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0화
레이나가 주변에 설치해 놓았던 불꽃 일부를 회수했다.
그러자 곧장 한기가 느껴졌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모든 걸 얼려 파괴할 듯 불어왔던 바람도 퍽 잔잔했다.
“대체 뭐야……? 아주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품에 안긴 루카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으며 묻자,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전히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으나 눈동자만은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잔뜩 있다는 듯.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다시 마당에 불꽃을 돌려놓곤 루카를 안아 들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서. 아니, 코코아가 좋겠다. 이제 괜찮지?”
코코아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은 불로 덥힌 이불 속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진즉부터 네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투였으나, 루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오늘 낮까지만 해도 루카는 눈 뭉치의 몸이었다. 냉기 가득한 눈덩이의 몸으로 레이나의 작은 불꽃에 기대어 자다가, 그는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겨우 눈을 떴다.
‘추워…….’
늘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 추운 것 같았다. 레이나의 불꽃 덕에 몸은 따뜻했으나, 언제나 그랬듯 마음이 너무 차가웠다.
‘도대체 언제…… 저주가 풀리는 걸까.’
제 형이 열심히 마왕의 뒤를 쫓긴 했는데, 신탁에 의하면 이를 무찌르는 것은 이세계의 소녀였다.
그러니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신전의 그 여자가 마왕을 물리치고 자신을 구해 준다는 뜻이었다.
‘흐음, 별로야.’
루카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상한 여자가 자신을 구해 준다니. 차라리 늦는 한이 있더라도 제 형이나 레이나가 구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 맞아. 레이나라면 그 여자 대신에 날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레이나를 떠올린 루카의 눈이 반짝거렸다. 레이나는 엄청나게 강했다. 아마도 자신의 형만큼 강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손을 한 번 쓱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눈에 보이는 모든 마물을 해치웠다.
‘응, 맞아. 레이나가 어떻게든 해 줄 거야.’
레이나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일단 냅다 도와주는 성격이었다. 그러다가 멋모르고 친동생을 도와준 적도 있었다.
펠릭스를 떠올린 루카가 작디작은 눈덩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펠릭스와 함께 놀았던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아쉬움과 허망함만이 남았다.
‘사람의 몸이었다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방문해서 같이 놀았을 텐데…….’
같은 공작가의 영식이니 모임이나 학습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함께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루카는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작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동그란 배 끄트머리나 좀 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허망해졌다. 남들이 다 떠받들어 주는 공작 영식으로 태어나면 뭘 하나.
한낱 마물보다 못한 인생이었다. 동부에 놀러 가기는커녕, 평생 집 근처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살다가 눈 뭉치의 모습으로 죽어 녹아 없어질지도 모른다.
제 처지를 자각한 루카의 댕그란 눈에서 방울방울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늘 자신에게 온기를 채워 주는 레이나의 불꽃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마음이 온통 추웠다.
공허한 마음 때문에 한참이나 눈물을 짜내던 루카는 이내 끙차 작은 몸을 일으켰다.
사실 일으켜나 안 일으켜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야무지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루카는 늘 그랬듯 공작 성을 나섰다.
달리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공작 성을 떠나고 싶었다. 성에서의 추억은 대부분 몹시도 끔찍하고, 슬프고, 서글펐다.
부모님을 잃고 저주까지 받았다며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픈 기억이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볼 것인지.
‘난 이제 괜찮은데! 아무렇지도 않은데!’
씩씩거린 루카가 정처 없이 숲을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어느새 레이나의 저택 근처였다.
공작 성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아이스베리 마을과 언제 마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숲, 심연의 저택이 전부였기에 거의 매번 루카는 저택 근처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레이나를 만나 불꽃으로 몸을 데울 수 있게 되었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여러 사람에게 예쁨도 받고…….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눈 뭉치의 자신을 편견 없이 귀여워해 주는 사람들이 좋았다.
특히 레이나가 가장 좋았다. 레이나는 형만큼 강하고, 공정하고, 자신감 넘치고, 배려심 넘치고, 멋지고.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내 누나였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형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양녀로 들일 순 없고, 애초에 형은 결혼도 안 했고.
