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마계 : 제로스의 성(2)
*마기가 걷히고, 마계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등을 돌렸을 때에는 검붉은 대지와 함께 수많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면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성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여기가 마계로군.’
태현은 천천히 성벽 안으로 진입했다.
마기는 그가 악마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대신, 악마로 보이는 이들이 그를 막아섰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지?”
악마 중 한 명이 물었다.
태현은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외부에 보이는 악마만 최소 50명 이상.
일단은 싸우지 않고, 지켜보는 단계다.
“뭐야? 대답이 왜 없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지? 딱 보인다.”
“얼빵한 모습 좀 보게. 큭큭.”
악마들은 대답이 없는 그를 비꼬았다.
그러나 태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네. 맞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니 악마들도 그제야 비꼬는 것을 멈췄다.
조금쯤은 반항할 줄 알았는데, 순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뭐야··· 김새네. 악마가 그렇게 순하면 오래 못 산다.”
“선배로써 하는 충고야.”
“아차··· 너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지? 빨리 지나가라.”
악마들은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무래도 그가 처음 보는 얼굴이다 보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악마로 인식하는 것이리라.
다른 종족이라고 보기에는 악마들에게만 주어지는 표식들이 목덜미부터 새겨져 있었기에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네.”
태현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 악마들은 그런 태도가 싫지는 않았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신기한 녀석. 앞으로 종종 찾아와. 잘해줄게.”
악마 한 명이 히죽 웃었다.
물론 잘해준다는 의미가 좋은 쪽으로 볼 수는 없었다.
태현은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고는 그들을 지나쳐갔다.
‘트랜스폼 물약 정말 엄청나네.’
정말 물약을 구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이 하나 있었다.
악마들은 몬스터라고 보기에는 각기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인간들을 학살하는 몬스터와는 조금 달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여러모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새로운 아이로구나?”
이번에는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악마들이 태현에게 관심을 가졌다.
“네.”
“그래.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이름을 하사받으려고 왔지? 집무실에 계시는 오컬님을 찾아가. 그 분이 안내해줄 거야.”
그 말과 함께 성문을 열어주는 악마.
귀가 밝았던 터라 다른 악마들과 하는 대화들을 전부 들은 모양이다.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네.’
태현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들어갔다.
트랜스폼으로 악마로 완벽하게 변화했기에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제로스의 성에 입장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성에 들어온 태현은 가장 먼저 주위를 살폈다.
제로스의 성답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더럽게 넓네.’
층도 어찌 많은지 대충 세어 봐도 10층은 되어 보인다.
“시녀.”
성문을 지키던 악마가 태현을 뒤따라왔다.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고, 시녀를 불러 태현을 오컬에게 안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위해 잠시 들어온 것이다.
[Lv. 150 상급 악마 : 엘]
태현이 정보를 살펴보자, 역시나 악마들에게도 레벨과 이름이 떴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여기서 악마들을 상대하기에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혹시나 이 악마보다 더 강한 악마들이 우르르 몰려온다면?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 제로스를 상대해야한다.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상급 악마의 목소리에 시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Lv.90 하급 악마 : 제이]
상급과 레벨이 무려 60이 넘게 차이가 났다.
이러니 메이드로 일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 녀석, 갓 태어난 녀석이니까 오컬님께 데리고 가.”
“알겠습니다!”
메이드인 제이가 태현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앞장섰다.
“따라오세요···.”
태현은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살폈다.
‘상급 악마인가?’
악마의 표식은 다른 상급 악마들과 똑같았다.
그렇기에 메이드 제이가 자신의 등급을 가늠하고는 자연스레 굴복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악마들이 친근하게 대했던 건가?’
이제야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상급 악마니까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모양.
“신참, 나중에 따로 좀 보자고. 이름 받으면, 곧장 알려줘.”
상급 악마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태현은 피식 웃어주고는 메이드 제이를 따라갔다.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 네! 말씀하세요!”
제이는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태현은 그런 모습을 보고, 쓸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태어난 거랑 관계없이 등급에 따라 아랫사람에게 하대를 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래. 그러면 편하게 물어볼게.”
태현이 묻고 싶은 것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제로에 대한 것.
성에 대한 것.
그리고 악마들까지.
제이는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이야기는 나누는 사이, 제이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 옆에는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위에는 이상한 글자가 있었지만, 내용물까지 악마로 변한 터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가 집무실? 거대하네.”
