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2화 ૮ ฅ•ᴥ•აฅ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무슨 방법인지 감이 안 잡힌다는 로스틴의 반응에 레이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남한테 이상한 의혹과 루머를 만들어 줬으니, 본인도 똑같이 당해 봐야지.”
변명 불가능한 의심과 낙인만큼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대신관 역시 이를 이용하여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엔 본인이 당할 차례였다.
뭐, 사실 굳이 따지자면 낙인을 찍는다기보단, 그가 언급했던 신탁의 모순을 찾아내 사실을 알리는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빈사 상태에 빠져 있는 지금이 제격이었다.
물론, 문제가 하나 있긴 했지만.
“루카의 허락이 필요하긴 해. 보호자인 그쪽의 허락도.”
신탁의 모순점을 짚어 내기 위해선 루카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할 거야.”
그래서 허락이 필요하다고 하자, 루카가 답했다.
자는 줄 알았는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일어나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루카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어와 레이나의 옆에 앉았다.
그에 레이나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사람들이 루카 얘기를 막 하고 다녀도 괜찮아?”
“응. 날 나쁘게 이야기할 거 아니잖아.”
그렇기는 한데, 아마도 불쌍한 아이 취급을 당할 것이다.
마왕에게 저주를 받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신관이라니. 사실이냐며 추궁을 당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말 안 한다고 사람들이 내 얘기 안 할 거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더 심한 억측을 떠벌리고 다닐지도 모른다.
저주가 풀려 이제 루카는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자주 드러낼 것이 분명했기에, 좋든 싫든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루카, 너 진짜 똑똑하구나?”
눈 뭉치라고 저도 모르게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루카는 제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고 어른스러웠다.
이 세계의 10살은 다들 이런가. 그러고 보니 펠릭스도 꽤 어른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칭찬을 받아 기쁜지 볼을 빨갛게 물들인 루카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루카가 허락한다니, 아무리 내가 보호자라고는 해도 말을 얹는 건 이상하겠지.”
로스틴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똑 부러지게 대답한 제 동생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다 된 거지? 난 이제 다시 잘래. 졸려.”
루카가 하품하며 레이나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
“루카, 모처럼 형이 데리러 왔는데 함께 돌아가서 자는 게 좋지 않겠어?”
불편하게 남의 집에서 잘 필요는 없었기에 레이나가 루카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물었다.
그러나 루카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눈을 꼭 감은 아이의 쌕쌕거리는 작은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방금까지 깨어 있었는데, 이렇게나 갑자기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고?
“뭐야, 자는 거야? 설마 기절한 거 아니지? 어디 아픈가?”
저주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유증으로 열이라도 있나 싶어 이마를 짚었으나, 손바닥에 닿은 체온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정상인데 이상하네. 피곤했나?”
레이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사이, 맞은편에 앉은 로스틴이 루카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닫힌 루카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자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흐음.”
로스틴이 팔짱을 끼며 다 알고 있다는 티를 냈지만, 루카는 미동도 없었다.
“안고 갈래?”
로스틴은 힘이 세니 손쉽게 루카를 들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묻자, 몸에 기댄 루카의 몸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제야 레이나는 루카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자는 척을 하는 것이리라.
왜 여기서 자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만 돌아가라고 할 순 없었다.
픽 웃은 레이나가 오동통한 루카의 뺨을 톡 가볍게 건드리며 로스틴에게 말했다.
“아니, 자고 가는 게 낫겠다. 모처럼이니까 내일 아침 먹여서 보낼게.”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늦었으니 나 역시 여기서 자고 아침에 루카와 함께 돌아가면 되니까.”
그리 말한 로스틴이 루카를 안아 들었다. 레이나가 그를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안 바빠? 계절 마법이 풀려서 일 많아진 거 아니야?”
“그럴 예정이었는데, 공녀가 원인을 알려 줘서 오히려 일이 줄었다고 봐야겠지. 게다가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북부 사람들은 따뜻해졌다고 좋아하지 않을까 싶고.”
“그런가.”
그도 그랬다. 갑자기 폭염이 내린 것도 아니고, 조금 따뜻해진 정도이니 다들 밖에 나와 볕이나 쬐며 즐거워할 것이다.
때문에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내일 아침을 먹고 성으로 돌아가 계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공문을 각 마을에 보내면 끝이었다.
