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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22화 (122/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2화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당연히 우물쭈물하며 눈물이나 짜내거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무작정 반박할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서 멀쩡한 대답이 튀어나오자 외려 케일란이 당황했다.

그러나 성녀는 더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야! 거기 서 봐!”

케일란이 서둘러 성녀의 뒤를 따라붙었다.

“야! 야, 거기 서라고! 뭐냐니까!”

성녀는 더 이상 케일란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신체적 차이 때문인지 곧 그에게 따라잡히고야 말았다.

“뭐가요?”

더는 피할 수 없음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렇게 순순히 잡힐 줄 몰랐기에 이번에도 조금 당황한 케일란이 ‘아니…….’라며 운을 뗐다.

“방금 한 말 뭐냐고. 아니라고 했잖아.”

“그저 물음에 대답했을 뿐이에요.”

내가 뭐라고 물었었지. 금세 까먹었던 케일란이 다시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야, 너는 그냥 주변에서 잘한다면서 추켜세워 주니까 마냥 행복하고 재미있지? 대신관의 말이라면 전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어, 뭐야. 그럼 우리 이제 같은 편이라는 거야?”

케일란이 반색했다. 아니라고 대답했으니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나 단순할까? 성녀 역시 그리 복잡하진 않은 사람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무례하게 마구 쏘아붙여 놓고 이제는 같은 편이라고 반가워하다니.

변화무쌍한 태도가 실로 놀라웠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괜히 피곤해졌다.

차라리 응접실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그녀의 옆에 케일란이 찰싹 달라붙었다.

“너,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었구나? 하긴,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면 대신관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겠지. 넌 좀 오래 걸린 편이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말이 뒤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자화자찬까지 겸하다니, 실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근데 너 대신관이랑 꽤 친하지 않았어? 무슨 계기로 걔랑 멀어진 거야? 둘이 좋은 관계 아니었어?”

말이 좋은 관계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었냐는 물음에 가까웠다.

신성한 빛이라도 쏴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성녀 역시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상형의 껍데기를 쓰고 있던 대신관에게 첫눈에 반해 착각했던 적이 말이다.

돌이켜 보면 대신관은 늘 말만 다정했다. 친절하고 배려하는 말투로 매번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었다.

물론 성녀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기에 죽는 일은 없었지만, 아덴이 그녀를 마물 속에 홀로 떨어뜨리고 왔을 때도 위로나 걱정의 한마디조차 없었다.

‘내 안위 따윈 관심 없어서였겠지…….’

그의 관심사는 늘 신탁과 마왕을 해치우는 것뿐이었다.

성녀는 뒤늦게 서러워졌다. 대신관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어서,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한 것인데, 그는 마왕을 해치우는 것에만 치중하여 자신을 이용해 먹기 바빴기 때문이다.

상황을 제대로 직면하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있자, 옆에서 깐족대던 케일란이 심히 당황했다.

“야, 야! 왜, 왜 울어! 내가 뭘 어, 어쨌다고!”

“흐흑, 흑…….”

위로를 해 줘도 부족한데, 발뺌까지 하니 성녀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대화를 끝낸 사람들이 응접실에서 나오다가 그 상황을 목격했다.

“어머나, 성녀님?!”

화들짝 놀란 모어 백작 부인이 서둘러 성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시죠?!”

불행히도 누군가의 위로가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성녀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사이, 옆에서 쩔쩔매고 있는 케일란을 발견한 백작가의 장남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상황을 유추했다.

“케일란, 설마 네놈 짓이냐?”

정확한 원인은 대신관에게 있었지만, 케일란이 깐족대며 괜히 감정을 부추긴 것은 사실이었다.

“아, 아니야! 나 아니야! 난 그냥……. 그냥 요즘 좀 이상해 보인다고 물어봤을 뿐이야!”

내용이 어떻든 대화가 오가긴 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장남은 제 동생이 멀쩡한 화법으로 성녀를 상대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이 자식!”

때문에 곧장 폭력이 날아들었고, 옆에서 대화를 듣던 백작 부인까지 이에 합세했다.

“이놈의 자식! 내가 너 때문에 아주 창피해서 못 살아! 대체 누가 널 이렇게 키운 거니?!”

“아, 아니야! 아니라고오!”

연달아 이어지는 등짝 스매싱에 케일란이 거세게 저항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고, 위로도 건네지 않는 대신관에 더욱 슬퍼진 성녀는 한참이나 눈물을 짜내야만 했다.

*

성인식 다음 날, 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로스틴은 우연히도 루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미꽃?’

