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0화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예의 따윈 잘 몰랐으나 앞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했으니 이게 맞겠지.
아니나 다를까, 황제 부부의 심기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물론 활활 불타고 있는 레이나의 드레스는 조금 꺼림칙했지만, 마왕의 행세를 하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존재 덕에 어느 정도 의심이 벗겨진 상태였다.
게다가 성인식에까지 손수 참석하여 이렇게 눈앞에서 고분고분 예를 차리고 있었고, 얼마 전엔 황성에 나타났던 마물들까지 처리했다고 들었다.
거기에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여식이니 굳이 멀리할 필요가 없었다.
후처에게서 본 장남이 따로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여자라고 공작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기에 차기 동부 공작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황제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레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몸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이리도 쾌차하여 성인식에 참석해 주어 기쁘기 그지없군. 이렇게 보니 공녀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군.”
머리 색과 눈 색이 꽤 변한 참이라 어릴 적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어차피 형식적인 자리였다.
보여 주기식 자리이니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좋은 말만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제가 어릴 때 보았던 그대로시네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들은 그대로 되돌려주자 황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재미있는 말이군.”
역시 동안이라는 말은 저세상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레이나의 사회성이 1 올랐다.
“황후 폐하께선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어머나.”
그래서 한술 더 뜨자 황후도 까르르 소녀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빈말인 걸 알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날 빼먹었다고 알려 준 건 고마운데, 그렇다고 너한테까지 아부하진 않아도 되지?’
라는 뜻으로 레이나가 황태자에게 눈인사하여 고마움을 표현하곤 다시 황제 부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 마음을 졸이며 레이나를 주시하고 있던 로스틴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왕으로 오해받아 혹여나 나쁜 소리가 오가진 않을까 싶었는데, 저토록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루벨라이트 공작은 오늘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 돌아가거든 안부를 전해 주기를 바라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심지어 레이나를 죽이려고 했던 공작까지 들먹였음에도 그녀는 둥글게 대화를 마쳤다.
사실 레이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빨리 이 무의미한 성인식 행사를 마치고, 윈터스노우 공작 성에서 신나게 놀고 싶을 뿐이었다.
때문에 대충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끝내니, 이번에는 성녀 차례였다.
레이나가 성녀를 바라보자, 흠칫 놀란 성녀가 짧게 몸을 떨었다. 일전에 헛소문을 퍼뜨린 죄가 있었기에 괜히 찔렸다.
그러나 레이나는 딱히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오해는 이미 수두룩하게 받은 뒤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하나하나 신경 썼다간 잘 시간도 부족할 게 틀림없었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성녀였다.
이렇게 계속 찔려 할 바엔, 차라리 빨리 축복을 내린 후 피곤해서 이만 쉬러 가겠다고 말을 꺼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 신성한 빛.”
주문을 읊자 곧장 흰빛이 레이나를 감쌌다. 그 모습을 만인이 지켜보았다.
그녀가 마왕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렴, 성녀의 빛이니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일으킬지도.
그러나 레이나를 감싼 흰빛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이상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아.”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며 레이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혹여나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지켜보던 이들이 머쓱해했다.
흠, 흠. 헛기침하면서 ‘하긴, 치유 마법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며 괜히 한마디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 가장 마음이 편해진 이는 성녀였다. 레이나에게 축복을 내리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기력을 소모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오늘의 일정은 여기까지였다. 사실은 무도회에 참가하여 춤이라는 것을 추고 싶었지만, 레이나의 존재가 너무나도 불편했기에 이만 신전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성녀에게 두 걸음이나 더 다가간 레이나가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너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거 알지? 나도 바깥세상에서 왔어. 서울 출신이라고. 막무가내로 소환당한 거야.”
정확히는 잘못 말해서 이상한 인물에 빙의된 상태였지만.
“무슨……!”
성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레이나가 말한 바를 확실히 이해했으나, 단번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듯했다.
이를 깨달은 레이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전, 성녀에게 다시금 말했다.
