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8화
“아니거든? 오해 사는 것도 지겹다, 정말.”
타이밍 무슨 일이람. 억울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리도 딱 맞아떨어졌을까.
그간 아무리 조용히, 선행까지 베풀며 살아도 결국엔 오해를 당하는 결말이라니. 이쯤 되면 진짜 마왕이 되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냥 생각만 그런 거고.’
안락한 삶을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변명하려는데, 돌연 남부 공작이 공격 지시를 내렸다.
“마왕을 죽여라!”
“아니라니까?!”
레이나가 소리를 빽 질렀으나, 돌아온 것은 누군가가 던진 날카로운 단검이었다.
미리 준비라도 했던 모양인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피할 것도 없이 검은 장막을 만들어 막아 내자, 사람들이 기겁했다.
“저, 저런 끔찍한……!”
“저 사악한 검은 마법으로 대신관님과 신관님들을 공격한 건가!”
“아니야!”
벌써 몇 번이고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불행히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두룩했던 목격자들은 트리버의 공격 때문에 입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멀쩡한 놈들은 이미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만해! 공녀는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어!”
보다 못한 로스틴이 다시금 몰려오는 공격을 막아서며 끼어들자, 뒤늦게 그의 존재를 인식한 이들이 멈칫거렸다.
윈터스노우 공작이 왜 저기에? 아니, 그러고 보니 공작은 공녀와 친하다고 했었지.
그가 아니라고 했다고 단번에 ‘그렇습니까.’ 하며 납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하고 대화할 시간을 만들 순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건 대신관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더는 쓸데없는 대화가 오가지 못하도록, 팔로 상처를 감싼 대신관이 로스틴의 말을 긍정하며 장작을 지폈다.
“……맞습니다. 공녀가 공격하긴 했지만 맞은 자는 없습니다. 저나 신관들이 부상을 당한 건 전부 공녀의 옆에 있는 저 정체 모를 남자 때문이죠.”
대신관이 트리버를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나를 공격한 사람들 때문에 다시금 분노한 트리버의 전신에서 새카만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허, 헉!”
“저, 저건……!”
“마물을 몰고 다녔던 그……!”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나, 그간 트리버가 열심히 마물을 소환하고 다닌 덕에, 그의 실루엣과 몸을 감싼 검은 힘을 기억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대신관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레이나는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트리버는 그녀가 직접 거둬서 키우기까지 한 존재였다.
물론 그녀 역시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 모르고 거둔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충분히 설명하면 통할 문제였다. 흑막은 대신관이었고, 목격자도 있었다.
그러니 대화로 잘 풀면 되는데, 성질 급한 누군가가 트리버에게 다짜고짜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그것이 시발점이라도 된다는 듯 다른 이들의 공격도 이어졌다.
“주, 죽여!”
“아아아악! 죽어라!”
사정을 설명할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막을 새도 없었다.
재개된 공격은 트리버를 가루로 만들 기세였고, 폭풍처럼 몰려든 강력한 공격에 트리버를 옥죄고 있던 레이나의 밧줄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트리버가 눈앞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눈 깜빡하는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긴장으로 날이 서 있던 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전투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다치거나 죽어 나가는 것은 인간들뿐이었다. 레이나의 힘과 대신관의 마물까지 흡수한 트리버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순식간에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신전은 공포에 휩싸였다. 아주 짧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트리버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성녀인 세라였다. 신탁에 의하면 마왕을 해치울 수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으니.
다행히 따로 찾거나 부를 필요는 없었다. 손을 쓸 새도 없이 급변하는 상황에 성녀는 신전 구석에서 사색이 되어 있었으니까.
“성녀님!”
“서, 성녀님! 도와주십시오!”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성녀가 마치 한 줄기 빛이라도 된다는 양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더는 감추지 못하고 대신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든, 자신이 검은 마법을 쓰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든 상관없었다.
그건 나중 문제이고, 일단은 신탁대로 레이나와 트리버를 없애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대신관이 꿈에서 본 신탁에 의하면 그러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마지막에 레이나를 죽이기만 하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
여자 주인공에게 신탁을 전달하고 지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대신관은 신탁이 제 세상의 전부였다.
사실, 대신관이 받는 것은 신탁이 아닌 여주를 성장시키기 위한 퀘스트일 뿐이었지만, 천 년이나 살아온 그에게는 그 단순한 글자 몇 개가 존재의 의미이기도 했다.
