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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12화 (112/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2화 ❤(ᵔᵜᵔᶹ)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곧 방문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몇 없었기 때문이다.

“……성녀?”

‘아니, 쟤가 대체 여길 왜 온 거야? 그것도 늘 대롱대롱 달고 다니던 사람들 없이 혼자잖아?’

모처럼 좋은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등장한 성녀에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레이나는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성녀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던 탓이다.

‘이건 예상 밖인데.’

사실 레이나는 성녀와 잘 지내야지 하는 바람은 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면 현실을 부정한다든가, 질투한다든가, 그도 아니면 그냥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사이로 지낸다든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저런 얼굴이라니. 레이나가 눈을 끔뻑이고 있자, 눈시울을 붉힌 성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어…… 대화를, 대화를 하고 싶어요…….”

몹시도 떨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레이나는 흔쾌히 동의하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타깝지만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다들 먼저 놀고 있을래? 춤도 추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내 거만 조금 남겨 줘.”

방문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였기에 다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로스틴이 물었다.

“동행할까?”

“아니, 괜찮아.”

위험할까 봐 그러는 모양인데, 불행히도 여기서 가장 힘세고 위험한 것은 레이나였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했다.

단호한 레이나의 대답에 숨겨진 뜻을 읽은 로스틴이 쓰게 웃었다.

그녀가 걱정되어 동행하고 싶었으나 이 이상 따라붙기에는 레이나가 너무 강했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사이 미아에게 꽃다발을 넘긴 레이나가 연회장 입구 근처에서 우물쭈물하는 성녀에게 다가갔다.

“조용한 곳으로 갈까?”

잠시 뒤, 레이나와 성녀는 공작 성 하인의 안내로 연회장 근처 휴게실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데?”

아마도 아까 황성에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겠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하려는지 몰라 그리 묻자, 성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음, 역시 뭐든지 갑작스러운 애야.’

몇 번 그녀를 겪은 덕분에 더 이상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레이나는 맞은편에서 하인이 가져다준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성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새, 생각해 봤어요…….”

예상대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성녀는 조금 아까 신전에 돌아가 혼자 생각을 정리했던 것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울함과 분노, 허탈함이 먼저 들었다.

대체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나 힘들게 사람들을 돕고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러다가 이내 뒤를 이은 것은, 역시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레이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되돌아보면 정말 그랬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목을 받는 것은 레이나였고, 해결을 하는 것도 그녀였다.

그래서 온 것이었다. 확인하려고. 만약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어, 어떻게 해야 하지……?”

“흠…….”

성녀의 생뚱맞은 물음에 레이나가 태연하게 갓 구운 쿠키를 씹었다.

갑자기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아진 성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물었다.

“주,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당신인가요……?!”

그러다가 튀어나온 물음에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지금까지 그딴 걸 고민하면서 울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아니지, 아니지. 쟤한테는 중요한 일일 수도.’

지금까지 주인공인 줄 알고 열심히 레벨을 올렸을 텐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충격일 게 분명했다.

레이나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주인공은 너 맞아.”

“그, 그럼 그쪽은……?”

넌 뭐냐는 질문에 레이나가 잠시 고민했다. 글쎄, 자신은 대체 무엇일까.

태어나기는 최종 보스로 태어나긴 했는데, 그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음, 그냥 일반 시민?”

그래서 떠오르는 대로 답하자, 어느새 눈물을 뚝 그친 성녀가 이상한 걸 보았다는 눈으로 레이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니면 마법 좀 부리는 귀족?”

이해를 못 한 것 같아 설명을 덧붙이니 성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성스럽고 예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왠지 웃겨서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마치 친구들끼리 농담하다가 누군가가 개소리를 해서 극혐하는 반응처럼 보였다.

가식을 떠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허공에 소리치는 것 같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고.

“진짜야. 마법 좀 부리는 한량일 뿐이라고. 화려한 황성의 성인식보다는 양배추나 던져 주는 마을 성인식을 더 좋아하는 쫓겨난 공녀일 뿐이야.”

그럼에도 성녀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차 의문을 드러냈다.

