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9화
“어, 음. ……아니면 말고.”
뒤늦게 정정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화장실을 언급해서 그런지 성녀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태자가 맥이 풀렸다는 듯 남부 공작과의 대치를 멈추었다는 점이었다.
남부 공작은 레이나의 발언을 몹시도 아니꼽게 여기는 듯싶었으나, 별말은 없었다.
그래도 싸움은 막아 다행이었다.
그 와중 황제는 호기로운 황태자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았다.
신성한 성인식에서 괜한 불화를 일으켜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 없어서 참는 표정이었다.
대체 왜 제 아들은 저런 놈으로 자랐을까. 황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외동이라고 오냐오냐하지 않고 나름 엄하게 혼도 내며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여러 업무도 맡겼거늘.
어째서인지 황태자는 폭력적이고 비뚤어진 심성으로 자랐다.
그렇다고 혼만 낸 것도 아니었다. 아비인 황제가 황태자를 엄하게 꾸짖으면, 황후가 그를 다정하게 품어 주었다.
종종 식사를 같이하며 잘한 일은 칭찬도 했고. 그러니 혼만 내서 인성이 저렇게 되었을 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사실 황태자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안하무인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혼을 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황위를 찬탈하고 희대의 폭군으로 군림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우려가 될 정도였다.
황제가 생각에 빠져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보는 사이, 본격적인 성인식이 시작되었다.
호명되면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와서 황제 부부에게 덕담을 듣고 성녀의 축복을 받는 것이 순서였다.
이름이 불리는 차례는 가문의 명망 순이었다. 공작 가문부터 시작하며 남작 가문까지 차례대로 축복을 받았다.
오늘처럼 여러 공작 가문에서 참석한 경우에는 생일이 빠른 사람을 먼저 호명했다.
때문에 제일 처음 이름이 불린 것은 로스틴이었다. 공작 작위를 이은 데다가 나이도 가장 많아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발견한 황제의 만면에 미소가 걸렸다. 북부 공작은 다른 귀족과는 차원이 달랐다.
윈터스노우 공작가가 제국 초기부터 수많은 마물에게서 북부를 지켜 온 덕에 제국은 지금까지 번영할 수 있었다.
5년 전, 끔찍한 사건 이후로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장성하여 훌륭한 모습으로 성인식에 참석해 주다니. 황제는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의 앞에 다다른 로스틴이 몸을 낮추곤 예를 갖추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황후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윈터스노우 공작. 그간 잘 지냈는가? 장성한 그대를 이렇게 황성에서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군.”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늘 수고하고 있는 것을 잘 아는데 내가 찾아갔어야 마땅하지.”
이는 진심이었다. 사실 공작 일가가 처참한 운명을 맞이했을 때 곧장 북부에 가 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두려움 때문에 가지 않은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바쁘다는 핑계로 로스틴을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한데 이렇게 공손한 말투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니 마음이 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흠, 물론 바빠서 그러지 못했지만. 늦게나마 성인식에 참석해 주어 고맙네.”
굳이 변명을 덧붙이는 황제에 황태자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황제의 저런 모순적인 언행이 싫었다. 스스로가 가장 옳고, 제 실수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듯한 언행 말이다.
“앞으로도 공작과 북부에 무한한 번영이 있기를 바라네.”
황태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황후의 덕담까지 끝나 이제 남은 것은 성녀의 축복뿐이었다.
로스틴이 레이나와 친분이 깊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그녀로서는 참으로 껄끄럽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그가 레이나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성녀의 우려와는 다르게, 로스틴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성녀의 앞에서 예를 차리곤 언제 축복이 내리나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본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하긴! 진짜 마왕이 누군지 따지기 이전에, 저번에는 내가 착각한 게 맞긴 했으니까……!’
북부 공작은 공명정대하다고 들었다. 때문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사실대로 말한 걸지도.
그리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이 게임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유 없이 자신을 미워할 사람일랑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남부 공작 역시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성녀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곧장 호의를 내보이며 이렇게 호위까지 자청했다.
