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2화
“그런데 초대장은 왜 보낸 거야? 그것도 동생에게 시키기까지 했던데.”
북부 성인식을 취소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초대장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초대장을 보낸 것인가.
그 물음에 로스틴이 쓰게 웃었다. 그가 아직도 열심히 음료를 파는 루카를 눈짓하며 답했다.
“보내지 않았어. 책상 위에 둔 걸 누군가가 몰래 가져갔을 뿐이다.”
“응? 왜? 저주에 걸려서 몸도 좋지 않은 거 아니었어?”
“글쎄. 아마 영애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오래오래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된 모습으로 대화도 나누고,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자신 역시 어느새 레이나에게 스며들었기에 이해가 가는 바였다.
새침하기만 했던 제 동생이 드디어 마음을 연 사람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었다.
“소문을 들어서 그런 건가? 하긴, 나라도 궁금하긴 하겠어. 검은 마법을 부리는 공녀라니, 한번 얼굴을 보고 싶을 만도 하지.”
그래서 핑계를 대어 온 모양이라며 레이나가 킥킥 웃었다. 귀엽기도 해라. 소문의 공녀를 만나 본 감상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게 아닌데. 정정하기에는 꽤나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당사자인 루카의 허락도 필요했고.
아무리 보호자이자 형이라고는 해도 이런 것까지 떠벌리고 다니는 건 옳지 않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말하겠지.’
그리 생각한 로스틴이 루카를 보았다. 레이나의 시선 역시 루카에게 향해 있었다.
뒤늦게 두 사람의 열렬한 눈빛을 눈치챈 루카가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늘 그랬듯 눈을 세모꼴로 뜨며 뭐냐는 듯 휙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응?”
뭔가 익숙한 반응인데. 어디선가 보았던 느낌에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쉽게 떠올릴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눈 뭉치와 사람을 연관 짓기에는 어마어마한 벽이 있었다.
“어쨌든 잘하고 있는 걸 보았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아, 마왕을 쫓는 거야?”
작별 인사를 고하는 로스틴에게 레이나가 물었다.
깜찍하기 그지없는 그의 동생까지 만난 참이었기에, 하루빨리 저주를 건 놈을 해치웠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로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예의주시하고는 있다. 불행히도 요 며칠은 영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녀서 제대로 쫓지 못했지만.”
신출귀몰한 놈이었다. 마왕인 만큼 대단한 마력을 가진 모양인지 동부에서 서부까지 순식간에 이동하기도 했다.
때문에 마법사가 아닌 로스틴은 쫓고 싶어도 쫓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남기고 떠난 마물을 해치워야 하기도 했고.
“그래도 성녀가 바로 따라가고 있다고 하니 곧 신탁대로 잡힐지도 모르지.”
대신관에 대한 불신과는 별개였다. 성녀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탁대로 마왕을 해치워만 준다면 영혼을 달라고 해도 줄 자신이 있었다.
“아, 성녀.”
맞지. 걔가 있었지. 어떻게 지내나 싶었는데, 마왕이 뿌리고 다니는 마물을 해치우며 지내는 모양이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본연의 업무를 다하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녀만큼 가짜 마왕을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혹시라도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어.’
삼세번은 도전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두 번째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는 아니었다. 다음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상종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 생각한 레이나가 이만 가 보라는 듯 로스틴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짜든 뭐든 좋으니, 빨리 놈을 잡아서 평화롭게 농장 일이나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저택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저녁을 먹었다.
거기엔 루카도 함께였다.
주스를 팔며 펠릭스와 퍽 친해진 모양인지, 밤이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펠릭스의 방에 틀어박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고 가려나?”
레이나가 작게 혼잣말했다. 아무래도 공작 성에 사람을 보내 로스틴에게 말을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레이나, 왔어……?”
그때, 위층에서 트리버가 내려왔다. 눈을 비비며 크게 하품한 그는 무척이나 졸려 보였다.
“왜 이렇게 피곤해하는 거야? 식사는?”
근래의 트리버는 종일 잠만 잤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말이다.
‘혹시 안에서 뭐 다른 일이라도 하나?’
