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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05화 (105/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5화

마침 잘되었다 싶어진 레이나는 곡창 지대 주변을 개발하는 건 어떨지 로스틴과 논의했다.

“출퇴근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구경꾼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야. 이걸 기회로 삼으면 어때?”

먼 곳에서 사는 일꾼들은 근처 마을에 빈집을 빌려서 주거를 대체하고 있지만, 지척에 사는 것보다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근처라고는 해도 왕복 두 시간은 생각해야 했고, 그에 따른 교통편도 따로 준비해야 했다.

그럴 바엔 곡창 지대와 그 주변을 개발하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일꾼들의 집이나 음식점은 꼭 필요한 상황이니, 숙박업소, 편의 시설 등을 만들어 부가 수입을 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로스틴에게 털어놓자, 그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를 그런 식으로 개발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었는데, 영애의 말이 백번 맞아.”

정확히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마물만이 들끓는 차디찬 북부에 관광객이라니, 남부에서 얼음 축제를 연다는 것보다 우스운 말이었다.

사실 북부 사람들은 매년 지원금을 받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나가 북부에 자리를 잡고 난 뒤, 로스틴은 처음으로 북부 사람들에게서 의욕과 열정을 보았다.

한낱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뿌듯함도 함께였다.

북부 사람들은 원체 성정이 무뚝뚝하다고 알려졌었는데, 아니었다.

레이나와 함께 일한 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제지하지 못할 정도로 활활.

로스틴은 레이나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 어떤 감사를 해도 모자랐다.

지원금을 주고, 마물을 토벌하고, 마왕만 해치우면 끝날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다들 충분히 만족해하며 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신이 목적을 갖고 열심히 해 나가는 것처럼, 다른 이들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무언가를 해내고, 스스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이를 채워 준 것이 레이나였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갖은 오해와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망 따윈 없었다.

로스틴은 그런 레이나가 참으로 신기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과 원망을 받았으면서,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것이 특히.

로스틴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진행하도록 하지. 일꾼들의 숙소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려 줬으면 좋겠어.”

“아니, 내가 할게. 그쪽이 영주니까 허락을 구한 것일 뿐, 여긴 내가 일구는 땅이니까 내가 해 보고 싶어.”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언가 대단히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공녀 마음대로 하도록 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 주면 고맙겠어.”

“당연히 있지. 도시 계획 전문가 좀 구해 줄래?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최대한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전문가로 부탁할게.”

레이나가 방긋 웃었다. 모처럼의 기회였다.

‘마을 만들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놓칠 수야 없지.’

곡창 지대를 배경으로 최대한 멋지고, 예쁘고, 환상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꽃도 여러 종류 심고, 아름다운 분수대도 두고, 상점도 일체감 있게 짓고, 거리도 깨끗하게 만들어야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의 놀이 기구나 선로가 끊긴 롤러코스터도 만들고 싶지만.’

아무리 게임 속이라곤 하나, 여긴 자신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었다. 종료 버튼을 누른다고 끝나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끔찍한 것을 만들면 다시 인성 쓰레기라는 소문이 퍼질 테니 자제가 필요했다.

‘어쨌든 최대한 멋진 마을로 만들자.’

고작해야 마을이지만, 황성보다 더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그간 해 보았던 마을 경영 게임을 떠올린 레이나가 히죽거렸다. 역시 도로 옆에는 꽃이 제격이지. 사시사철 피는 예쁜 꽃.

레이나의 얼굴이 퍽 즐거워 보였기에,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리하지.”

*

전문가들과 베로니카가 곡창 지대를 일구는 사이, 성인식 날이 다가왔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레이나는 당일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드레스를 준비할 수 있었다.

“헉! 공녀님! 준비하셨다던 드레스가 검은색이셨어요?!”

레이나를 본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녀는 몸에 딱 맞게 붙는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마왕 때문에 모두가 검은색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기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식을 제외하면 말이다.

“왜? 별로야? 남자들은 검은색 제복 잘만 입으면서 드레스는 안 돼? 전부 검은색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남성용 검은 제복이나 옷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로스틴도 이따금 검은 제복을 입곤 했고.

게다가 가만히 살펴보니 레이나의 몸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와 검은 드레스가 꽤 잘 어울렸다. 연기가 드레스의 일부로 보였다.

거기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은발이라서 반전미가 있었다. 드레스 곳곳에 보석과 레이스로 포인트를 주어서 장례식용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물론 성인식용 드레스는 화려하고 밝은 색감을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레이나에게 잘 어울리니 되었다 싶었다.

