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8화
“케일란, 됐어. 그만둬.”
레이나의 만류에 케일란이 혀를 차며 불만을 표했다. 물론 그 이상 날뛰지는 않았다.
여전히 짜증은 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레이나의 옆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신분이고 나발이고 상관하지 않고 날뛰던 천하의 망나니인 그를 고분고분 다루는 레이나에 모두가 다시 수군대기 시작했다.
모어 백작가의 일가는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눈을 비비며 의심했다.
“설마 세뇌라도 한 걸까요?”
“그럴지도요. 검은색 마법을 사용하니 세뇌 정도는 얼마든지…….”
“그렇지만 마물에게서 북부와 서부, 그리고 황성까지 구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도요. 마왕은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스스로 불렀다가 없앤 걸지도…….”
부채와 손바닥 뒤로 숨긴 입이 바쁘기 그지없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건만, 다들 상대를 깎아내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조금 떠들다 말겠지 싶었는데, 끝도 없이 생성되는 소문에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로스틴과 노엘, 막나가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말이 통하는 케일란과 아덴을 통해 귀족에 대한 이미지를 꽤 좋게 쌓아 가고 있었는데, 이 무슨 참변인지 모를 일이었다.
‘루벨라이트 공작이 특별하게 못된 놈도 아니었던 모양이네. 음습하기 짝이 없어.’
편견을 가져선 안 되지만, 눈앞의 귀족들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케일란이 왜 삐뚤어졌는지 알 것 같기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케일란에게 공감하게 되다니, 아주 조금 불쾌했다.
그렇다고 케일란처럼 깡패 시늉을 할 수는 없었기에,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던 레이나가 마침 근처에 있던 칵테일 잔을 손에 들었다.
이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가 제 근처에 검은 불꽃을 방출했다.
“꺄아아악!”
“으아악!”
“아아아악!”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뒤로 물러났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발이 엉키고 넘어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불꽃에 닿은 이들은 당장 죽는다며 엄청난 비명을 질러 대기도 했다.
‘그러게 누가 주변에 모여서 다 들리게 남 씹으래?’
달콤한 맛만 나는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신 레이나가 퍽 마음에 드는 광경에 평온한 얼굴을 되찾곤 입을 열었다.
“얇게 입고 와서 그런가, 춥네.”
여긴 난방도 없나. 괜히 힘쓰게 만드네.
덧붙이는 말에 그제야 사람들은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나의 불꽃이 무해하다는 것 또한.
그렇다고 태세를 전환하여 레이나를 옹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다시금 아닌 척 레이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아까보다 더 심해진 반응이었지만, 단체로 넘어지고 비명을 지르는 꼴을 보아서 그런지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졌다.
때문에 이제 좀 낫다며 레이나가 불꽃을 회수하자, 다시금 연회장에 비명이 울렸다.
“감히 신성한 황성에서 마법을 사용하다니……!”
“다, 당장 내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내쫓아야 합니다!”
“소름 끼쳐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실천에 옮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검은 마법이었다. 진짜 마왕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본능적인 꺼림직함을 떨칠 수는 없었다.
이를 본 케일란이 혼자 낄낄 웃어 젖혔다. 고고한 척하면서 남을 헐뜯더니, 세상에서 제일 웃긴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며.
그사이 로스틴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조용히 레이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현 상황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방금 같은 일을 벌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혹여나 진짜 추위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레이나의 안하무인 행태에 모두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케일란의 가족들만이 묘한 얼굴로 제 아들과 레이나, 그리고 로스틴을 번갈아 보았다.
케일란을 얌전하게 만든 것도 신기한데, 벌써 몇 년째 귀족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던 로스틴을 끌고 나온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따로 설명을 듣진 않았으나, 케일란이 그녀의 주변에서 마치 호위 기사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대치가 이어지는 사이, 황제 부부와 황태자, 그리고 성녀가 연회장에 입장했다.
“황제 폐하, 황후 전하, 황태자 전하, 성녀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먼저 본성에 들어간 성녀가 왜 연회장이 없나 싶었더니, 앞서 황제 폐하를 알현한 모양이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차리는 사람들 속에서 대충 고개를 숙이며 성녀를 확인하자, 우연히도 눈이 마주쳤다.
왜 레이나가 여기에 있냐며 눈을 크게 뜬 성녀가 이내 못 볼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제 의심이 풀렸을 만도 한데, 어째서 아직도 저렇게 적대적인 건지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지금 여기 모인 귀족들처럼 주변에서 헛소리를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이, 황제 일가가 상석에 자리했다.
