

윈터스노우라고? 루카라는 이름은 생소했지만 뒤에 붙은 성은 익숙했다.

집사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서둘러 레이나에게 가서 사실을 고했다.

“루카 윈터스노우? 로스틴의 동생이 날 찾아왔다고? 초대장을 주려고?”

세상에 마상에. 무슨 초대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주에 걸려 아픈 로스틴의 동생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밖은 추우니까 어서 데려와!”

만나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퍽 다급하게 집사를 재촉했다.

조금 기다리자 저택 현관 앞에 루카의 마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린 루카는 깜짝 놀랄 정도로 깜찍하고 귀여웠다.

‘로스틴이랑 하나도 안 닮았어…….’

어쩜 이렇게 안 닮을 수가 있지? 꽤 사나운 눈매의 로스틴과는 다르게 루카는 눈이 동글동글했다.

머리 색도 로스틴과는 상반되는 백발에 가까운 은발이었다. 오직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만이 그와 로스틴이 형제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형제가 이렇게나 안 닮을 수가 있나? 의문에 빠져 루카를 천천히 살펴보던 레이나가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어? 혹시 너, 지난번 마을 축제 때 나 만나지 않았어?”

“어? 어…….”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성녀에게 레이나는 마왕이 아니라며 화를 낸 전적이 있었다.

뭔가 좀 멋지게 레이나와의 첫 만남(?)을 이루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감자를 먹고 있다가 화를 내는 것이 첫 만남이었다.

영 멋이 없었다. 괜히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워진 루카가 시무룩한 얼굴을 감추려 애를 썼다.

반면 그런 아이의 생각과는 다르게, 레이나에게 그 기억은 몹시도 좋게 남아 있었다.

“그때 그 훌륭한 아이가 로스틴의 동생이었구나. 괜히 용감한 게 아니었어. 형을 닮은 거였네.”

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형을 닮았다니, 진심인가?

형과는 다르게 약하고, 성격도 나쁘고, 예의범절도 익히지 못했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로스틴과 닮았다는 말에 루카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흠, 흠. 응, 형제니까.”

애써 티 내지 않으려 짧게 대답한 루카가 언제 챙겼는지 모를 예쁜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초대장을 레이나에게 내밀었다.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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