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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11화 (111/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1화

성녀가 서둘러 부정했지만, 남부 공작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만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성녀는 마음씨가 고우니, 안 좋은 대화가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공녀를 감싸는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역시 대신관님의 말씀이 맞을지도.’

남부 공작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얼마 전, 대신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대신관은 꽤 만나기 어려운 존재였는데 남부 공작은 사정이 달랐다.

성녀가 제일 먼저 도왔던 곳이 남부라서 그런지 그녀는 꽤 자주 남부를 찾았고, 필연적으로 대신관 역시 종종 남부를 들렀기에 그럭저럭 친분이 쌓인 상태였다.

“예? 진짜 마왕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제게 내려온 신탁과는 조금 상황이 달라서요.”

신탁은 절대적이었다. 다소 늦을 때가 있기는 했지만 남부와 관해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대신관이 이상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남부 공작은 대신관의 말에 한 치의 의심을 갖지 않았으나, 의문인 것이 하나 있었다.

“마왕이 아닌 자도 마물을 소환할 수 있는 겁니까?”

마왕도 아닌 자가 어떻게 마물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에 대신관은 역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상하게 답했다.

“마물의 언어를 알고 있다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마물의 언어를 이해하기 쉽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요.”

실제로 진짜 마왕으로 태어난 레이나 또한 마물을 소환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거절한 탓이었다.

목소리를 잃은 레이나는 마물을 소환하기는커녕, 그냥 검은색 마법을 좀 잘 부리는 마법사일 뿐이었다.

그것도 다른 마법사들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곳에만 마법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특이한 마법사.

그러나 그런 사실은 굳이 남부 공작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대신관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공작은 정말 그의 말대로 진짜 마왕이 따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조금 아까 마주친 레이나 같은 사람 말이다. 확증일랑 전혀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레이나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대신관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려고 시선을 분산시킨 것일 수도.’

덕분에 그녀는 초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성까지 출입이 가능했다.

게다가 황성에 나타난 마물을 해치웠다고 하던데,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애초에 황성에는 마물이 잘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난다고 한들, 그녀가 황성에 방문한 날과 겹칠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스스로 불러내어 처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확률이었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남부 공작이 조용히 인상을 쓰고 있자, 성녀가 그의 팔을 밀어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저, 저는 이만 신전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놀란 공작이 그녀의 상태를 다시금 살피며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다치신 겁니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쉬고 싶어요……!”

이 세상에 소환된 사람이 자신 혼자가 아니라니. 그럼, 그렇다면 이 세계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일까?

신의 부름을 받은 게 자신 혼자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고된 마물 퇴치도 열심히 해 온 자신은 무엇이 된다는 말인지.

충격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빨리 신전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성녀는 재차 자신을 부축하려는 남부 공작의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그사이, 이동석을 사용한 레이나는 공작 성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왜 곧장 공작 성으로 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나 의문이었는데, 조금 걷자 의문이 해소되었다.

“오오! 오셨다!”

“공녀님! 성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축하드려요!”

“와!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공작 성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아이스베리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레이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뭐야. 생각지도 못한 축하 행렬에 깜짝 놀란 레이나가 우뚝 멈췄다.

뭐냐는 듯 로스틴을 올려다보자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다들 공녀의 성인식을 축하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먼저 제안한 건 아니야.”

아무리 레이나의 불꽃이 사방에 깔려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추운 날씨에 사람들을 밖에 세워 놓고 기다리게 시킬 리가 없었다.

“어휴, 하여튼 다들 극단적이라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 레이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중에 가장 극단적인 것은 레이나였으나,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마주 보며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다들 공녀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로스틴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거기에 그쪽도 포함되는 거야?”

그래서 장난스럽게 묻자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아마도 내가 제일일지도 모르지.”

아니, 잠깐만. 무슨 사람이 이렇게 돌직구인 건데?

