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8화
“이게 뭐야? 설마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반지 같은 건 아니겠지?”
정답이었던 모양인지, 펠릭스가 대답 없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이런 귀한 걸 왜 자신에게 준다는 말인지.
눈을 끔뻑이며 반지를 확인하던 레이나가 그것을 다시 펠릭스에게 돌려주었다. 아니, 돌려주려고 했는데 아이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돌려주시지 않아도 돼요. 이건 제가 아니라 공녀님께서 가지시는 게 맞아요. 저는…… 이걸 가질 자격이 없어요.”
“……나는 자격이 있는 거야?”
대체 뭐길래 한낱 반지를 갖는 데 그런 자격이 존재한다는 말인지.
의아하기 그지없다는 뜻으로 물은 것이건만, 펠릭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다시 반지를 받지 않겠다는 다짐이 보여,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레이나가 알겠다며 검지에 반지를 꼈다.
소중해 보이는 물건이었기에 혹여나 빠지진 않을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다행히 레이나의 검지에 딱 맞는 크기였다. 쉽게 빠질 것 같지 않았다.
“좋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갖고 있을게. 그렇지만 잠시 맡아 주는 거니까 나중에 필요해지면 언제든 찾아가. 알겠지?”
꼭이야. 약속하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레이나의 손을 보며 조금 망설이던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제 손가락을 걸었다.
이게 맞나? 싶은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에 레이나가 방긋 웃으니, 그제야 잔뜩 굳어 있던 펠릭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손히 예를 차린 펠릭스가 공작저 정문으로 열심히 뛰어갔다.
혹여나 가출했다가 돌아왔다고 혼이라도 날까 봐 레이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펠릭스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들이 펠릭스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제 외투를 벗어 펠릭스의 어깨에 걸쳐 주기도 했다.
“응……? 가출했다가 돌아온 하인을 맞이하는 것치고는 너무 잘해 주는데?”
아니,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면 펠릭스는 의도적으로 가출한 게 아니라,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나려던 공작이 두고 간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죽은 줄 알았는데, 겨우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잘해 주는 건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펠릭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경비병들이 아이를 퍽 조심스레 다루는 것 같기도 했고.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혼내면 어쩌나 했는데.’
아니라니 안심이었다. 주인은 못됐지만 식솔들까지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기에, 마음을 놓은 레이나가 다시 심연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
한참이나 소식이 없던 장남의 귀가에 루벨라이트 공작저는 한바탕 태풍이 몰아쳤다.
아들을 잃은 충격에 시름시름 앓던 공작 부인은 돌아온 제 아들을 붙잡고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꺼이꺼이 울었고, 공작은 수색에 나선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며 짜증을 냈다.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게야!”
불같이 화를 내던 공작이 제 팔을 부여잡았다. 지난번에 황태자의 검에 베여 떨어져 나갔던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겨우 붙여 놓기만 한 상태이니 아마 평생을 가도 낫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죽지만 않는다면 모두 치료할 수 있다는 성녀의 가호를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대체 왜 성녀는 오질 않는 거야!’
이를 간 공작이 벽에 주먹을 내질렀다. 황태자에게 수모를 당한 그날. 곧장 신전에 성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성녀가 바빠 그럴 수 없다는 답신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직접 찾아가겠다고 전했으나, 마물 때문에 성녀는 거의 신전에 없어서 만날 수 없다는 답신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신전으로 쳐들어가기에는 정말 마왕 놈 때문에 제국 전역에 마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동부 역시 갑자기 마물 떼가 나타나 한동안 수습하기 바빴다.
함부로 밖을 돌아다니다 마물과 마주칠 가능성이 컸기에 공작은 사병을 최대한 끌어모아 저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에 레이나가 헛짓거리를 하여 딱 한 번 경계 지역까지 외출하기는 했으나, 그 이후로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발 저택에 방문해 달라고 신전에 수차례나 연락만 넣은 채.
그런 상황이었거늘, 갑작스레 펠릭스가 사라졌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였기에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다.
그래서 서둘러 사람을 풀어 펠릭스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니, 빈번하게 나타나는 마물 떼 때문에 아이를 찾을 사람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 뭐? 지금 뭐라고?
“그날, 아버지께서 곡창 지대에 가셨던 날, 몰래 따라갔다가 길을 잃었어요…….”