“그동안 검은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거의 못 보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잘 어울리세요!”

“맞아요!”

그제야 옷을 만든 안나의 안색이 밝아졌다.

레이나와 상의하여 검은색 드레스를 준비하긴 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내내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망연자실하는 이도 있었다. 다름 아닌 케일란이었다.

성인식 드레스이니 레이나가 노랑이나 분홍, 혹은 평소 자주 입는 색인 빨강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어서 부랴부랴 흰색 정장을 구해 왔는데, 검정이라니.

‘아냐, 흑과 백으로 잘 어울릴 수도 있어.’

파트너끼리 대비되는 색으로 옷을 맞춰 입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서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디자인과 색으로 맞춘 것보다는 못했지만,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흠, 좋아. 이 정도면 그럭저럭 어울리는 편이니 계속 레이나의 근처에 있어야지.’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케일란이 굳게 다짐했다.

함께 성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틴이 저택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케일란은 레이나와 비슷한 디자인의 검은색 정장을 입은 로스틴을 마주하곤 잠시 눈을 끔뻑였다.

“뭐. 뭐야……? 왜 둘이 디자인이 비슷해……?”

“그러게?”

레이나도 미처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로스틴이 안나를 한차례 응시하며 대답했다.

“공녀께서 입을 드레스의 색과 디자인을 미리 물어봤다. 에스코트할 예정이니 맞춰 입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형식적인 마음이 반, 나머지 반은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레이나와 옷을 맞춰 입겠다는 사심이 반이었다.

“아! 혹시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요?”

안나가 뒤늦게 걱정하며 물었다.

그럴 리가. 만드는 안나가 괜찮다면야 얼마든지 말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괜찮아. 예쁘네. 잘 어울려. 우리 나란히 서 볼까?”

로스틴의 체격이 좋다 보니 깔끔하게 떨어지는 라인의 검은색 정장이 꽤 멋졌다.

보통 정장은 케일란이 입은 것처럼 어느 정도 여유 있게 맞추기 마련인데, 레이나의 드레스가 몸에 딱 맞게 제작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로스틴 역시 그리 맞춘 터라, 어릴 때부터 단련해 온 그의 예쁜 근육이 정장 위로 은근하게 보였다.

레이나는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얼굴은 몹시도 금욕적인데, 몸은 그렇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반전 있는 남자, 최고!’

성격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반전이 있다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나가 개의치 않아 하는 줄 알았다면 자신도 물어보았을 텐데. 케일란의 안색이 새카매졌다. 하얀 정장과는 대비되는 흑색의 얼굴이 돋보였다.

그사이 커다란 거울 앞에 선 로스틴과 자신을 만족스럽게 보던 레이나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몰랐는데, 에스코트라는 게 지금부터 시작인 모양이었다.

레이나가 로스틴의 손에 제 손을 올리자, 그가 퍽 조심스럽게 그녀를 마차까지 안내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그의 배려가 처음도 아닌데, 차려입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이것도 성인식의 일부인 것인 양 들떴다.

때문에 레이나는 마차를 타지 않고 이동석까지 가도 된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흠, 흠! 흐흠!”

로스틴 역시 레이나가 헛기침하며 아닌 척 소형 이동석을 마차 바닥에 내던지는 것을 모르는 척했다.

그에 맞은편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를 불만족스럽게 보던 케일란이 지적했다.

“아니, 레이나. 그걸 왜 바닥에 버려? 아니, 아니, 그보다 마차를 왜 타? 평소처럼 소형 이동석으로-”

“와, 날씨 정말 좋다.”

“그렇군. 하늘이 맑아서 다행이야.”

“아니, 소형 이동석으로 바로 가면-”

“역시 그렇지? 다들 일 열심히 하고 있으려나.”

“아마도 그럴 거다. 모두 성실하니까.”

“내 말 좀 들어 줘! 왜 멀쩡한 소형 이동석 내버려 두고, 불편하게 마차로 이동하는 거야! 황성까지 냅다 소형 이동석으로 갈 때도 있었으면서!”

“성인식이 끝나면 마을을 만들어야 하니까 또 바쁘겠지?”

“아아, 전문가에게는 연락을 넣어 두었다. 며칠 내로 만날 수 있을 거야.”

“정말? 잘됐다.”

“…….”

물론 듣는 이는 없었다. 아니,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레이나도 로스틴도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너는 눈치도 없냐, 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았다. 케일란은 어쩐지 서글퍼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괜히 촉촉해지는 눈가를 훔친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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