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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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지 말라며 펑펑 울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로스틴은 꽤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완벽하게 나은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는 되었다.
역시 괜히 튼튼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여주와 남주 후보들이 마물을 앞에 두고 연애하는 사이, 대신하여 묵묵히 싸우던 역할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가 죽으면 연애 전선에 지장이 가니 회복력도 좋게 만들어 둔 거겠지. 고기 방패 역할에 충실하도록.
‘생각해 보니 짜증 나는 결론이잖아? 여주가 케일란이나 아덴, 황태자와 노닥거리는 동안 고기 방패나 하는 설정이라니. 아냐, 약초가 좋았다고 치자.’
물론 가만히 내버려 두었는데 곧장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가 저택 앞마당에서 수확한 귀한 약초들을 달여서 잔뜩 먹인 덕이 클 것이다.
게다가 공작 성의 주치의도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소식을 전달받은 그녀는 공작 일가의 체질과 그들에게 잘 듣는 약을 알고 있었기에, 시급히 약을 제조하여 로스틴에게 먹였다.
더욱이 휴식이라고는 모르던 그가 반나절이나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쉬기까지 했으니, 호전되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것은 레이나였다. 평소였으면 금방 회복되었을 마력이, 어째서인지 반나절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계속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아까 트리버를 상대할 때 훅 빠졌던 마력이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티를 냈다간 저택에 모인 모두가 걱정할 게 틀림없었다.
레이나는 애써 밝은 척을 하며 물었다.
“세라는? 연락 넣었어? 왜 안 오지? 걔만 오면 다 해결될 텐데.”
“넣었습니다. 공작 성의 마법사가 신전에 연락을 넣는 것을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체이스의 대답에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런데 왜 연락도 없지?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북부의 공작인데. 연락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이렇게나 죽어 가고 있잖아.”
“음, 죄송합니다만, 각하께서 죽어 가고 계시지는 않습니다만…….”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었다. 죽음과 로스틴이라니. 죽음의 사신이라면 모를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묘사에 몇몇 사람들이 눈을 끔뻑였다.
그 사이에서 로스틴만이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큭큭 웃고 있었다.
농담이었나. 아니, 표정을 보니까 진심 같은데.
의문에 휩싸인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둘이 개그 코드가 통한다니 다행이라며 뒤늦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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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가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신전은 몹시 큰일에 휩싸인 상태였다.
“마, 마왕이다! 마왕이야!”
“마왕이 어떻게 신전에……?!”
“으, 으아아악! 사, 살려 줘!”
“내 팔이……! 팔이……!”
“다들 공격해! 물러서지 마라!”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법에 사람들이 무수히 쓰러졌다. 트리버는 도망가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공격 마법을 던졌다.
“시, 신성한 빛! 신성한 빛……!”
성녀가 열심히 주문을 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레이나의 마법을 빌려 쓰고 있는 트리버는 아주 손쉽게 성녀의 마법을 무력화시켰다.
그쯤 되자, 성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런 공포와 무력감, 절망은 처음이었다.
홀로 마물들 사이에 버려졌을 때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두려웠다.
“서, 성녀님을 지켜라-!”
“모두 이쪽으로 모여! 성녀님을 지켜야 해!”
“대신관님은?! 대신관님은 어디에 계시지?! 우선 대신관님부터 대피시켜라!”
성녀와 마찬가지로 공포에 질린 신관들이었으나, 그렇다고 도망칠 순 없었다.
때문에 제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신전과 대신관, 성녀를 지키고 어떻게든 트리버의 공격을 막아 보려고 애를 쓰던 때였다.
손을 뻗어 어둠을 흩뿌리던 트리버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이라도 하듯,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겨우 찾은 기회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관들과 성녀가 공격을 퍼부었다.
“아, 아이스 미사일!”
“대지의 힘-!”
“신성한 빛!”
그러나 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버에게 닿기도 전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공격을 모두 흡수했기 때문이다.
“……헉!”
“대, 대체……!”
설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법을 불러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 어떤 짓을 해도 마왕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릴 수 없어서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초토화된 신전을 훑은 트리버가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
“어, 어디로 간 거지?!”
신관들이 당황했다. 설마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노린 건가 싶어서 모두 흩어져 트리버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신전 그 어느 곳에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트리버가 파괴한 신전의 잔해와 사상자들뿐이었다.
“후, 후퇴한…… 건가?”
“그, 그런 걸지도…….”
그대로 조금만 더 공격했다면 신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안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서둘러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개중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자도 있었다. 성녀도 그중 하나였다.
‘왜……? 이제 마왕은 없는 거 아니었어……?’
레이나가 마왕이었잖아. 그런데 그녀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그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게 숨겨져 있는 건가 싶어서 성녀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홀로 방에 틀어박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다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서, 성녀님! 치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아아아악! 내 다리가! 다리가!”
“사…… 살려…… 줘…….”
생사의 경계에서 막 목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혼탁해져 가는 눈빛으로 성녀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이 세상에서 치유 마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럼 나는……? 나는 누가 챙겨 줘……?’
하다못해 그간 마음의 위안을 주었던 대신관은 자신에게 이상한 차를 먹인 참이었다. 신전이 위기에 빠진 지금 상황에서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성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보듬고 살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모든 것이 다 부질없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이네, 성녀네 하며 띄워 주는 것도 다 필요 없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레이나가 주인공이 되는 게 좋았을 텐데……!’
결단코 세라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거나, 성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요즘 유행하는 게임을 통해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버리고 숨기에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 너무 컸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을 꾹 참은 성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부상자들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상태 이상이 회복되어, 평안을 찾고 싶다고 생각하며.
“치유의 빛무리……!”
*
‘더 싸울 수 있었는데.’
신전의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릴 수 있었는데. 동부 산맥까지 단숨에 이동한 트리버가 불만을 토로했다.
- 아직 안 돼. 힘이 모두 바닥난 게 느껴지지 않느냐? 이 이상 힘을 썼다간 너는 물론이고, 네 숙주마저 죽을 것이 분명하다.
레이나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트리버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힘을 보여 주어 레이나를 갖는 것이었기에, 그녀에게 타격을 입히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 레이나가 마력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 아니, 들키지 않게 조금씩 힘을 빼앗아서 최대한 많이 모아라. 단번에 세상을 멸망시킬 힘을 모아서 해치워라.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으니.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지금처럼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끌어다가 쓰면 레이나도 상황을 눈치챌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레이나는 지속적으로 마력을 회복한다는 점이었다.
마력을 쓰면 쓸수록 고갈되는 보통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레이나는 한계까지 마력을 사용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힘을 회복했다.
역시 레이나는 대단했다. 알면 알수록 욕심이 나는 대단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다들 레이나의 옆에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겠지. 북부의 대공 역시 마찬가지겠고.
사고의 흐름이 로스틴에까지 다다르자, 트리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힘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로스틴만큼은 당장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