“그래. 그보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 싶은데. 아까부터 계속 앉아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로스틴이 푹신한 침대에 루카를 눕히며 물었다. 간만에 날씨가 포근하여 레이나와 함께 저택 근처를 산책하고 싶었다.
“그래, 그러자. 루카의 저주가 풀린 기념으로 모킹주도 마시면서 걷자. 부탁할 일도 있으니 마침 잘됐다.”
술을 마시면서 걷는 건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인데. 로스틴이 잠시 고민하고 있자, 루카를 덮은 이불이 가볍게 떨렸다.
역시 혼자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조금 당황했을 뿐이었다.
“공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리 대답한 로스틴이 이불을 다시금 정돈하곤 레이나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자는 척을 그만둔 루카가 벌떡 일어나 창문 밑 작은 테이블에 올라섰다.
조금 기다리니, 손에 술잔을 하나씩 든 레이나와 로스틴이 저택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저택 앞마당을 천천히 걷는 두 사람을 확인한 루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너무 티가 나서 창피해 죽는 줄 알았는데, 역시 자는 척을 한 보람이 있었다.
‘다음에 또 해야지.’
키득키득 웃으며 한참이나 창밖을 응시하던 루카가 이내 정말 졸음이 몰려와 하품하며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저택 식구들을 모두 모아 한참이나 끙끙대며 무언가를 작업하던 레이나가 이내 비장한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마차를 타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소형 이동석을 몇 번 사용할 정도의 마력은 채워져 있었다.
‘신문 같은 게 있었다면 바로 제보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직접 발로 뛰는 수밖엔.’
레이나가 고안한 대신관 음해 방법은 퍽 간단했다. 마을을 돌면서 벽보를 붙이는 것이었다.
효과가 있겠냐 싶겠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있었다.
TV나 신문, 그 외 기타 미디어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큰 종이에 글씨를 써서 광장 한가운데 붙이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관심을 보였다.
“아니, 이게 뭐야?”
“뭐가 잔뜩 적혀 있는데?”
“오오! 날씨가 풀린 이유라고 제일 위에 적혀 있잖아?”
제목으로 어그로를 끈 덕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궁금했던 참이었기에, 글씨를 아는 이들이 대자보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잠깐만! 윈터스노우 공작 영식의 저주도 함께 풀렸다는데?!”
“뭐?! 마왕의 저주를 받으셨던 그 공작 영식?!”
“설마 마왕이 죽은 거야?!”
“성녀님께서 해치우셨나?!”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대자보의 다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 모든 현상은 대신관이 쓰러짐과 동시에 일어났다. 날씨 마법을 건 장본인이니, 날이 풀리는 것은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어째서 윈터스노우 공작 영식의 저주도 풀렸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
다른 누구도 아닌 대신관을 음해하는 말에 일순 정적이 일었다. 더는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내용이었다. 아니, 벽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큰 벌을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허둥지둥 대자보를 떼려고 하자, 옆에서 가만히 내용을 읽던 한 아이가 맞잡은 제 어머니의 손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이 벽보는 윈터스노우 공작님의 허락을 받았으며, 훼손할 시 처벌받을 수 있다. 훼손이 말이 무슨 말이야, 엄마?”
그와 동시에 벽보에 손을 댄 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옆에서 빨리 떼라며 부추기던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훼, 훼손은 망가뜨리지 말라는 뜻이란다.”
“아하! 그럼 저 아저씨가 벽보 떼면 공작님께 혼나는 거야?”
“……그, 그렇지…….”
아니, 그럼 이 불길한 벽보를 계속 붙여 놔야 한다는 말이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경고 문구 때문인지 그 누구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로스틴이 허락했을 정도면 사실일 가능성이 클 수도 있다는 불순한 생각도 들었다.
날씨 마법과 동시에 루카의 저주도 풀렸다고 하니, 사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의혹이기도 했다.
“설마 대신관님께서…….”
“어, 어허! 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하지만 공작님의 허락을 받은 이 벽보에 그렇게 적혀 있는데……!”
“크, 크흠!”
그러한 내용의 대자보를 대형 마을을 중심으로 붙이자,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거기에 대자보는 북부에만 그치지 않고 서부에도 붙여지게 되었다.
레이나에게 상황 설명을 전달받은 서부 공작 노엘은 그럴 줄 알았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걱정하지 마. 서부의 사람이라면 갓 태어난 아이라도 모두 알 수 있게 조치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