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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41화 (141/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41화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두 분 사이에.”

“그럼요. 보통 사이는 아니시니까요. 오히려 내외하는 편이 이상하죠. 보기만 좋은걸요?”

집사와 안나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미 레이나와 로스틴은 깊은 사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로스틴과?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그랬나? 딱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로스틴과 자신은 꽤 특별한 추억(?)을 많이 갖고 있었다.

미궁을 없애러 갔던 것도 그렇고, 축제에서 춤을 췄던 것도 그렇고. 심지어 그는 레이나에게 심연의 저택을 주기도 했다.

레이나를 위해 성인식을 준비해 주기도 했고,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는 황성의 성인식에 함께 가 주기도 했으며, 지금도 이렇게 귀찮은 일을 돕겠다고 솔선하기까지.

‘게다가 날 구하려고 내 몸을 감싸기도 했지. 두 번이나.’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잔뜩 있어 제 목숨을 소중히 해도 부족했기에, 이는 퍽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기는 했다. 자신 또한 케일란이나 아덴, 집사를 대할 때와는 다른 감정으로 로스틴을 대하고 있기도 했고.

생각에 빠진 레이나가 아무런 말도 않고 물끄러미 로스틴을 보고 있자, 케일란이 그것 보라며 괜히 성을 냈다.

“보통 사이라니까? 그냥 좀 친한 것뿐이지. 그러니까 손을 잡거나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는 건 이상하다고.”

왜 그가 나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마찬가지로 레이나의 눈동자를 유심히 보던 로스틴이 그보다도 빨리 입을 열었다.

“글쎄, 난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공녀와 나는 그래도 될 사이야.”

“어머나.”

그에 세라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역시 그랬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정식으로 교제 요청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교제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추억을 꽤 많이 쌓은 상태였기에 레이나 역시 그건 그렇다며 픽 웃었다.

“난 눈치가 없어서 몰랐어. 둘이 언제부터 사귄 거야……? 정말 잘 어울린다……!”

친구의 연애담이 흥미로웠는지 세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서로에게 깊은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불행히도 레이나나 로스틴이나 둘 다 연애와는 담을 쌓은 인생이었다.

사귀자는 말을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만나자마자 계속 바빴던 탓에 그런 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긴 해야겠지. 드라마나 게임, 소설 속에선 고백한 뒤에 사귀곤 했으니까.

레이나가 로스틴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 으음, 글쎄. ……지금부터? 우리 사귈까……?”

지금부터라니? 뭐야, 사귀는 게 아니었어? 마치 이제야 그런 절차(?)를 떠올렸다는 듯한 말투에 일동이 경악했다.

쓸데없이 붙어 다니고 야심한 밤에 산책까지 종종 하던 두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이미 교제는 물론 미래까지 약속한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말이 나온 김에 지금부터 사귀자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다행히 로스틴은 눈치가 있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승낙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안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그러자고 답하고 싶지만, 아니. 이건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건데? 설마 차인 건 아니겠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레이나가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로스틴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픽 웃었다.

“제대로 준비해서 교제 신청을 하도록 하지. 내가 먼저 말이야.”

뭘 어떻게 준비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이를 보던 사람들이 ‘어머나, 세상에.’ 따위의 감탄사를 외치며 새로운 커플의 탄생 예고편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훈훈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케일란 혼자만이 사색이 되었다.

괜히 아니꼬워서 비꼬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럴 생각조차 없던 두 사람을 확실하게 이어 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씨!”

괜히 성질이 난 케일란이 자리를 박차고 응접실을 나갔다.

의자까지 걷어차고 씩씩대며 사라지는 뒷모습에 레이나가 쟤 대체 왜 저러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대머리로 만들어야 예의를 지키려나.”

끔찍하기 그지없는 말에 집사가 서둘러 그녀를 만류했다.

“이번만큼은 그럴 만도 하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공녀님.”

고백을 하기도 전에 좋아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이어 줘 버렸으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집사뿐만 아니라 안나와 미아도 퍽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치가 없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케일란이 레이나를 꽤 예전부터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백도 전에 차인 것도 모자라, 대머리까지 된다면 너무 불쌍할 것 같았다.

“그래요, 공녀님. 이번만큼은 봐주시는 게 어떨까요?”