“우리 같은 처지야. 적대할 필요가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오해 하지 말고 잘 지내자.”
만인의 앞이었기에 이 이상의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알아들은 것 같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줄 안다면 여기까지만 말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 생각한 레이나가 간단히 예를 차린 뒤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마른 등을 바싹 굳은 성녀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꼭 맞잡은 그녀의 두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레이나가 자리에 앉자, 같은 처지라는 마지막 말을 들은 로스틴이 그게 무슨 뜻이냐며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음, 내 태생의 비밀? 나중에 말해 줄게. 일이 다 해결되면.”
아직 마왕이 잡히지 않았기에 지금은 좀 그랬다. 그렇다고 평생 혼자만의 비밀로 둘 생각은 아니었다.
로스틴처럼 입이 무겁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간략하게나마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건 빼고.’
주연급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로스틴은 명백히 조연이었다. 심지어 성녀의 레벨을 올리기 위한 고기 방패와 다름없는 존재.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거기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고.
“왜? 뭔데? 나도 알려 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당연하게도 케일란이 끼어들었다.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근처에 그의 가족들까지 보였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동자 세 쌍이 레이나를 주시했다.
‘아아, 그렇지. 주연은 얘였지.’
정확히는 주연 중 하나. 케일란은 성녀가 꼬실 수 있는 남자 주인공 후보 중 하나였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케일란과 로스틴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얘는 남주 후보고, 얘는 아닌 걸까. 뒤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로스틴이 더 남주 후보처럼 생겼는데.
참으로 의문이었으나, 어쩌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밸런스가 안 맞으면 한 명한테 몰빵될까 봐 그런 건가.’
케일란은 물론이고 또 다른 남주 후보인 아덴도 그녀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레이나에겐 둘 다 그저 멍청하게 남의 집에 쳐들어왔다가 대머리가 되었던 남자 생물일 뿐이었다. 성격이 더러운 황태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는 지난번에 단체로 몰려왔던 대머리들 중에서도 남주 후보가 있었다.
얼굴만은 꽤 잘생겼을 것이 분명한데, 누군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대머리 군단 사이에 끼어 있어서 누가 누군지 구별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제는 머리카락이 조금 자란 상태이건만, 레이나의 눈에는 다 똑같이 보였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황제가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춤을 추며 진짜 성인의 파티를 경험할 시간이었다.
그 틈을 타 로스틴의 손을 잡은 레이나가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케일란도 함께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가족에게 붙잡혀 있었다.
특히나 꽤 날카로운 얼굴을 한 그의 형에게 말이다.
“케일란, 이제 방황은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와라. 더는 네놈의 망나니 같은 행태를 두고만 볼 수가 없다.”
“망나니라니! 나 이래 봬도 꽤 유명한 용병이라고!”
“귀족이 용병이 된 것 자체가 수치다! 아까도 성녀님께 제대로 예의도 차리지 않아서 내 얼굴이 다 부끄러웠어!”
심지어 동행인이 그 레이나 루벨라이트라니, 도저히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녀가 악행을 저지르는 걸 실제로 본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껄끄러운 존재인 건 변함없었다.
성인식에 가족 하나 없이 혼자 참석한 걸 보면 분명 멀쩡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평생에 한 번뿐인 성인식에도 오지 않을 만큼 가족들이 레이나를 외면하는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그러한 연유로 케일란이 가족들과 싸우고 있었기에, 그를 두고 연회장을 빠져나온 레이나는 노엘, 로스틴과 함께 북부로 돌아갔다.
공작이 둘이나 있어 본성 뒤편에 마련해 놓은 이동석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사이, 성녀는 비틀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쓰러지진 않았다. 지척에서 성녀를 지켜보고 있던 남부의 공작이 곧장 그녀의 몸을 지탱했기 때문이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그득했다. 마지막에 대면한 검은 마법을 쓰는 공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설마 방금 공녀가 성녀님께 해를 끼친 건……!”
그래서 그리 물으려 하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성녀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