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7화
마차를 탄 성녀는 수많은 호위들과 함께였다.
탄성을 지른 경비병이 이내 정중하게 예를 차리자, 그녀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성녀의 주변을 건장한 호위들이 둘러쌌다.
이쯤 되면 정말 초대장 때문에 쫓겨날 뻔했던 이는 레이나뿐이었다.
그녀가 다시금 눈을 세모꼴로 뜨는데, 기분이 퍽 좋은지 성녀가 맑게 웃으며 황성 정문을 통과했다. 앞선 두 번의 만남과는 다르게 오늘의 그녀는 꽤 행복해 보였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본성으로 들어가는 성녀를 물끄러미 보던 레이나가 넌지시 물었다.
“설마 쟤도 이번에 성인이 된 건가? 동년배로 보이기는 했는데.”
“그럴 수도 있고, 성인이 된 자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러 온 걸 수도 있고. 원래는 대신관의 일이지만 혹시 모르지.”
로스틴이 애매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후자인 모양인지 그녀의 곁에 대신관은 없었다.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잠깐이나마 독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가.’
식의 순서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 귀족의 성인식이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례 같은 것을 하겠지 싶었다.
그때 제대로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이번에도 다짜고짜 적대감을 표한다면 더는 친한 척할 일 없이 서로 갈 길 가면 될 것이다.
생각을 마친 레이나가 로스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자. 우리 오늘 바쁘잖아.”
“바빠? 왜? 여기서 뭐 따로 할 거라도 있어?”
노엘이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도 끼워 달라는 얼굴이었다.
노엘이라면 당연히 환영이었다. 그녀가 바쁘지 않다면 말이다.
“북부에서도 성인식을 열 예정이야. 여기서는 얼굴만 잠깐 비추고 바로 갈 거야.”
그런 맹랑한 계획을 짜 두었다고? 감히 황제 폐하를 알현하자마자 바로 퇴장하겠다는 말에 노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나도 갈게.”
물론 어떻게 그런 좋은 생각을 했냐는 듯, 동참하겠다는 뜻이었다.
레이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응. 어차피 난 성인식에 참석하려고 온 것도 아니니까. 볼일은 이미 끝났거든. 폐하께 서부 산맥에서 캔 보석들을 모두 자랑했지. 폐하의 표정을 레이나도 봤어야 했는데.”
노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조금 아까 알현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그래, 서부에서 보석을 채굴하고 있다고? 이게 요 며칠 사이에 캔 보석들이고?”
황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서부 산맥에 금은보화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물들이 워낙에 사나워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물들을 해치우고 보석까지 캐내어 보고를 하러 왔다니.
황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금은보화는 제국을 떠나 어느 나라에서든 수요가 많았기에 앞으로 제국에 큰 부를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그간 황실에게 홀대받았던 서부이니, 잘 보이려고 수익의 일정 부분을 상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흐음, 서부에서 광산을 채굴하는 것은 처음이었던가. 앞으로 고생이 많겠어.”
그러니 황실에서 조금 도와줄까? 라고 황제가 말을 이으려던 때였다.
“아닙니다. 실은 던전이 정리되기 이전부터 채광에 대한 계획을 세워 놔서 한 치의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노엘이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용건은 여기까지이니 이만 물러가 보겠다며 예를 차렸다.
“그럼 앞으로 열심히 채굴하겠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끝이야? 그딴 보고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라는 눈이었다.
보통은 여기서 황실에 득이 되는 제안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는 가만히 있어도 따라올 테니 이제 입지 차례였다.
그리고 서부 공작 노엘이 가장 빠르게 입지를 높이 다질 수 있는 방법은 황실과의 친분이었다.
그런데 그저 형식적인 보고와 소량의 보석만을 두고 이만 물러가 보겠다니.
황제는 현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노엘에게 물었다.
“뭐 빠진 말은 없는가?”
정말 그딴 보고를 하러 온 게 맞냐는 물음이었다. 그에 노엘이 방긋 웃었다.
“예, 없습니다. 그럼 평안하십시오.”
그딴 보고를 하려고 온 게 맞았다. 이제 서부는 금은보화 벼락을 맞았으니, 채광에 힘을 써서 잘 키우겠다 보고하려고.
알현실을 나서는 노엘의 등에 심기 불편한 황제의 시선이 박혔다.
그걸 느끼며 노엘은 씨익 미소 지었다. 태어나서 오늘처럼 유쾌한 날은 없었다.
‘그러게 진즉 서부를 좀 도와주지 그러셨어요.’
황실에서 서부를 조금이라도 신경 써 줬다면 지금쯤 산맥의 반을 바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앞으로 10년은 더 두고두고 곱씹을 회상을 마친 노엘이 레이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물론 개중에 가장 큰 건 레이나의 목에 걸린 루비야. 앞으로 공녀의 보석은 내가 담당할게. 아니, 자손까지 전부 서부에서 담당할게.”