장난으로 던진 돌에 왜 돌을 던진 사람이 맞아 고통을 호소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종종 이러기는 했지만 매번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말문이 막히게 하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레이나가 눈을 깜박이며 로스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로스틴이 그녀의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뺨이 너무 찬데. 밖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그의 손등 역시 찬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로스틴의 돌발 행동 덕분에 레이나의 뺨은 조금 뜨거워졌지만.

그런 두 사람을 노엘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았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예전부터 좀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을 하진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응. 그렇지.”

어쨌든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불꽃이 사방에 깔렸다고는 하나, 바람이 꽤 매서웠다.

이대로 있다간 다들 동상에 걸릴 것 같았다. 차게 언 로스틴의 손을 잡은 그녀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길목 양옆에 주르륵 늘어선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한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극단적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사실 기분이 꽤 좋았다. 아니, 괜한 감동까지 밀려왔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축하를 받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자칫 잘못했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때문에 애써 눈을 부릅뜬 레이나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무언가를 위로 뿌렸다.

“꽃잎?”

아니, 꽃잎 크기의 연녹색 무언가였다. 의문이 든 레이나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들었다.

“……어, 양배추?”

혹시나 하여 입에 넣어 씹자, 아삭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원한 양배추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뭐야, 다들 지금 양배추를 꽃잎이랍시고 뿌리고 있었던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뒤돌아보니 레이나가 지나간 자리에 떨어진 양배추 조각을 줍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망가지지 않은 것들만 골라서 저녁 식사 재료로 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아깝지. 씻으면 먹을 수 있는데 버릴 필요는 없지.’

레이나의 시선을 따라간 로스틴 역시 양배추 조각을 줍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정말 그가 시킨 일은 아닌지, 로스틴 또한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레이나가 큭큭 웃으며 주변에 떨어진 양배추 조각 몇 개를 주워 들었다.

“춤추다가 배고프면 먹을게. 다들 고마워.”

웃으라고 장난스럽게 한 이야기였는데, 다행히 모두 레이나를 따라서 웃었다.

그렇게 양배추 세례를 받으며 공작 성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공작 성의 사람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성인식이 열릴 연회장까지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입장하자, 이번에는 저택의 식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석자는 나 하나인 것 같은데…….’

뭘 이렇게 성대하게 꾸몄을까.

레이나는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이 조금 이해되지 않았지만, 북부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은인과도 같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국을 통째로 빌려 레이나만의 성인식을 열어 주고 싶었으나, 해 줄 수 있는 것이 축하 인사가 전부라 아쉬움만 남았다.

황성만큼 화려하게 꾸민 연회장 한가운데 선 레이나가 자신을 위해 성인식을 준비해 준 로스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거야.”

한데 아직 뭐가 더 남아 있던 모양인지, 로스틴이 가볍게 하인에게 손짓했다.

그에 하인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빨간 장미꽃다발을 가져왔다. 도대체 몇 송이인지 모를 만큼 너무 커서 로스틴의 상반신이 거의 다 가려질 정도였다.

이를 레이나에게 내민 로스틴이 부드럽게 눈을 접으며 말했다.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공녀.”

그 순간 레이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저 축하의 의미로 주는 꽃다발일 텐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녀가 거대한 장미꽃다발을 받아 들자,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게 끝이 아닌지 로스틴은 하인에게서 작은 상자 하나를 더 건네받았다.

“북부에선 성인이 된 여성 귀족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지.”

응? 그랬나?

북부에서 성인이 된 여성 귀족이 거의 없었던 탓에 아무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갸웃대었다.

“그, 그래?”

그 사이에서 조금 당황한 레이나가 손을 내밀자, 로스틴이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아까 노엘에게 선물받았던 목걸이와 비슷한 색의 루비 반지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맞춘 것 같은 디자인이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보던 노엘이 불만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가 자신이 목걸이를 주었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질투 나게.

아닌 게 아니라, 목걸이를 받았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반지는 왜 이렇게 쑥스럽고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한껏 뺨을 붉힌 레이나가 괜히 꽃다발 뒤로 얼굴을 감추었을 때였다.

뜻밖의 손님이 공작 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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