때문에 대신관은 오로지 신탁만을 따르고, 이행시키면 그만이었다. 세간에서 떠드는 윤리니, 도덕관념이니 하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명성을 얻거나 추앙을 받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아니, 설령 세상 모두가 자신을 욕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누가 뭐라고 하든 일말의 신경도 쓰이지 않았기에, 그저 신탁의 내용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평판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판을 짠 것이었다.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휩쓸리는 성녀의 성격을 이용해서 일단 레이나를 없애려고 말이다.
그 뒤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어차피 레이나만 없애면 신탁은 끝이었고, 자신의 할 일도 사라진다.
존재 자체가 사라져도 괜찮았다. 레이나만 없앤다면, 신탁만 모두 이행한다면 설령 영혼이 소멸된다고 한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 음습한 생각을 마친 대신관은 곧 다가올 결말을 기대했다.
이제 성녀는 여기저기서 애원하는 사람들의 부탁에 휘둘리다가 저도 모르게 트리버와 레이나를 공격할 것이다.
“아, 아니에요!”
그럴 것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돌연 성녀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레이나는, 레이나는 마왕이 아니에요! 다들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생뚱맞은 주장에 얼이 빠진 사람들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왜 성녀가 레이나의 편을 드는 건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아직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성녀가 먼지와 피로 얼룩진 치맛자락을 꽉 붙들며 대신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리고 검은 마법은 대신관님도 사용하셨잖아요……! 신관님들을 방패 삼아 공격을 피하기도 하셨고요……!”
기억이 거의 다 돌아온 탓에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인 성녀가 눈시울을 붉혔다.
대신관이 잘못한 게 맞는 것 같은데, 레이나가 억울한 게 맞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처음 대신관을 마주했던 때의 행복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눈물이 고인 눈가를 훔친 성녀가 뒤늦게 신관들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그제야 고통에서 벗어난 신관들이 헐레벌떡 대신관의 근처에서 멀어졌다.
마치 성녀의 주장에 힘이라도 실어 주는 듯한 그 행동에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스러워했다.
“대, 대신관님……?”
그러다가 개중 누군가가 대신관을 불렀다. 몹시도 조심스러운 말투였고,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지만, 속에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방금 성녀가 한 말이 사실이냐고.
태풍을 맞은 갈대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며 의심만 하는 그들의 모습에 대신관이 픽 웃음을 흘렸다.
“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아닌데, 딱히 기분이 좋진 않네요. 자꾸 일이 틀어지고 미뤄져서 그런가. 짜증이 나네.”
그러면서 상처에 얹고 있던 손을 들어 검은색 마법을 만들어 냈다.
“……헉.”
“이, 이게 무슨……!”
사람들이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대신관의 마법이 신전을 덮쳤다.
재빨리 대응한 몇몇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갑자기 나타난 마법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쓰러졌다.
대신관이 바닥에 널브러진 수많은 인영들을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신탁을 이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금처럼 성녀님의 능력이 부족할 때에는 모두 힘을 합쳐서 마왕을 쓰러뜨려도 모자란데…….”
아쉽기 그지없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이미 모든 일이 틀어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신관이 다시 손에 마법을 피웠다.
“이런 상황은 신탁에선 보지 못했지만, 이 또한 신의 의지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어쩌면 멍청한 그쪽을 대신해서 진짜 성녀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고요.”
“……!”
눈매를 부드럽게 접은 대신관이 성녀를 공격했다.
그래, 어쩌면 저 멍청한 여자는 진짜 성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난 뒤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루벨라이트 공녀가 이상해진 것도 다 저 성녀가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자꾸 신탁을 거스르는 저 여자는 진짜 성녀가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다. 설령 진짜라고 해도 방해만 되니, 없애는 것이 마땅했고.
본성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건지 성녀에게까지 적의를 내보이는 대신관에, 레이나가 서둘러 성녀의 옆에 붙었다.
괜찮냐고 물으려는데, 다행히 잔뜩 눈물이 고인 성녀의 눈이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위로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 일단은 맛이 가 버린 눈앞의 대신관을 해치우는 것이 먼저였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보던 레이나와 세라가 대신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를 지켜보던 로스틴의 머릿속에 갑자기 신탁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이 어둠의 힘을 지닌 마왕에게 잠식당했을 때, 이세계의 소녀가 나타나 모두를 구원하리라.]
우습게도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