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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13화 (113/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3화

“무언가에 홀린 듯 무단 횡단을 했다고? 설마 그거……”

이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 고의적으로 죽인 건 아니겠지. 말을 이으려던 레이나가 입을 닫았다.

일부러 이런 애로 고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녀는 또래에 비하면 퍽 순수하고 사람을 잘 믿는 편이었다.

물론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자면 조금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사람한테 괜한 의문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말해 봤자 땅굴을 파고 들어가 끝도 없는 한탄만 할 것이 분명했기에.

게다가 어차피 진짜든 아니든 어차피 로판 트럭에 치여서 이곳에 와 버린 뒤였다.

이쪽 세계로 데려온 신을 잡아다 족치는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속만 끓일 사안이었다.

“좋아, 알겠어. 너한테 제일 필요한 게 뭔지 알겠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데요……?”

“미래 설계. 정확히 말하자면, 노후 계획? 마왕을 때려잡는 거 말고, 소소하고 작은 다른 목표들.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말이야.”

“노, 노후요……? 저 이제 스무 살인데요……?”

노후를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였다. 이제 갓 어른을 체험하는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레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스물이었다. 전생도 현생도 만으로 열여덟.

“응? 뭐야, 진짜 나이가 스물인 거야, 그 몸의 나이가 스물인 거야?”

“진짜 나이요. ……대학교에 입학한 지 반년 만에 죽었어요.”

자신처럼 성녀도 퍽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희소식이 있었다. 레이나는 과거를 떠올려 다시 우울 모드에 들어간 성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럼 우리 동갑이네? 나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죽었거든! 어떻게 이런 우연이? 말 놔!”

“정말이요?”

다행히 성녀가 반색했다. 또래 친구라고는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선 동갑인 레이나의 존재가 반가울 뿐이었다.

“응. 난 몸이 아파서 대학교에는 못 갔지만, 동갑이야. 그러니까 진짜 말 놔.”

“으, 으응!”

어색하게 대답한 성녀가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와 말을 트게 된 이 상황이 기쁜 한편, 그런 것에 좋아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야? 난 레이나라고 부르면 되는데. 널 계속 성녀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잖아?”

직책만 부르는 것은 뭔가 좀 어색했다. 성녀 역시 그리 생각했던 모양인지, 그녀가 수줍어하며 제 이름을 말했다.

“어, 응! 내 이름은 김세라야. ……세라라고 불러 주면 돼.”

“이 세계랑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좋아, 앞으로 세라라고 부를게.”

“응……!”

“자, 그럼 이제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나? 우리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거지?”

레이나의 물음에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목표가 사라져서 당황스러웠지만 레이나의 말이 맞았다.

마왕을 해치운 다음의 삶도 있으니, 그것에만 집착할 순 없었다. 게다가 레이나는 악행을 저지를 생각이 없다니, 해치울 마왕도 더는 없었다.

물론 종종 모습을 드러내 마물을 소환하는 남자가 조금 의문이었지만, 그것도 어쩌면 레이나가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물으려는데, 남은 차를 전부 비운 레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성인식 파티는 이제 시작이거든. 다 못한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파자마 파티라도 하면서 털어놓자.”

그러고는 함께 가자는 듯 성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조금 아쉬워하던 그녀가 멀뚱멀뚱 레이나의 손을 보았다.

“같이 가야지. 세라, 너도 올해 성인이 된 거잖아.”

“나, 나도……?”

그래도 되는 건가. 성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곱게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익숙한 시선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왜 왔냐며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청객을 보는 듯한 눈빛들이었다.

때문에 성녀가 망설이고 있자,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레이나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 일으켜 세웠다.

“당연하지. 내가 친구들 소개해 줄게. 사실 원래 네가 먼저 만났어야 할 애들이기는 해.”

아쉽게도 가족들에게 혼이 나고 있을 케일란은 자리에 없었지만 아덴이 있었다. 공략 대상은 아니나 노엘과 로스틴도 함께였다.

‘음, 아니, 잠깐. 로스틴은 소개하지 말까?’

미궁도 사라진 마당에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노엘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노엘은 성녀와 친하게 지내도 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로스틴만 빼고.

‘로스틴과는 통성명만 시키자. 이유는…… 그냥.’

