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8화
“늘 그랬지만, 퍽 갑작스럽군요.”
대신관이 질렸다는 얼굴로 답했다.
“갑작스러운 건 너야. 어떻게 매번 때를 맞춰서 신탁이 턱턱 내려와?”
방금 전에도 그랬다. 성녀가 굳어 있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신탁이 내려왔다며 그녀의 비위를 맞춰 전장으로 내보내게 했다.
케일란은 이렇게 계속 대신관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의심스러웠다.
우연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줄곧 대신관이 원하는 방향대로 신탁이 내려오는 건지 참으로 의문이었다.
심지어 절대 틀리지 않을 거라면서, 레이나에 대한 신탁은 틀렸었다. 그녀가 마왕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며 자신을 북부로 보낸 전적이 있지 않나.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레이나는 마왕이 아니었고, 괜히 자신만 대머리가 되어 수치스럽기만 했다.
이는 신탁이 틀렸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나름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결말에 다다른 케일란이 본격적으로 대신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습군요. 천 년 전부터 신께서 때를 맞춰서 대비하라며 신탁을 내려 주셨는데, 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진 못할망정.”
그에 대신관이 혀를 차며 답하자, 케일란이 발끈했다.
“그런데 틀렸잖아! 레이나는 마왕이 아니라고!”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확신할 수 있습니까? 진짜 마왕이 누구인지는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아는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대신관이 더는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케일란이 그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물 흐르듯 몸을 튼 대신관이 케일란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지금 이럴 때입니까? 저 수많은 마물 중 일부가 성녀를 피해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죠. 설마 단련도 제대로 안 한 신관들을 방패로 쓰진 않으실 테고.”
회피하는 거냐는 물음에 케일란이 손쉽게 말려들었다. 운 좋게 대신관의 모순을 발견했지만, 그는 원래 지능적으로 뛰어난 타입이 아니었다.
반박하면 반박하는 대로 휩쓸리는 성격이었기에, 그럴 리가 있겠냐며 케일란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야! 싸울 거라고! 지킨다고 했잖아!”
“좋습니다. 그럼 잘 지키십시오. 전 바빠서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기 싸움을 했냐는 듯 대신관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아이씨, 이게 아닌데…….”
이렇게 대화를 끝내려고 한 게 아닌데.
“쟤 진짜 수상한데!”
그러나 이를 만천하에 밝힐 힘이 케일란에겐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세술 공부 좀 할걸.
괜히 짜증이 난 케일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다고 대신관을 따라가 다시 추궁할 논리와 말빨이 없는 탓에, 괜히 성질을 낸 그가 신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레이나는 퍽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만 평화로운 것이지,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자신이 손수 거둬서 키운(?) 트리버가 그 난리를 치고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미궁에서 최종 보스를 죽이고 그 잔해에서 트리버가 나타났을 때, 아이라고 봐주지 말고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뒤였다. 로스틴을 공격한 트리버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후에 신전과 남부에 마물이 소환되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이를 성녀가 홀로 해치우고 있다는 이야기 또한.
‘마물들을 소환하고 있는 게 설마 트리버는 아니겠지…….’
의심이었으나 확신에 가까웠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던 탓이다.
흑화한 그가 저택을 떠나자마자 신전과 남부에서 대량의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녀님! 신전에서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정말?!”
그래서 괜히 찔려 마물을 해치우는 걸 도와주겠다는 편지를 보낸 참이었다.
자신이 불러일으킨 재앙이라면, 괜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치우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연락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이에 슬슬 걱정이 되려던 찰나, 드디어 답신이 왔으니 이보다 더 반가울 순 없었다.
반색한 레이나가 서둘러 편지를 뜯어보았다.
[공녀님까지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는 마물입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내용이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세라에게 내용이 전달된 건지 아닌지도 모를 애매한 내용이었다.
“아니, 잠깐만.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마물이라니.”
설마 세라 홀로 힘겹게 싸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졌다. 정말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겸사겸사 오해하진 않았는지 물어도 보고.’