어째서인지 입에는 장미꽃 한 송이를 물고 있었다. 제 몸보다 훨씬 큰 장미 한 송이를 입에 문 루카는 하얀 몸뚱이를 열심히 움직여 성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에 로스틴은 저도 모르게 루카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간 동생의 뒤를 따르자, 심연의 저택이 나타났다.

길의 방향과 꽃 때문에 진즉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레이나에게 선물을 주려 작은 몸으로 한참이나 걸은 제 동생이 귀엽기 그지없어 웃음이 나왔다.

거리낌 없이 저택 정문을 통과한 루카는 앞마당을 가로질러 레이나의 창문까지 통통 튀어 올랐다.

꽃을 물고 있는데, 어떻게 저리 몸이 가벼운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윽고 최종 목적지에 다다른 루카가 동그란 몸으로 레이나의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뒤, 창문이 열리고 막 잠에서 깬 듯한 졸린 얼굴의 레이나가 나타났다.

“삐이? 세상에, 이 꽃은 뭐야?”

루카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루카는 말없이 레이나에게 꽃을 건넸다.

“설마 나 주는 거야? 축하 선물 같은 거야?”

대충 짐작해서 묻자, 루카가 새카만 눈을 연달아 깜빡였다.

“세상에, 귀엽기도 하지. 물고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쩜 이렇게 착하니?”

레이나가 손을 내밀자, 루카가 냉큼 올라탔다. 녹지 않는 따뜻한 불꽃을 둘러 주니, 기분이 좋아진 루카가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울까. 형 닮았나?”

키득키득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 말에 로스틴이 잠시 눈을 끔뻑였다.

알고 저러는 것인지, 모르고 저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쪽이 되었든 확실한 것은 놀란 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레이나가 창문을 닫다가 로스틴을 발견했다.

“로스틴?”

여긴 어쩐 일로. 그리고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왜 정문 근처에서 멀뚱멀뚱 서성이고 있는 것인지.

‘아, 설마…….’

레이나의 시선이 잠시 루카에게 향했다. 몹시도 그럴듯한 추측이 떠오르는 상황이었으나,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괜한 말은 꺼내지 않고 방긋 웃었다.

“추운데 거기서 뭐 해? 들어와! 같이 아침 먹자.”

아침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고, 점심도 지난 참이거늘. 지금 일어났으니 아침이라는 말에 로스틴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초대해 줘서 고맙군. 그렇게 하지.”

아침도, 점심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둘만 식사를 하는 건 아닐까 조금 기대했거늘.

어째서인지 아직도 서부로 돌아가지 않은 노엘이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막 일어난 모양인지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녀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어젯밤에 너무 늦게까지 놀았나 봐. 요즘 광산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고.”

노엘만 없었다면 둘만의 식사가 되었을 텐데.

물론 식탁 구석에서 루카가 케이크를 먹고 있었지만, 딱히 방해가 되는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그는 예외였다.

설상가상으로 트리버까지 식당에 나타났다. 어쩔 수 없지. 레이나는 인기가 많으니까.

상황과 타협하면서도 로스틴은 괜히 노엘에게 시비를 걸었다.

“식사를 끝내면 돌아가는 겁니까? 할 일이 많을 텐데.”

“아니요, 곡창 지대를 구경하고 돌아가려고요. 마물과 눈밖에 없던 북부에 나타난 훌륭한 관광지를 놓칠 순 없으니까요. 배워야죠. 내일쯤 돌아갈까 합니다.”

쫓아내려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노엘이 괜히 하루 더 자고 가겠다며 오기를 부렸다.

로스틴이 레이나와 퍽 긴밀한 사이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를 갈라 놓는 것을 용서할 순 없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오랜만에 함께 곡창 지대를 방문해야겠습니다.”

“윈터스노우 공작께서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요?”

“오전 중에 전부 처리했습니다.”

오랜만에 곡창 지대에 가는 것도 아니었고, 할 일도 태산같이 쌓여 있었지만, 로스틴도 오기를 부렸다.

“삐이!”

“응? 삐이도 갈래? 그래, 좋아. 그럼 우리 식사 끝내고 다 같이 가자.”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레이나가 그럼 모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에 잠시 서로를 물끄러미 보던 로스틴과 노엘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뭐, 그렇게 하자.”

“어쩔 수 없지.”

싸울 거리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강제 휴전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대충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트리버가 식기 도구를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났다.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그의 얼굴에서 새빨간 눈만이 기묘한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뒤늦게 레이나가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지.’라는 얼굴로 물었다.

“트리버, 너도 갈래?”

“……아니.”

평소 같았다면 묻기도 전에 알아서 따라붙었을 그이거늘.

또 피곤해서 저러나. 대충 넘겨짚은 레이나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끄자, 손으로 이마를 짚은 트리버가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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