그냥보다 더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레이나가 성녀를 끌고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싫진 않은지 끌려오는 성녀의 몸이 그리 무겁진 않았다.

“응? 먼저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조용해.”

연회장은 침묵 그 자체였다. 레이나의 당부가 있긴 했지만, 그녀가 성녀와 사라진 마당에 축제를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전에 축제에서 성녀가 레이나를 모함했던 것을 똑똑히 본 자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성녀가 또 해코지를 한 건 아닐까.

사람들이 손을 붙든 레이나와 성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레이나가 성녀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다들! 정식으로 인사하자. 익히 잘 알겠지만 이쪽은 성녀님이야. 이름을 세라래. 인사해, 세라.”

“아,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펼쳐진 자기소개 시간에 성녀가 저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음, 역시 같은 유교 국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틀림없어.’

레이나가 감탄하는 사이, 탐색하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뒤늦게 허둥지둥 마주 인사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미간을 찌푸린 로스틴이 한걸음에 레이나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노엘이 그 뒤를 따랐다.

성녀와 레이나의 사이가 몹시도 좋지 않다는 걸 제일 잘 아는 로스틴은 돌아가는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제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은 성녀가 몸을 움츠렸다. 그에 레이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사소한 오해가 있었는데, 대화로 잘 풀었어. 알고 보니까 우린 꽤 공통점이 많더라고.”

사소한 오해라니, 그게 정말 사소했나? 만인의 앞에서 모함을 당하고, 마왕이라 불리었는데?

공통점도 전혀 없어 보였기에 로스틴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레이나가 웃으며 성녀의 팔짱을 꼈다.

“그치?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다들 경계 풀고 친하게 지내자고.”

친구라는 말에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나를 보았다.

“아니야? 우리 나이도 같고, 말도 놨잖아. 그럼 친구 아닌가?”

혹시 혼자 급발진했나 싶어서 레이나가 멋쩍어하니 성녀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맞아. 치, 친구……! 친구야! 친구 맞아!”

친구라니……. 자신을 ‘친구’라고 직접 언급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성녀가 뺨을 붉혔다.

사실 게임을 산 것도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요즘 유행하는 게임을 해 보고 그걸 계기로 다른 동기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이 세상에 오게 된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자신은 언제부터 그 목적을 잊고 살았던 걸까.

생각지도 못하게 이루어진 꿈에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레이나가 제게 필요하다고 말한 미래 설계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애써 눈물을 삼킨 성녀는 큰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오늘부로 친구가 된 레이나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소개까지 해 주었는데, 늘 그랬던 대로 소심하게 말만 더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눈에 힘을 준 성녀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고 오해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던 것 같아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어요……! 앞으로 여러분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미안했어, 레이나.”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던 탓에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답답한 애라고 했던 거, 취소.

필요할 땐 용기 내서 자기 의견도 잘 말하고, 사과도 하는 꽤 괜찮은 애 같았다.

거의 황제와 맞먹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는 그녀가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하자, 지켜보던 이들이 눈을 끔뻑였다.

“지금 우리한테 성녀님이 사과하신 거지?”

“아니, 공녀님께 하신 것 같은데, 우리한테 하신 것 같기도 하고…….”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매를 가늘게 뜨고 있던 로스틴이 픽 웃음을 흘렸다.

또 레이나가 알아서 잘 해결한 모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알겠다는 듯 로스틴이 성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저택의 식구들 역시 방긋 웃으며 성녀에게 예를 차렸다.

뭐야? 성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영문을 모르는 노엘만이 그 사이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시울을 붉힌 성녀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분위기가 퍽 화기애애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여주와 친해졌기에 이제 더는 걱정할 게 없을 듯했다.

레이나가 훌쩍이기 시작하는 성녀의 등을 토닥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한껏 미간을 찌푸린 아덴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성녀와 아덴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거기에 아덴은 남주 후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친해 보일까.

‘내가 일을 망쳐 놔서 그런가?’

그럴지도. 원래 성녀의 든든한 아군이어야 할 그가 자신의 옆에서 농사나 짓는 상황이니 말이다.

친해질 틈이 없었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성녀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해가 있다면 풀어 주고.

아덴이 성녀를 마물 무리에 버리고 갔던 것을 꿈에도 모르는 레이나가 그를 향해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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