때문에 성녀는 최근 기분이 꽤 좋은 상태였다. 드디어 자신이 생각하고 꿈꿔 온 게임 속 여자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공녀와도 우선은 척지지 말자.’
몇 번의 경험으로 확실한 증거도 없이 부정적인 말을 꺼내면 도리어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어차피 주인공은 자신이니, 괜한 불화만 만들지만 않는다면 모두가 좋아해 줄 터.
아무리 지금은 조용히 지낸다고는 해도 진짜 마왕이라면 언젠간 정체가 탄로 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신성한 빛.”
생각을 마친 성녀가 로스틴에게 축복을 내렸다. 외상이 없어서 상처가 낫진 않았지만, 확실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에 로스틴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오오.”
“저게 바로 성녀님의 치유 마법이군.”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직접 겪은 것도 아니건만, 그만큼 성녀의 치유 마법은 성스러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로스틴이 짧은 인사와 함께 물러나자, 그다음 불린 이는 레이나가 아닌 후작 가문의 영식이었다.
레이나는 걸음을 옮기려던 발을 멈추었다.
“초대장이 없어서 순서가 밀렸나?”
“아마도 그런 것 같군.”
고개를 갸웃대는 레이나의 물음에 로스틴이 긍정했다. 정문을 통과할 때 한차례 출석을 확인했기에 초대장이 없는 레이나는 누락이 된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으니 기다려야겠다.”
성인이 된 제국의 귀족들이 죄다 모였다고는 해도, 애초에 귀족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 같았다.
그사이 황제 부부와의 대화를 마친 후작 영식이 성녀에게서 축복을 받았다.
“신성한 빛!”
그는 황성으로 오는 길에 뺨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는데, 성녀의 치유 마법 한 번으로 지저분하게 남아 있던 그의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오, 맙소사.”
“세상에, 신이시여!”
눈에 보이는 상처가 단박에 사라지자,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레이나 역시 조금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저렇게까지 깨끗하게 치유하다니, 그간 레벨을 꽤 많이 올린 모양이었다.
미궁과 던전이 사라져서 올리기 힘들었을 텐데. 아마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레이나는 속으로 성녀의 근성을 칭찬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녀와는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남들은 절대 모를 비밀 이야기도 하고 말이다. 앞으로 살날이 많으니 그런 친구를 하나쯤은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늘을 기점으로 잘 대화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성녀의 신성력을 목격한 이들은 이름이 채 다 불리기도 전에 후다닥 황제 부부의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성녀의 축복을 몸소 느껴 보고 싶어서였다.
황제를 알현할 때보다 더 감격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귀족 자제들의 모습에 성녀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그래, 자신이 바라던 삶은 이런 것이었다. 힘겹게 마물을 잡으며 레벨을 올린 보람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케일란의 차례가 되었다. 그간 농사일로 인해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그였지만, 성녀의 마법으로 회복되었다고 해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나을 상처이고, 딱히 아프지도 않은 데다가, 또 생길 상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은근 성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레이나를 모함한 탓이었다.
‘사과도 안 해 놓고 치유 마법만 쓰면 다인가.’
이딴 요망한 술수로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흥.”
“앗……!”
홀로 전의를 불태운 케일란이 성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성녀가 당황했다.
레이나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그런 것인데, 정작 레이나는 얘가 왜 이러나 싶을 뿐이었다.
“난 의리는 지킨다고.”
케일란이 멋진 표정을 지으며 얼빠진 레이나에게 말했다.
아니, 뭔 의리. 레이나의 미간이 파사삭 구겨졌다. 진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를 놈이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대장을 가지고 참석한 모든 이들의 이름이 불리었다.
한 번씩 성녀의 신성함을 맛본 그들의 얼굴에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괜히 신탁의 성녀가 아니었다. 역시 그녀는 대단하다며 모두가 수군거리고 있을 때였다.
로스틴에 성녀까지 모두 갖게 된 황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성인식 파티를 즐기라고 말을 하려고 했거늘, 황태자가 그의 말을 끊고 레이나를 가리켰다.
“아직 한 명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손을 들려고 했는데 마침 다행이었다. 황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레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