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43화
*
그 뒤, 모자는 서둘러 수도 임시 거처로 돌아갔다. 한시라도 빨리 짐을 챙겨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루벨라이트 공작의 마지막은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참관하지 않았다.
레이나 또한 굳이 그런 끔찍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잘 죽었다는 연락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마찬가지로 미련 없이 북부로 돌아가려는 레이나의 옆에 로스틴과 루카가 따라붙었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니, 동행하지.”
같은 방향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대형 이동석으로 이동할 예정이고 목적지도 다른데.
그렇다고 굳이 딴지를 걸진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걱정과 불안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왜지? 일도 다 잘 풀렸는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레이나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로스틴과 루카가 심연의 저택까지 따라오자 더욱 깊어졌다.
“집에 안 가?”
그러자 서운해서 미치겠다는 듯 루카가 눈시울을 붉히며 퍽 사납게 대답했다.
“레이나, 이제 동부로 돌아갈 거잖아! 나 버리고 가 버릴 거잖아!”
어쩐지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레이나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며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이야? 내가 동부엘 왜 가?”
“공작이 됐잖아! 형처럼 맨날 일만 해야 하잖아!”
“아닌데?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어?”
어깨를 으쓱인 레이나가 집사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내 그녀는 종이에 무언가를 길게 적곤 동부의 공작저로 보내라며 다시 편지를 집사에게 건넸다.
“그럼 공작 작위 버리게?! 동부 공작은 누가 하고?!”
“공작 부인-아니, 이제는 전 공작 부인이겠네. 아까 대신 맡아 달라고 했잖아. 내가 어떻게 갑자기 영지를 관리하겠어? 이곳에 벌여 놓은 일도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그간 열심히 열정을 쏟은 곡창 지대가 이제 막 궤도에 오른 상태였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수확할 시기가 되는데, 어딜 가겠는가?
거기다가 곡창 지대 근처의 마을도 개발해야 했다. 노엘에게 자랑도 해야 하고, 신전을 떠나 자신만의 종교를 만들 거라는 세라도 가끔 돌봐야 했다.
그러니 레이나는 몹시도 바쁜 상태였다. 어딘가에 묶여서 서류 작업만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질 참인데, 공작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안 가, 안 가.”
게다가 마침 영지 관리에 적합한 사람이 있으니 맡기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함께 관리하자는 말이 아니었나?”
“응? 절대 아니야. 방금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편지도 썼어. 앞으로 잘 관리해 달라고.”
아니, 그렇게 중요한 일을 편지 따위로 부탁한다고? 그것참, 레이나답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형제는 잠시 서로를 응시하며 말없이 생각을 교류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인데, 레이나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든 잘 풀릴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 나 어디 안 가. 이미 여기에 정 다 붙였어.”
레이나가 픽 웃으며 말하자, 루카의 표정이 더없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이따가 공작 성에 올 수 있어?!”
“공작 성? 갈 순 있는데,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응! 형이-”
루카가 말을 이으려는데, 로스틴이 다급히 아이의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신 설명을 이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 북부에 남는다니, 파티라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응, 알겠어. 갈게.”
공작 성에서의 식사 초대는 처음이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모킹주라도 가져가서 다 함께 축배를 들어야겠다며 레이나가 다른 사람들의 일정을 물으려던 때였다.
“다들 오늘 저녁은 공작 성에서-”
“아니, 혼자 왔으면 하는데.”
로스틴이 레이나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 왜지? 하는 의아함과 동시에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제대로 준비해서 교제 신청을 하도록 하지. 내가 먼저 말이야.”
어, 설마……. 그때 이후로 이래저래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혼자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하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당황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차려입고 가도 되는 거지?”
또 혼자 착각해서 저번 축제 때처럼 봉변을 당하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묻자,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물론이야.”
*
일생일대의 아주 중요한 저녁 식사가 될 것 같은 예감에 레이나는 미아와 안나의 도움을 받아 변신했다.
그저 로스틴과 공작 성에서 둘이 식사를 할 예정이라고만 했는데,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수도까지 가서 새로운 장신구를 구해 오겠다는 안나와 미아를 말리느라, 레이나는 한참이나 진을 빼야만 했다.
그렇게 대단한 준비를 마치고, 그녀는 트리버의 방에 잠시 들렀다.
그날 이후, 트리버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서 힘을 사용해 보았지만, 흡수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트리버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남아 있는 마력을 전부 흩뿌리고 소멸하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미약한 검은 안개만 뿜어내며.
“……트리버.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릎 꿇고 싹싹 빌면 용서해 줄 테니까 이대로 떠나지는 말아 줘.”
이제는 루카와 엇비슷할 정도로 작아진 트리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레이나가 이내 그의 방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트리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연기가 크게 일렁였다.
잔잔하게 흩날리기만 했던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당장 소모해 버릴 것처럼 강력한 기세였다.
그에 더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
그럼에도 트리버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이제 절대로 깨어날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트리버의 방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 평화를 깨지 않겠다는 듯 트리버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
레이나는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공작 성으로 향했다. 이동석을 사용해 공작 성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한껏 차려입은 로스틴이 그녀를 맞이했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추운데 안에 있지.”
“이러는 편이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어머나, 세상에. 무슨 그런 말을 맨정신에 하는 거람. 다짜고짜 들어온 돌직구에 레이나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로스틴이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가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와 손잡은 게 처음도 아닌데, 날이 날이라서 그런가.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하며 식당까지 이동하는데, 어째서인지 가는 길이 낯설었다.
“이게 다 뭐야?”
북부의 공작 성은 필요한 것 외에는 일절 없는 깔끔한 곳이었다. 아니, 말이 깔끔한 거지, 그냥 아무것도 없다고 표현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지. 창문 곳곳에는 벨벳으로 된 커튼이 예쁘게 걸려 있었고, 일정 간격을 두고 생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못 보던 조각상이나 보석 장식도 있었다. 생화나 커튼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조각상과 보석 장식은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설마 산 거야?”
“꽃과 커튼만. 조각상과 보석상은 원래 있던 것이야. 너무 삭막한 것 같아서 꾸며 봤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그러니까 레이나 때문에 꾸몄다는 뜻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방문할 레이나가 좋아해 주었으면 해서.
자신을 위해 꾸몄다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좋았던 레이나의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좋아, 예뻐. 나 꽃 좋아해. 보석도 그렇고. 일단 쟤들은 비싸잖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 로스틴이 작게 웃었다.
이제는 따뜻한 온기를 품은 공작 성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걸으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레이나와 로스틴의 등장에 하인들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싱그러운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가 보였다.
식당보다는, 아주 아름답게 꾸민 연회장에 가까웠다. 아주 넓지 않은 적당한 크기라서 그런지, 더 알차고 예쁘게 보였다.
레이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사이, 로스틴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이나.”
돌아보자, 로스틴의 손에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열린 상자 안에는 퍽 고급스러워 보이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반지인데, 받아 줬으면 좋겠어.”
아니, 사귀자고 고백만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요?
사람이 어쩜 이렇게 한결같고 진지할까.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고, 당연히 반지는 고맙게 받을 생각이었다.
레이나가 손을 내밀자, 로스틴이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나 이제 코 꿰인 건가?”
반지까지 받아 버렸으니, 거의 약혼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로스틴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아마도 평생.”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