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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19화 (119/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9화

“제가 아픈 척을 할게요! 아니, 혹시 모르니까 조금 구르고 넘어져서 정말 아파질 테니, 요양 핑계를 대고 북부로 떠나요! 실은 저, 그간 북부에서 음료수를 팔아서 큰돈을 벌었거든요.”

그와 함께 펠릭스는 공작의 마차를 놓쳐 레이나를 만난 것과, 정체를 숨기고 그간 그녀의 저택에서 머물며 곡창 지대에서 음료수를 팔았던 것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제가 어머니를 책임질게요. 저, 돈 많이 벌 자신 있어요. 북부로 가면 누이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어때요, 좋은 생각이죠?”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공작 부인의 가슴이 미어졌다.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펠릭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벼, 별론가요……? 저, 정말 잘할 수 있는데…….”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런 제 아들을 공작 부인이 서둘러 품에 안았다. 어쩌다가 이 작은 아이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결국 스스로를 희생하여 저택을 빠져나가 허드렛일을 해서라도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펠릭스의 말에 공작 부인은 그동안 내리지 못했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아주 좋은 방법이기는 한데, 그저, 그저…… 내게도 좋은 생각이 있어서, 일단 그것부터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어머니도 좋은 생각이 있으셨어요?”

펠릭스가 반색했다. 좋은 생각이 두 개나 있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에 공작 부인이 애써 웃음을 지었다. 기뻐하는 제 아들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내 계획이 실패하면 네 계획으로 넘어가자꾸나. 그렇게 하면 아주 든든하겠지?”

“네! 좋아요!”

결심한 공작 부인은 곧장 공작을 찾아갔다.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그는 제 부인이 펠릭스의 경거망동을 대신 사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나 작은 아이를 때릴 수가 있죠?!”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공작 부인은 공작에게 죄를 물었다. 늘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태도와는 달리 갑자기 심기를 거스르는 공작 부인에 공작이 크게 분노했다.

“잘못을 했으니 맞아야지!”

“잘못이라니요! 사정도 자세히 들어 보지 않고 잘못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요!”

이게 진짜. 그가 본격적으로 화를 낼 기세이자, 공작 부인은 위협을 피해 뒷걸음질 쳐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녀를 따라붙은 공작이 크게 호통쳤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수많은 하인이 놀라 서둘러 벽으로 붙었다.

“몰래 따라왔으니 더 들어 볼 이야기도 없어!”

“당신이 매번 수상한 짓만 하니까 몰래 따라간 건 아니고요?”

되묻는 공작 부인의 얼굴에 비아냥이 서려 있었다.

감히 하늘 같은 남편을 의심하는 무지한 부인에 더는 참지 못한 공작이 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

찰싹!

“꺄악!”

쿠당탕탕! 그와 동시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공작 부인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공작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라 뒤에 계단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마, 마님!”

“세상에! 누가 의사를!”

놀란 하인들이 서둘러 공작 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서 방으로 옮겨!”

“들것을 가져와!”

하인들이 우왕좌왕하며 공작 부인을 침실로 옮겼다. 잠시 뒤, 도착한 의사가 공작 부인을 서둘러 진찰했다.

전신에 멍이 들고 팔목과 발목이 골절되긴 하였지만,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 모두가 안심했다.

다행히 의사가 지어 준 약을 먹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 부인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펠릭스를 찾았다. 아이는 공작 부인이 침실에 실려 왔을 때부터 침대 옆에서 울고 있었기에 곧장 제 어미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

“펠릭스! 내 아가!”

모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펠릭스를 안은 팔이 몹시도 아팠지만, 그런 사소한 것보다 당장 제 아이를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모자가 슬픔에 겨워 눈물을 짜내는 사이,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상태를 확인하러 온 공작이 퍽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흠, 내 팔에 비하면 별것 아니군. 그러게 왜 계단 앞에서 대들고 그래?”

당장 죽다 살아난 부인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자기가 때려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이거늘.