‘응……? 결혼?’
뜻밖의 엄청난 결론에 다다른 루카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때였다. 돌연 투명한 막이 북부를 빠르게 휘감더니, 이내 거품이 터지듯 펑 터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루카의 맨발에 차가운 눈이 닿았다.
“어……?!”
평소와는 다르게 갑자기 대낮에 사람이 된 루카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제 맨몸을 보곤 어리둥절하며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피부에 닿는 찬 기운이 평소보다 조금 덜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몸 안이 따뜻해……!’
사람이 되었을 때도 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찬기가 사라져 있었다.
저주를 받은 루카는 삐이일 때나, 사람일 때나 늘 이상한 찬 기운이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을까. 마치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저주를 받기 전의 몸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제 몸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자, 수풀 사이를 서늘한 바람이 훑으며 지나갔다.
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불어닥쳤던 바람과는 달랐다. 마치 곡창 지대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루카가 점점 차가워지는 몸에 한차례 부르르 떨곤 에취 기침했다.
이러다가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저주에 걸린 지난 5년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에 루카의 눈이 전에 없이 커졌다.
‘아, 아니야, 이건, 이건 진짜 돌아온 거야! 저주가 풀린 게 맞아……!’
대낮에 갑자기 돌아온 몸, 몸속에서 사라진 냉기, 5년간 느껴 보지 못한 서늘한 바람.
저주가 풀리고, 대신관이 건 북부의 마법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루카는 서둘러 공작 성으로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생각일랑 없었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작 성에 돌아가고야 말겠다며 루카가 맨발로 열심히 뛰었다.
얼마 뒤, 맨몸으로 성을 가로지르는 루카의 모습에 경비병들과 하인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작은 도련님!”
“루, 루카 님! 옷도 입지 않으시고! 감기 드시면 어쩌시려고요!”
감기? 걸릴 수만 있다면 한번 걸려 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꾹 삼킨 루카가 기사에게 다급히 물었다.
“형은?!”
“공작 각하 말씀이십니까? 멀리 외출하셨습니다. 아직은 신전과 남부 주변에만 마물이 나타난 상태지만, 언제 북부에도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형한테 제일 먼저 말하고 확인받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곳이 레이나의 저택이었다. 사실 로스틴에게 먼저 말하고, 사실이 확인되면 함께 오려고 했건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어졌기에 일단 아무런 옷이나 껴입고 레이나에게 달려온 참이었다.
*
“그런데 레이나도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형은 아마도 밤늦게 올 테니까.”
따뜻한 코코아를 벌써 세 잔이나 마신 루카가 신이 나서 말을 잇다가, 뒤늦게 제 잘못이 떠올랐는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동안 내가 삐이인 거 숨겨서 화났어?”
“아니, 그럴 리가.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모두 각자 사정이 있는 거지. 굳이 다 말하고 다닐 필요는 없어. 이유가 있는데도 이해 못 하는 놈들은 그냥 손절해 버리면 돼.”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을 숨기고 있는 레이나가 절대 그렇지 않다며 루카의 고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루카가 아주아주 뜨거운 새 코코아를 달라며 미아에게 잔을 내밀었다.
디저트와 코코아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며 대충 사정을 들은 미아가 눈물을 삼키려 이를 깍 깨물고 코를 훌쩍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문을 닦는 척하며 이야기를 들은 안나는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그렇지만 감히 귀족의 사정을 안타까워하거나 내색할 수 없어서, 등을 돌리고 눈물 대신 애꿎은 창문만 계속 닦았다.
그 사이에서 레이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부의 겨울 마법이 풀린 것은 대신관이 빈사 상태에 빠져서인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마왕’이 걸었다던 루카의 저주까지 풀려 버렸기에 나올 결론이 단 하나밖에 없어서.
‘……대신관, 너였구나.’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처참한 삶을 살게 만든 원흉.
식은 코코아 잔을 꽉 쥔 레이나의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