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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27화 (127/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7화

대신관의 경고대로 아까까지의 공격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듯,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마물이 신전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이 아연실색했다. 바로 직전까지 트리버와 싸우며 생사의 고비를 겨우 넘겼는데, 저렇게나 많은 마물과 또 싸워야 한다니.

말을 잃은 신관들이 넋이 나간 채 포효하는 마물들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성녀에게로 옮겼다.

성녀님이라면 어떻게든 해 줄지도 모른다. 그녀는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서, 성녀님……!”

“성녀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성녀를 불렀다. 그 뒤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도와 달라는 뜻이 명백했다.

하지만 이미 성녀도 심각하게 지쳐 있는 상태였다.

트리버의 손짓 하나만으로 무수히 죽어 나가던 사람들을 보며 충격에 빠졌던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던 제 마법에 공포심까지 생긴 뒤였다.

그러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치유 마법을 사용해야 했었다.

그녀는 성녀였으니까. 죽어 가는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래도 이제 겨우 끝났나 싶었는데, 이렇게 곧장 마물을 상대해야 한다니.

세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는 정신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물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한데 그런 그녀의 손을 대신관이 붙잡았다.

“성녀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움직이지 않으시면…… 이 세상이 멸망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대신관의 표정이 퍽 비장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성녀를 레벨 1,000까지 키워 신탁을 마무리 지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려면 무너져 가는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야만 했다.

“이번 일만 잘 막는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호, 혹시 신탁을 받으셨습니까?!”

확신하는 듯한 대신관의 말에 신관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다른 신관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모두 숨을 죽이고 대신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이번 일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신탁이었습니다.”

“오오오!”

“드디어…… 드디어……!”

신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누군가는 신께 기도를 올리듯 가슴 앞에서 양손을 포개 꽉 쥐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성녀만이 홀로 침묵을 지켰다.

다들 신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신은 신탁을 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마물을 해치우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트리버를 막았던 것도 모두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끔찍한 일을 홀로 해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신관들도 함께 싸우긴 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마법 한 번이면 마물 수십을 죽이는데, 신관들은 떼로 뭉쳐서 싸워야 겨우 한 마리를 죽일까 말까 하니 말이다.

그사이에 다치기라도 한다면, 또 그녀가 치료해 주어야 했다. 결국 쓸데없이 일이 두 배가 된다는 뜻이었다.

사실 세라의 입장에선 없느니만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결국 모든 걸 자신이 하게 될 텐데, 뭐가 저리 기쁜 걸까.

성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으나 이를 눈치챈 사람은 대신관 외엔 없었다.

그럼에도 대신관은 침묵했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지금의 성녀는 예전과는 좀 달랐기에, 괜한 말을 꺼내 기분을 더 나쁘게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성녀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만 믿겠습니다!”

“저희도 가능한 한 많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성녀를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러자 지척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케일란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야, 근데 너희들 너무 얘만 굴리는 거 아니냐? 그리고 힘을 보태긴 뭘 보태. 보탤 힘은 있어? 웃기네, 이것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다, 당연히 힘을 보탤 겁니다!”

“맞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성녀님을 도울 겁니다!”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라니, 그거 치우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라. 저런 하찮은 마물을 상대로 죽을 거면, 차라리 나서질 마. 괜히 짐만 되니까.”

“마,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두가 힘을 합치면 그렇게 약하지도 않습니다!”

“마, 맞습니다!”

“으이구, 신전에서 기도만 올리는 주제에 참도 그렇겠네.”

레이나의 말빨과 힘에 밀려서 그렇지, 케일란은 괜히 귀족 사회에서 배척된 게 아닐 만큼 타인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수준급이었다.

때문에 신관들이 크게 분노했으나, 뜻밖에도 성녀의 기분은 조금 나아진 참이었다.

자신은 속으로만 생각할 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을 케일란이 대신해 줬기 때문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어차피 자신 외엔 상대할 사람이 없다면, 눈 딱 감고 마지막으로 이용당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마물을 해치우는 것이 나았다.

표정을 달리한 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뻗어 신전으로 달려오는 마물 떼를 향해 크게 주문을 외웠다.

“신성한 빛무리-!”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빛이 마물 떼를 감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잠시 뒤, 대량의 마물을 해치운 덕분인지 내내 정체되어 있던 레벨이 단숨에 2나 올랐다.

대신관이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물을 소환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 맞나 봐……!’

이 정도 수준의 마물이라면 조금만 고생한다면 레벨 1,000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성녀님!”

“좋아, 우리도 가자고!”

“맞아! 성녀님만 고생하시게 둘 순 없지!”

성녀가 너무 손쉽게 마물 떼를 해치운 탓인지 신관들이 괜한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한 마물이라서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이 분명한데,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마어마한 마물의 기세에 꽤 강한 축에 속하는 케일란조차 긴장한 상태이거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져 케일란이 한마디 하려는데.

“야, 너희는 빠져 있는 게-”

“제가 할게요. 다들 물러나세요.”

그의 말을 끊은 성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거봐라. 너희가 무슨-”

“그쪽도요.”

오롯이 혼자 마물을 해치우겠다는 말에 모두가 당황했다.

“아니, 네가 무슨…….”

레이나도 아니면서 어떻게 마물을 혼자 상대하겠다는 거야?

케일란이 속으로 불평을 토로하자,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눈에 힘을 준 성녀가 말을 이었다.

“레이나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혼자 할 수 있어요. 혼자 해야 하고요.”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대신관이 그녀를 지지하고 나섰다.

“성녀님께서 혼자 할 수 있으시다니, 우리는 빠져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 신전 복구에 힘을 쓰시죠. 그것 역시 마물을 해치우는 것만큼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니까요.”

대신관까지 옹호하자 신관들이 반색했다.

사실 내내 그러고 싶었지만, 성녀 홀로 마물과 싸우게 하는 것이 걸려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것일 뿐이었기에.

“그, 그렇죠! 알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걸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 돕겠다고 했냐는 듯 안전한 위치를 고수하겠다는 신관들의 발언에 케일란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관들은 한시라도 빨리 일을 해야겠다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고, 이제 남은 것은 성녀와 케일란, 그리고 대신관뿐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옷깃을 단단히 여민 성녀가 짧은 작별 인사와 함께 신전을 벗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야.”

케일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성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케일란을 올려다보자, 퍽 진지한 얼굴의 그가 성녀에게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곧장 도망치거나 날 불러. 괜히 혼자 나대다가 다치지 말고. 알겠어? 난 계속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아……!”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성녀가 굳었다. 늘 믿고 있다거나 맡기겠다는 말만 들어 왔기에, 몹시도 당혹스러웠다.

몇 달이나 함께 동고동락한 사람들은 달아나기 바빴는데, 몇 번 말도 안 섞어 본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서 말문이 막혀 왔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역시 레이나의 친구구나. 좋은 사람이야.’

그 사이에 자신도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이번 일만 마무리 지으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성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무겁고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신전을 빠져나간 성녀를 물끄러미 보던 케일란이 성녀를 홀로 적지로 몰아넣은 대신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야, 너 신탁 내려왔다는 말, 거짓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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