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5화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트리버는 이내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휙 그녀를 가로질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얼어 있던 성녀는 그제야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세뇌라도 하듯 계속 그리 되뇌었지만, 이미 반쯤은 트리버가 그 가짜 마왕이 맞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레이나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지?’
퍽 친근해 보이진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로스틴과 트리버 둘 다 레이나를 좋아하는 느낌이었고.
‘아니야, 트리버라는 사람은 좀 이상했어.’
단순히 긍정적인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을 꽤 잘 아는 성녀였기에 그녀의 눈에 트리버는 조금 이상하고 위험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레이나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실수할 수도 있었다.
장본인에게 물어보거나, 조금 더 관찰한 뒤에 사실이 명확해지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성녀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던 미아가 그녀에게 케이크 접시를 건넸다.
“드세요.”
“네, 네?!”
설마 자신에게 누가 말을 걸 줄은 몰랐던 성녀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한번 드셔 보세요. 제가 만든 겁니다.”
상대를 보려 고개를 드는데 하도 키가 커서 목이 다 아팠다. 얼떨결에 케이크를 받아 드니, 미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공녀님께서 좋아하시는 시폰 케이크입니다. 성인식 기념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성녀님께서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한 조각 잘라 왔습니다.”
레이나가 좋아한다는 말에 성녀는 저도 모르게 케이크를 한입 먹어 보았다.
곱게 갈아서 뿌린 초콜릿 가루와 크림, 촉촉하고 폭신한 케이크 빵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마, 맛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맛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미아가 다른 케이크도 있다며 망고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가져왔다.
“그, 그렇지만 이건 레이나에게 주기 위해서 만든 거 아닌가요? 제가 또 먹어도 될까요?”
“네. 공녀님께서 드실 양은 충분해요. 물론 지금은 드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시긴 하지만요.”
그에 성녀의 시선이 연회장 가운데서 춤을 추는 레이나와 로스틴에게 향했다.
황성에서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어머, 진짜네요…….”
지켜보던 성녀는 괜히 자신이 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케이크를 연달아 입에 넣자, 그렇게 먹으면 목이 막힐 거라며 미아가 음료를 건넸다.
축배를 들 때 마셨던 모킹주였다. 입에 남은 짙은 단맛을 모킹주가 조금 덜어 주었다.
“가, 감사해요.”
“아닙니다. 공녀님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잘 모셔야죠.”
분명 지난번의 추태를 모두 보았을 텐데,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이었다니, 진즉 대화를 하고 잘 풀걸. 아니, 추태를 부리기 전에 제대로 말을 해 볼걸.
후회가 되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다들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받아 주었고.
이제 남은 것은 트리버의 정체를 밝히고 대신관과 대화를 나누어 레이나의 오명을 벗기는 일뿐이었다.
‘꼭 잘해야지!’
결심한 성녀가 케이크를 크게 잘라 와앙 입에 넣고 모킹주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여전히 둘만의 세계에 빠져 춤을 추는 레이나와 로스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그래도 한 번 춰 봤다고 조금 익숙해진 춤에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에 로스틴이 왜 그러냐며 눈으로 물었다.
“아니, 그쪽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아서.”
빈말이 아니라 정말 로스틴은 지난번보다 꽤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그의 리드 덕분에 레이나는 얼떨결에 그럭저럭 봐줄 만한 춤을 구사할 수 있었다.
“티가 난다니 다행이군. 조금 연습했지.”
“연습했다고? 이렇게나 바쁜 와중에? 왜?”
성인식을 준비하고, 마왕을 쫓고, 마물을 해치우고, 중간중간 곡창 지대까지 확인하면서?
심지어 원래 하던 업무도 있을 것이다. 공작이니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일 테니 말이다.
“지난번엔 못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난 아직도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혹시 자신도 연습을 해야 했던 것일까. 레이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에 로스틴이 아니라며 말을 이었다.
“공녀는 괜찮아. 내가 공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연습했을 뿐이니까.”
아니, 저기요. 그런 말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왜 자꾸 오해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아니, 사실 이제는 오해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이렇게나 대놓고 호감을 표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대서특필 고소감이었다.