최근 여기저기서 나타난 마왕과 마물을 열심히 상대했던 성녀는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황제의 바로 옆에 착석하게 되었다.
호위인지, 그녀의 근처에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도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차림새가 꽤 고급스러워 호위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언제 레이나를 흘겼냐는 듯 모두가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하자, 흐뭇한 얼굴로 이를 훑은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도 이렇게나 많은 귀족이 훌륭하게 성인이 되어 기쁘기 그지없도다.”
그의 표정에 자비로움이 가득했다.
조금 아까 노엘과의 독대로 심기가 불편했었는데, 이렇게나 눈을 빛내며 집중하는 귀족들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제국 천 년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귀족들의 역할이 아주 컸지. 성인이 된 그대들도 필시 앞으로의 제국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황제가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이를 경청하는 귀족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태평성대를 유지해 온 황족에 대한 경외였다.
그렇게 황제의 길고 긴 연설이 끝나자, 이번에는 황후 차례였다.
“세상에…….”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지 말걸. 설마 이 뒤에 황태자까지 연설을 잇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인지 황태자의 연설은 없었다.
물론 불행히도 대신하여 성녀가 연설을 시작했지만.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그녀가 헛기침하여 목소리를 가다듬곤 입을 열었다.
“아직 이곳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러분들께서 더는 두려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신탁대로 제가 꼭 마왕을 무찌를 거예요.”
그간 열심히 마물을 무찌른 덕분에 레벨도 800까지 올린 참이었다.
북부의 미궁과 서부의 던전이 사라진 상태라서 이제부터가 문제이긴 했지만, 성녀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해서 레벨 1,000을 채우고 마왕을 물리칠 생각이었다.
그녀가 마왕을 운운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이나에게 쏠렸다.
황제 부부와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은색 마법을 두른 음침한 드레스에 황제 부부가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 그러고 보니 공녀도 올해 성인이 되었군.”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침묵 사이에서 입을 연 이는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그는 영문을 몰라 하는 황제 부부를 위해 설명을 보탰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공녀입니다. 황성에 나타난 마물을 없앴다던.”
안전하게 나라를 지켜야 할 황제가 본성 안에 숨어 벌벌 떨고 있을 때, 번개처럼 나타나서 모든 마물을 단번에 없애 버린 그 공녀.
그때를 회상하니 레이나에게 수차례나 뺨을 맞았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당혹스러운 마음만 들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스스로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혼자서 모든 마물을 해치웠죠. 그녀가 없었다면 황성은 마물에게 함락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황태자가 팔짱을 꼬며 말을 이었다. 못난 황실과 무능한 기사들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레이나를 두둔한 것이 되었다.
황태자가 그리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언짢게 레이나를 보던 귀족들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불만이 그득해 보이는 얼굴의 성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장소에 성녀도 함께 있었던 걸로 아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데.”
“그, 그땐…….”
갑자기 공격을 당할 줄은 몰랐는지 성녀가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사실 그녀로선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내내 마왕이라고 생각했던 레이나가 마왕이 아니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 사람들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만 있었으니까.
그런 성녀를 구해 준 것은 내내 그녀의 뒤에 있던 낯선 남자였다.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성녀를 제 뒤로 보내며 변명을 대신했다.
“다른 중요한 볼일이 있으셨겠지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마물들을 해치우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분이시니까요.”
“크래프 공작, 그대에게 물은 것이 아니야. 주제넘군.”
황태자가 다시금 비아냥거렸다.
공작은 동서남북에 각각 한 명씩만 존재했으니, 크래프라는 저 남자는 남부의 공작인 모양이었다.
“그저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심약한 성녀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주제넘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을 거지? 아, 말로 해선 통하지 않는 건가?”
황태자는 황족 모독죄를 들먹이며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 것처럼 보였다.
남부 공작은 그런 황태자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뭐 하는 짓이야.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끝내면 될 일을 가지고.
상황이 좋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성녀와 대화는커녕, 황태자의 칼부림 속에서 성인식이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성인식을 제대로 마친 뒤 루벨라이트 공작에게서 돈을 뜯어내야 했다.
때문에 구경이라도 난 듯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레이나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성녀가 화장실이라도 급했나 보지.”
불행히도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녀가 미간을 구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