모처럼 사귄 고향(?) 친구인데, 이렇게 어이없이 틀어질 순 없었다.
오해한 게 아니라면, 신전 놈들이 세라를 착취하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당연히 도와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레이나가 의욕을 불태우며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근래 여러 가지 일로 조금 기운이 없던 레이나가 갑자기 활력을 띠자 저택의 식구들이 덩달아 신이 났다.
“공녀님! 외출하시게요?”
“곡창 지대에라도 가실 생각이신가요?”
한동안 곡창 지대에도 가지 않고 저택에서 시간만 보내던 그녀였다.
그런데 간만에 외출한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 곡창 지대는 아니고, 신전에 갈 거야.”
“……예?”
“신전이요……?!”
방금 오지 말라고 거절했던 그 신전을 말하는 건가.
하필이면 그런 곳에 가겠다는 말에 다시 숙연해진 사람들이었으나, 그녀가 가려 하는 이유를 알기에 굳이 토를 달진 않았다.
“……그러시군요. 그럼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으셔야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몸을 가리는 긴 옷이 좋겠죠?”
혹여나 마물과 싸우다가 다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건 일반인의 이야기였고, 레이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으나, 사람들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레이나는 안나와 미아가 챙겨 주는 옷을 군말 없이 입었다.
이윽고 머리까지 묶어 올리자, 얼핏 소년같이 보였다. 어쩐지 어색하여 레이나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흐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데?’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서 그런가, 소년미가 있는 복장도 꽤 괜찮았다.
“공녀님! 조심하셔야 해요!”
“다치시면 안 돼요!”
“알겠어.”
그렇게 걱정이 담뿍 담긴 외출 준비를 마친 레이나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떠났다.
늘 그랬듯 이동석을 사용하자 신전까지 단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전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라서 대충 근처로 목적지를 잡고 이동했는데, 하필이면 딱 마물들의 중심이었다.
“꾸엑?!”
“케케엑?!”
갑자기 나타난 레이나에, 놀란 마물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더럽고 끔찍한 무언가를 보았을 때 내보이는 반응에 가까웠다.
다른 생명체도 아니고 마물에게 그런 취급을 받으니 불쾌함이 하늘을 찔렀다.
미간을 한껏 구긴 레이나가 일대에 온 힘을 개방하며 불꽃을 퍼부었다.
“야! 불쾌한 건 나거든?! 그리고 너희들! 이상한 냄새도 나! 대체 언제 씻은 거야?!”
마음을 다잡으려 막 목욕을 하고 온 레이나로선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마물은 물론이고, 어디 숨어서 이 더러운 놈들을 소환하고 있는 놈도 같이 죽어라!”
그리하여 분노가 담긴 공격을 한참이나 마구 퍼붓다가 정신을 차리자,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는 레이나의 마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마력 회복이 더뎠는데, 너무 과하게 힘을 사용하여 남은 마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마물들은 다 쓸어 버린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저릿해진 손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저 멀리 우뚝 홀로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이 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세라?”
혹시나 하여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란 성녀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레이나?! 여긴 어떻게……!”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너 혼자 마물 때려잡고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어서 왔어. 도와주려고.”
혹여나 오해를 한 건 아닌가 싶어 레이나가 표정을 살피며 답하니, 잠시 굳어서 눈을 깜빡이던 성녀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고마워…….”
“고맙긴 뭘. 친구니까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녀는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이었다. 오해를 했다든가, 의심하는 기색일랑 일절 없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온 모양이었다. 마물을 소환한 놈도 때려잡으라며 광범위하게 마법을 퍼부었으니, 아마 마물을 소환했을 트리버도 다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남은 것은 트리버를 찾아서 족치는 일뿐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놓자, 저 멀리 신전에서 신관 하나가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서, 성녀님-!”
꽤 거리가 있었으나, 목소리가 우렁차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대, 대신관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당장 돌아오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