철썩! 공작의 커다란 손이 펠릭스의 뺨을 내리쳤다. 머저리 같은 행동을 했다는 말에 도저히 참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펠릭스?!”
공작 부인이 바닥에 쓰러진 펠릭스를 서둘러 껴안았다. 그러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제 남편을 흰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리 반은 비루한 핏줄이라고 해도 머저리 같은 짓에 정도가 있지!”
공작은 그런 그녀와 펠릭스를 번갈아 보며 호통쳤다.
꽤 예뻤던 얼굴에 반해 재혼한 것인데, 시간이 지나니 더는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소심한 자식 놈 때문에 둘 다 꼴도 보기 싫었다.
첫째라고 말하기도 싫은 장녀는 마왕의 운명을 타고났고, 둘째인 장남은 소심하고 머저리 같은 행동만 하는 놈이라니.
어찌 이렇게나 자식 복이 없을까. 공작이 한탄하고 있자, 새빨갛게 부어오른 아들의 뺨을 확인한 공작 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비루한 핏줄이라니요! 제 친정 가문이 몰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귀족이었는 걸요! 게다가, 어떻게, 어떻게 이 작은 아이를 때리실 수가 있어요!”
공작 부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돈에 눈이 멀어 공작의 후처가 되었는데, 처음 몇 년을 제외하고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이 후회되었다. 왜 이런 최악의 선택을 했을까.
전 공작 부인에게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 알았을 때라도 도망을 칠걸.
아니, 돌이켜 보면 그때의 자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었다. 사실 안심하기도 했다.
전 공작 부인이 죽었으니 자신이 아들을 낳아 가문을 잇게 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몰락한 친정도 이 정도의 소란은 없었는데, 루벨라이트 공작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소란에 행패에 추궁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어딜 대들어!”
분노한 공작이 공작 부인에게까지 손을 치켜들었다. 그에 서둘러 그녀의 품을 벗어난 펠릭스가 대신하여 공작에게 얻어맞았다.
“펠릭스-?!”
공작 부인의 억장이 무너졌다. 뜻하지 않게 아이에게 두 번이나 손찌검하게 된 공작이 방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펠릭스! 펠릭스, 아가 괜찮니?!”
핏방울이 맺힌 펠릭스의 뺨을 확인한 공작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차라리 자신이 맞는 것이 나았다. 상처를 입은 펠릭스를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눈가를 펠릭스가 조심스레 닦았다. 맞은 뺨이 몹시도 아팠지만, 아이는 애써 웃으며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펠릭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 챙겨 왔는지, 약과 마른 수건, 따뜻한 물을 준비한 하인들이 지척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앞에서 말할 순 없다는 표정이었기에, 공작 부인이 하인들을 모두 물렸다.
“내가 하지. 놓고 다들 물러가.”
공작 부인의 지시에 모든 하인이 방에서 물러났다.
공작 부인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펠릭스의 뺨을 닦았다.
따뜻한 제 어미의 손길을 잠시 느끼던 펠릭스가 이내 그녀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우리 여기서 나가요. 나가서 조용한 곳에서 한적하게 살아요.”
그 갑작스러운 말에 공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페, 펠릭스. 그게 무슨 말이니?”
“저, 가문을 잇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없기도 하고, 행복할 것 같지도 않아요. ……어머니도 행복해 보이지 않으세요.”
공작 부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펠릭스가 가문을 잇기만을 바라며 공작의 추태를 견뎌 내고 있었기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나 다름없었다.
“설마 방금 전 일 때문에 그런 거니? 그렇다면 이 어미가 더는 네가 아프지 않도록 대신-”
“아니요! 저는 어머니도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를 진심으로 대우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으면 좋겠어요.”
“……!”
진심이라는 듯 펠릭스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아이는 다시금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매를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혹시 저 때문이라면 부디 참지 마세요. 어머니가 행복해야 저도 행복할 수 있거든요.”
고작해야 10살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공작 부인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동시에 그냥 다 버리고 나가자는 아이의 말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제안하지 못했던 길을 떠올리게 해 주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펠릭스는 이미 5살 때 후계자의 반지를 물려받기도 했고 말이다.
게다가 가진 재산이 전혀 없는 자신이 펠릭스를 잘 돌보고 키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일이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어서 이후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걱정 때문에 공작 부인이 쉬이 대답하지 않자, 예상이라도 한 듯 펠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와 제가 무사히 여기서 나갈 수 있게 생각해 둔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