“그랬다가 내가 사치를 부려서 파산하면 어쩌려고?”
레이나는 사치에 취미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자손 중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사치로 서부를 파탄 나게 만들지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뭐, 그럼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에 둘러싸인 공녀를 볼 수 있겠네. 볼만하겠는걸?”
절레절레. 레이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노엘도 정상은 아니었다.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를 초청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발은 착실하게 움직여 세 사람은 본성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황성이 처음인 레이나는 새로 지을 마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황성 내부 여기저기를 눈에 담았다.
로스틴과 노엘은 이미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었기에 딱히 감흥이 없었으나, 보폭을 줄여 레이나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도록 천천히 걸었다.
‘흐음, 역시 복도에는 그림이 국룰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값비싸 보이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중간중간 조각상이나 신기하게 생긴 조형물 같은 것도 보였다.
꽤 괜찮은 인테리어 같기는 한데, 다소 과했다. 따라 했다간 어마어마한 돈이 깨질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제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바른 장소인 황성을 참고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 할 만한 건 정원의 배치 정도였다.
‘아무래도 다른 마을을 둘러볼 필요가 있겠어.’
마을 경영 게임으로 어느 정도의 미적 감각은 습득한 상태이나, 게임으로 배운 지식은 현실성이 떨어졌다.
그렇게 성인식과는 상관이 없는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 세 사람은 연회장 앞에 다다랐다.
초대장이 없는 노엘은 연회장 밖 휴게실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레이나는 이번에도 로스틴의 동행이라는 명목으로 연회장 안에 입장할 수 있었다.
“로스틴 윈터스노우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입구를 지키던 하인의 커다란 목소리에 연회장 안에 있던 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로스틴 윈터스노우 공작?’
‘북부의 공작께서 성인식에는 왜……?! 차남도 아직 어린 걸로 아는데.’
수군수군.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린 귀족들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러자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거나, 아닌 척 뒤를 돌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가문에 마왕의 저주가 떨어져서 일가가 모두…….”
“그렇지만 곧장 공작 작위를 받으셨으니 굳이 성인식에는 오지 않아도…….”
“아니지. 그래도 성인식인데, 아무리 공작이라고 한들 예의를 차려서 오는 게…….”
장내가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시정잡배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듯했으나, 구경꾼이 된 것 같아서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레이나는 힐끗 로스틴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아니, 어쩌면 5년 내내 비슷한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서 무뎌진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아는 로스틴은 생각보다 꽤 섬세한 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레이나가 문 앞을 지키던 하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깜짝 놀란 하인이 바른 자세를 더 바르게 고치고는 레이나를 돌아보았다.
“내 이름은 왜 말 안 해?”
“아, 도, 동행인이라고 하셔서…….”
“초대장을 안 가져와서 그래. 그러니 내 이름도 크게 외쳐.”
레이나 루벨라이트.
뒤를 잇는 이름에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리 이름을 외치지 않고 뭘 하느냐는 레이나의 붉은 눈빛에 하인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도, 도, 동행이신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작 영애께서도 입장하셨습니다!”
웃기는 설명이었으나 그 효과는 탁월했다. 로스틴에게 쏠렸던 시선과 소문이 곧장 레이나에게로 쏟아졌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저 여자가 바로 소문의 그……?!”
“세상에, 검은색 드레스잖아?!”
“어머니! 저 여자, 진짜 검은 마법을 부리고 있어요! 드레스 좀 보세요!”
“오, 세상에! 신이시여! 저런 악마가 황성에 들어오다니!”
레이나를 곧장 받아들였던 평민들과는 달리,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아까와 반대로 이번에는 로스틴이 레이나를 신경 썼다. 왜 굳이 그런 행동을 했느냐는 얼굴이었다.
물론 레이나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이세계의 소녀에게 죽는 날만 기다리는 운명이었는데, 이렇게 성인식까지 참석한 게 어디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이었기에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대충 자리를 잡자, 그곳이 연회장의 중심인 것처럼 모두가 일정 거리를 두고 주변을 둘러쌌다.
당연히 대놓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둘도 아니고,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 티가 날 수밖엔 없었다.
다행히도 그 어색한 순간은 금방 깨졌다. 케일란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케일란 모어 백작 영식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도대체 저 하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름을 외쳤을까. 레이나는 문득 그의 성대가 걱정되었다.
레이나의 그런 걱정을 뒤로한 채 케일란은 백작가의 사람들과 함께 입장했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들의 미적 감각을 몹시 잘 아는 백작 부인이 혹시 몰라 준비해 온 옷으로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본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입을 삐죽대며 주변을 훑던 케일란은 레이나를 발견하곤 가족을 뿌리치고 곧장 그녀에게 달려왔다.
“레이나!”
백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뒤늦게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레이나에게 쏠려 있다는 걸 깨닫고는 케일란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성을 냈다.
“뭘 봐? 구경났어?”
깡패가 따로 없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용병이 되었는지 잘 알겠다며 레이나가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