주군이기에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불만을 가진 하인들이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공작 부인께선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가시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공작이 아무리 몹쓸 언행을 펼쳐도 그녀는 늘 입도 벙끗하지 않고 가만히 참아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요!”

“아직도 입만 살았군. 몸이 아니라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아직도 자신에게 따져 드는 공작 부인에게 공작이 비아냥댔다. 그러자 그녀는 품에 안은 펠릭스를 더더욱 꼭 끌어안고 공작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며 말했다.

“더는 여기서 지낼 수 없어요. 당신이 너무 무서워요!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요양을 떠나야겠어요. 당장요.”

“흥, 마음대로 하라지.”

오히려 눈엣가시였는데 잘되었다며 공작이 코웃음을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레카, 벨라, 린! 어서 짐을 싸도록 해! 마차도 준비해 줘! 짐은 최소한으로 준비하고!”

공작 부인의 직속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짐을 쌌다.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펠릭스의 짐도 함께였다.

그녀들이 짐을 꾸리고 마차에 싣는 사이, 아픈 몸을 이끈 공작 부인은 귀한 보석들을 개인 가방에 담았다.

크기가 큰 것은 물론이고, 섬세한 세공까지 되어 있어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값비싼 것들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이것들을 정리해서 돈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 무겁지는 않았지만 가방을 들기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공작 부인이 퍽 미안한 얼굴로 가방을 펠릭스에게 맡겼다.

“마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그럼 당장 가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떠나겠다는 공작 부인의 말에 의아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공작은 그동안 기이한 행보를 보여 왔다. 오늘 공작 부인과 펠릭스에게 손찌검한 것뿐만 아니라, 그전부터 그는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수도. 수도에 있는 내 별장으로 가자.”

수도라면 그리 멀지 않았다. 이틀을 꼬박 달린다면 도착할 거리였다.

하녀들과 호위 기사까지 태운 공작 부인의 커다란 마차가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공작저를 떠났다.

공작은 펠릭스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저택을 떠나는 마차를 집무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제까짓 게 요양을 떠나 봤자지. 그러게 멍청한 계집 주제에 왜 대들어?”

가진 것도 없는 여자 주제에. 친정도 없고, 친척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흔적뿐이었던 귀족의 핏줄과 반반한 얼굴밖에 없으면서.

요양인지 나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머리를 식히고 판단력이 돌아온다면 다시 입을 닫고 저택으로 기어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때 아주 톡톡히 교육할 생각이었다. 하늘 같은 남편에게 대들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윽……!”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팔이 다시 아파 왔다. 잘라 내지 않는 이상 평생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만들어 주겠다는 듯, 고통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당장, 당장 신전에 연락을 넣어! 성녀가 오겠다고 할 때까지 계속 넣어! 어서!”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호통치는 공작에 하인들이 헐레벌떡 흩어졌다.

일을 돕는 척하며 공작 부인을 따라갈걸.

하인들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마차는 떠난 뒤였다. 부리나케 움직이는 하인들의 등 뒤로 공작의 호통이 계속 이어졌다.

*

“저…… 대신관님. 루벨라이트 공작님께서 또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다친 팔의 치료를 위해 성녀님을 보내 달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보고도 하지 않고 적당히 쳐 냈겠지만, 상대는 동부의 공작이었다. 아무리 대신관이 매번 그의 연락을 거절한다고 해도 보고는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늘 그랬듯 바쁘다는 답신을 보내라는 대답을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기분이 퍽 좋아 보이는 대신관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방문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십시오.”

“예?!”

지금까지 수차례나 무시해 왔으면서, 갑자기?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대신관이 가겠다고 하는데 되물을 순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공손히 예를 차린 신관이 방을 나서자, 대신관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딱히 좋아하는 자는 아니지만, 최대한 많은 힘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선 성녀의 성장은 물론이고 사병들의 힘도 필요했다. 팔을 고쳐 주며 생색을 낼 필요가 있었다.

꽤 그럴듯한 계획에 대신관의 심기가 편안해졌다. 더불어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 괴로워했던 성녀를 떠올리자 더더욱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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