그렇다고 저렇게나 피곤해한다고? 이해할 수 없어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대었다.
그에 배시시 웃은 트리버가 레이나의 허리를 껴안으며 답했다.
“응, 아까 먹었어. 미아가 줬어. 왜 이렇게 피곤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계속 졸려.”
그가 레이나의 어깨 위에 얼굴을 턱 올렸다.
트리버가 체중을 기댄 탓에 묵직한 무게감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무거워서인지 조금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프긴 한가 보다. 레이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지? 마물도 피곤함을 느낀다는 게 이상했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아냐, 안 돼. 진찰하다가 기겁할 거야.’
분명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모처럼 마왕이라는 오명을 씻어 냈는데, 다시 마물과 관련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릴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아프다가 끝난다면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갑자기 엄청난 마물로 진화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리 결론을 내린 레이나가 여전히 어깨에 기대 있는 트리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프다니 조금 더 위로해 주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자신 역시 피곤했다. 저녁을 먹은 뒤라서 더 그런 듯했다.
레이나가 작게 하품했다. 공작 성에 사람을 보내고 이만 자야겠다.
소식을 들은 로스틴이 알아서 루카를 데려갈 것이다. 생각을 마친 레이나가 트리버의 머리를 가볍게 밀었다.
“늦었으니 이만 쉬자.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여서 그런가, 나도 좀 피곤하네. 트리버, 너도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좀 누워 있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레이나에 트리버가 기대었던 고개를 들었다.
손을 흔들며 제 방으로 사라지는 레이나를 물끄러미 보던 트리버의 얼굴에 피곤이 조금 가셔 있었다.
*
한편, 방으로 돌아간 펠릭스와 루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화제는 오늘 팔았던 음료에 대한 것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과일 즙을 짜던 대머리의 이야기도 함께였다.
“괴물인 줄 알았어.”
싸늘한 얼굴로 감상을 내뱉은 루카에 펠릭스가 배를 잡고 까르르 웃었다.
“저도 깜짝 놀라긴 했어요. 그래도 덕분에 주스가 많이 팔린 것 같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제일 공이 컸던 건 공녀의 불꽃이겠지.”
갑작스러운 누이의 칭찬에 펠릭스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주스에 하나씩 넣어 준 레이나의 불꽃은 정말이지 몇 번을 더 회상해도 멋지기 그지없었다.
“공녀님은 정말 대단해요.”
제 누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멋졌다. 존경스러웠다.
루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형보다 대단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나는 예외였다. 자신이 보아도 그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더요. 내일도 같이 가실 거죠?”
펠릭스의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루카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오늘까지였다.
자정이 지나면 다시 눈뭉치가 될 테니, 놀이는 여기까지였다.
“아니, 내일부터는 성 밖으로 못 나올 것 같아.”
그제야 펠릭스는 루카의 저주를 떠올렸다. 아이는 루카가 저주를 받아서 몸이 약해졌다고 알고 있었다.
‘설마 오늘 너무 체력을 많이 써서 몸이 많이 안 좋아졌나? 내가 너무 졸라서……?’
펠릭스는 괜히 미안해졌다.
이런 반응은 익숙했기에 루카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같이 놀자.”
네 잘못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펠릭스가 죄책감을 덜어 냈다.
아이의 얼굴이 밝아진 것을 확인한 루카가 속으로 조금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나 이제 가 볼게.”
벌써 열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혹시 모르니 한 시간 정도는 여유 있게 공작 성에 도착하는 것이 좋았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배웅을 하려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카 역시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핑-!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중심을 잡지 못한 루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화들짝 놀란 펠릭스는 서둘러 루카를 부축했고, 재빠른 대처 덕분에 다행히 루카는 바닥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어……?!”
불행히도 조금 이르게 눈덩이가 되어 버렸지만.
“누, 눈 뭉치……?”
대체 이게 무엇이냐는 듯 펠릭스가 눈을 비비며 자문했다. 왜 갑자기 루카가 사라지고, 눈덩이가 제 손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 뭉치로 변한 루카의 새카만 눈이 파르르 떨렸다.
드, 드, 들켰다. 큰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