레이나가 큰마음을 먹고 대답했다.
“나도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
설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로스틴이 흠칫 놀라며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레이나가 계속 춤을 이어 갔기에 그 역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공녀가 그런 대답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딱히 무언가를 바라고 잘해 주고 챙겨 준 게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했을 뿐이었기에, 그녀가 긍정적인 대답을 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로스틴은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였다.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에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싫어? 혹시 내가 뭐 착각한 거야?”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이건…….”
혹여나 레이나가 오해라도 할까 봐 로스틴이 재빨리 답했다. 싫기는커녕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다시 말문이 막혔다. 기대도 못 했던 상황이 들이닥쳐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어려웠다.
그의 당혹스러운 얼굴에 레이나가 킥킥 웃었다. 어떤 마음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도 로스틴의 돌직구에 몇 번이나 당황하곤 했으니까.
반대로 그가 당하는 모습(?)을 보니 꽤 재미있었다. 앞으로 종종 로스틴에게 돌직구를 날려야겠다고 생각한 레이나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음엔 같이 연습할까?”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 위로 로스틴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울렸다.
표정이 적어서 그런가. 겉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데, 속은 이렇게나 빨리 뛰다니.
앞으로 자주 손을 대 봐야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하고 있자, 로스틴이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 맞잡으며 답했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
성녀가 홀로 심연의 저택으로 갔다는 말에 대신관은 다급히 그녀를 뒤쫓았다.
별일이 없을 줄 알고 홀로 황성에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그곳에 공녀와 로스틴이 참석했다는 것도 신전에 찾아온 남부 공작 덕에 알게 되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겼을까 싶어 자세한 사정을 묻자, 남부 공작은 성녀가 레이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전했다.
“해코지하진 않았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성녀님께선 착하신 분이니 욕을 들었음에도 감싸 주고 계시는 걸지도요.”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간 거지?’
심연의 저택에 도착한 대신관은 서둘러 성녀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북부 공작도 함께 참석했다고 하니 공작 성에 갔을지도 모르겠어.”
대신관의 예상은 적중했다. 성인식 파티를 한다며 잔뜩 꾸며 놓은 공작 성 연회장에서 퍽 기분 좋은 얼굴로 파티를 즐기는 성녀를 찾을 수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대신관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 사이에서 성녀만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맞이했다.
“어……! 대신관님!”
훌쩍 달려와 자신의 앞에 선 성녀에 대신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차가운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성녀에게 물었다.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의 추궁에 성녀가 잔뜩 긴장하며 답했다.
“그게, 그러니까……. 어, 어쩌다 보니 참석하게 되었어요. 레이나가 한 말을 제대로 확인하려고 온 건데.”
“……성녀님, ‘레이나’라니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마치 친구처럼 공녀를 대하는 모습에 대신관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괜한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 성녀가 서둘러 변명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그, 그러니까 오해가 있었어요……! 그 오해라는 걸 레이나가 먼저 말해 줘서, 다시 확인하러 제가 방문했고, 다행히 잘 풀려서 친구가 되었고, 마침 성인식을 한다고 해서, 저도 올해 성인이 되었으니까 참석해 달라고 해서, 그래서……!”
횡설수설한 설명에 대신관의 표정에 불쾌감이 드리웠다.
“무슨 일이야? 여긴 초대받은 사람만 올 수 있는 곳인데, 불청객이 왔네?”
설상가상으로 레이나까지 다가와 성녀와 대신관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제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성인식까지 치르고 계시면서, 공녀께선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시나 봅니다.”
“네가 뭐라고. 내가 그쪽 권한이 뭔지 굳이 알아야 해?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아서 안타깝게도 앞으로도 기억할 일은 없을 거야.”
“자, 잠깐만!”
싸움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성녀가 서둘러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어 이 이상의 대화를 막았다.
“돌아가서 제대로 설명할게요! 정말이에요……!”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 수습할게.
레이나를 돌아보는 성녀의 표정이 그리 말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그녀를 위해 자신이 어떻게든 잘 풀겠다고.
그에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고, 대신관이 성녀의 팔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대신관과 성녀가 연회장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