“맞아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평소 같았다면 대머리가 되든 탈모가 되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사람들까지 두둔하고 나서자, 레이나가 의아해하면서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어. 오늘은 봐줄게.”

좋은 일만 가득한 날에 굳이 누군가를 대머리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내일 또 저런다면 그때는 얄짤 없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 털까지 모두 소멸시켜 주겠다며 레이나가 속으로 다짐했다.

*

지체할 이유가 없었기에 레이나는 공작 부인에게 소송을 돕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다른 사안도 아니고, 남편에게 학대를 당했다는데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나가 공작 부인의 소송을 기다리는 사이, 황태자는 대신관은 물론이고, 관련 인물들까지 처벌할 준비를 마쳤다.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황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사병을 모은 시점에서 이미 벌을 내릴 이유가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게 마왕인 대신관을 돕기 위해서라니. 삼대는 물론이고 일가친척-아니, 가문에서 일하던 사용인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처형해도 부족한 사안이었다.

물론 황실 역시 천 년이나 대신관에게 속고 있었기에, 주위의 비난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이런저런 죄목도 추가되었다.

일부러 황실의 눈을 가리며 기만했다거나, 서류를 조작했다거나, 음침한 마법으로 사람들을 세뇌했다거나 하는 죄목이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자를 처벌하고 죄목을 공개하여 공포심이라도 심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맞이하게 된 재판 당일.

황성 재판장에는 이번 일과 관련된 수많은 귀족들이 모이게 되었다.

개중에는 루벨라이트 공작의 직계인 레이나도 있었다. 증언을 할 로스틴과 루카도 함께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혼 소송을 준비 중이던 공작 부인도 날벼락 같은 부름을 받고 초췌한 안색으로 재판에 참석했다. 그녀의 옆에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의 펠릭스가 자리했다.

“어? 펠릭스?”

같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공작 부인과 펠릭스, 그리고 레이나의 자리는 바로 옆이었다.

착석하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레이나가 의아해하자, 인사를 하는 것도 잊은 공작 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제 아이를 아시나요?”

“뭐야. 펠릭스, 너 귀족이었어?”

이렇게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언젠간 자신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밝힐 예정은 없었기에 눈시울을 붉힌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 속여서 죄송해요……. 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를 싫어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저는…….”

뒷말을 채 잇지 못한 펠릭스가 공작 부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공작이 후처로 들인 여자의 배에서 나와 호의호식하며 살아왔으니, 싫어할 줄 알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레이나는 두 사람에게 전혀 유감이 없었다. 오히려 학대를 받고 살았다니, 같은 처지였구나 싶어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해서 레이나가 퍽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펠릭스에게 말했다.

“너, 열 살이잖아.”

“네에…….”

갑자기 왜 나이를 언급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펠릭스가 훌쩍이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열 살은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니야. 공놀이하다가 창문이나 도자기를 깨도, 놀다가 그랬으니 봐 달라며 재롱을 부릴 나이라고. 그리고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눈치를 봐?”

뜻밖의 말에 펠릭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걸려 있었다.

손수건 같은 걸 가지고 다니질 않아 대충 손으로 펠릭스의 눈물을 닦아 준 레이나가 다시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좀생이 같아? 막 널 미워하고 싫어할 것같이 보였던 거야?”

그 물음에 화들짝 놀란 펠릭스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레이나가 표정을 풀었다.

“그럼 됐어. 너처럼 착하고 성실한 동생이라면 나도 환영이니까. 앞으로 그런 얼굴 하지 마.”

“네, 네! 저어, 그, 그럼…… 누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치 보지 말라고 한 게 방금 전인데, 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에 레이나가 펠릭스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당연하지. 누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그럼 이름이라도 부를 셈이었어?”

“헤헤헤.”

타박을 하는 것인데, 뭐가 좋은지 펠릭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아이의 옆에 앉은 공작 부인의 표정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다른 배에서 나온 두 아이가 친해져서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기는 한데, 하필이면 이혼을 하기 전에 이런 일이 터져서 자신은 물론이고 펠릭스와 레이나까지 처형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현 상황이 두렵기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아이들만은 살려야 해.’

공작에게 줄곧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면, 두 아이의 목숨만은 살려 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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