“그럼 북부의 미궁과 서부의 던전을 없앤 건요?”

“음, 그건…….”

후자는 부탁을 받아서 그런 것이었지만, 전자는 꽤 긴 설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하기 위해선 자신이 원래 최종 보스였다는 것도 밝혀야 했다.

말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걸 성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그간 성녀의 반응을 돌이켜보면 ‘역시 네놈이 마왕이 맞았구나!’ 하며 급발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이미 저세상에서 넘어왔다는 말까지 한 뒤인데, 이제 와서 말할 수 없다고 발뺌하는 것도 이상했고.

‘에이, 모르겠다.’

때문에 레이나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죽었는지부터 시작하여, 왜 이 몸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까지.

생각지도 못하고 듣게 된 장대한 스토리에 성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이내 레이나의 기구한 삶에 공감이라도 한 것인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레이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는 사실 네가 되고 싶었어. 일이 좀 꼬여서 이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생각은 전혀 없어. 그래 봤자 마지막엔 너한테 퇴치당하잖아.”

그렇게 레이나가 길고 긴 설명을 끝냈다.

다행히 성녀는 레이나의 말을 전부 이해했다. 물론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라서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으나 납득할 수는 있었다.

불행했던 레이나의 과거에 동질감도 느껴졌다. 늘 당당해 보였던 그녀가 정작 되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놀라웠고, 갑작스레 마왕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동정심도 들었다.

“아, 알겠어요. 근데 그럼, 제가 주인공이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해치울 마왕이 없는데 주인공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성녀가 가장 고심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그놈의 주인공 타령이 아직도 끝나지 않자 레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주인공이 그렇게 중요해? 모처럼 능력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잖아. 그럼 그냥 하고 싶은 일만 마음껏 하면서 살아.”

“하고 싶은 일이요? 그건 마왕을 해치우는 거였는데…….”

성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마왕을 해치우고 세상을 어둠에서 구하는 것.

“그게 제가 여기로 오게 된 이유잖아요……? 이 게임의 목표이기도 하고요.”

마치 그 이유 없이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였다.

그에 레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야! 이 게임의 목표는 마왕을 해치우려고 레벨을 올리는 동안 여러 남주 후보들과 애정을 쌓고 마지막에 이어지는 거라고. 마왕은 그냥 곁다리야. 널 돋보이게 만들어 줄 장치일 뿐이지.”

남주 후보들이 마구 꼬여야 하는 여자 주인공에겐 특별함이 있어야 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주 후보들이 꼬일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주밖에 해치우지 못하는 마왕이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마왕은 성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이지, 목표 그 자체는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던 모양인지 성녀가 눈만 끔뻑였다. 그에 레이나가 답답한 속을 한 모금의 차로 달래곤 말을 이었다.

“평생 마왕만 해치울 건 아니잖아? 해치운 다음에는 뭘 할 건데? 게임은 마왕을 해치우고 남주를 고른 뒤에 끝이 나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게 된 이상 그게 끝이 아니잖아?”

아마도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엔딩을 보았다고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게 될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저, 저는 마, 마왕만 해치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 다들 그렇게 말해서……. 마왕을 해치우기만 하면 된다고……!”

뜻밖의 물음에 목이 타기라도 하는 듯 그녀가 서둘러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돌이켜보니 정말로 그 이후에 뭘 할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이리저리 방황하는 성녀의 눈을 확인한 레이나가 그제야 그녀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너 혹시 이 게임 안 해 봤어?”

“네, 네? 네…… 아, 안 해 봤어요. 유, 유행한다고 해서 산 건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트럭에 치여서…….”

레이나가 입을 반쯤 벌렸다. 설마 그 트럭이 자신이 익히 아는 그 트럭은 아니겠지 싶어서.

로판 트럭. 독자들을 로판의 세계로 데려다준다는 트럭 말이다.

“평소에는 무단 횡단 같은 걸 하지 않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무단 횡단을 하다가……. 눈을 떴을 땐 이 몸이었어요…….”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어진 성녀의 말에서 레이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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