태현이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그렇죠? 오컬님은 최상급 악마시거든요! 특히 제로스님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기도 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제이는 자신의 일인 것 마냥 뿌듯해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안내하느라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래. 여기서는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 그만 가 봐.”
“그래도 될까요···?”
제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메이드이기에 한 번 명령을 받은 것은 끝까지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
명령은 태현을 오컬에게까지 안내하는 것.
아직 명령은 완수하지 못한 상태다.
“나도 그 악마랑 동등한 위치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 봐.”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가 허리를 굽히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제야 그가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흠··· 남은 시간은 5시간 정도인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태현은 제이에게 들었던 정보들을 하나 둘 곱씹어보았다.
가장 먼저는 악마들의 등급.
최상급 악마가 180~200.
상급 악마는 150~175.
중급 악마는 125~145.
하급 악마가 90~120이라고 한다.
‘역시 나대지 않기를 잘했어.’
지금 현재 자신의 레벨은 210이다.
능력치 30% 상승을 보정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은 조금 벅차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인데.
‘제로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급 악마인 그녀는 제로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왕이기에 그를 보필하는 메이드나 집사들도 전부 최상급 악마.
그러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태현이 고개를 들어 집무실을 보았다.
이곳이 제로스를 보필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집무실.
물론 오컬이라는 녀석도 여기 있겠지?
‘일단 들어가고 보자.’
태현은 여유롭게 집무실을 열었다.
노크까지 할 예의 따위는 없다.
끼익.
집무실의 문이 열렸고, 자리에 앉아있는 6명의 최상급 악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이네?”
태현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최상급 악마 중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Lv.190 최상급 악마 : 릴리]
‘레벨 190이라···.’
레벨만 보면, 확실히 상대하기가 수월하다.
그렇지만 수하들을 불러들일 수 없었기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태현이 고개를 숙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그래? 이상하네. 지금은 아이가 태어날 정도의 마기가 없을 텐데?”
알고 있다.
제이의 말에 따르면, 마계는 지금 마기로 봉인시킨 상태라고.
그 이유는 제로스만 알고 있다고 한다.
의심을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상급 악마다.
절대로 걸리지 않는다.
릴리는 의아한 눈으로 태현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전 잘 모릅니다. 눈을 뜨니까 마계에 있었어요.”
태현이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릴리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악마 맞네. 오컬, 얘가 너 찾아왔다.”
“그래. 이름을 받으려고 왔지? 일은 그 다음에 주마.”
“감사합니다.”
태현이 허리를 굽혔다.
악마들은 일을 통해 제로스에게 마기를 하사받는다.
마치 월급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어째서 마기를 대량으로 사용해서 마계를 봉인시켰지?’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태현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래. 제로스님께 가자.”
“네.”
오컬은 그 말과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최상급 악마들은 그 모습을 힐끔 보고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오컬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성 꼭대기였다.
중간 중간 오컬이 가지고 있는 표식으로 막혀있던 문을 열었다.
‘그래서 오컬에게 가라고 했던 거군?’
오컬이 가지고 있는 펜던트.
저 펜던트로 문을 여는데 사용했다.
만약 악마들을 상대한다고 치면, 하급부터 최상급까지 격파하고, 저 펜던트를 뺏어서 제로스에게 향했어야 될 것이 뻔했다.
“여기가 제로스님의 침실이다.”
오컬이 멈춰선 곳은 집무실보다도 더 거대한 문이었다.
마기로 뒤덮인 문.
태현이 말없이 문을 응시하는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아마 너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로스님은 마계의 왕이시지. 최상급 악마도 아닌, 상급 악마는 이름을 하사받을 때 말고는 제로스님을 뵐 기회가 없어.”
“아하 그렇군요.”
오컬이 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펜던트를 문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지간히도 신뢰를 받고 있는 모양이군.’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침실까지 출입이 가능한 펜던트를 쥐어주지 않았으리라.
태현은 제로스의 방에 천천히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악마.
아무래도 저 놈이 제로스인 듯 했다.
“제로스님, 이번에 새로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오컬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태현도 그와 똑같이 예를 갖추고는 제로스를 올려다보았다.
[Lv.240 제로스.]
‘응?’
올려다보자마자 레벨이 보였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제로스의 레벨이 240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괜히 퀘스트가 나온 게 아니란 말이지.’
퀘스트.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제로스는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처치가 가능했기에 주어진 퀘스트였다.
역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퀘스트를 주지 않는 모습.
“···너는 저 자가 갓 태어난 아이로 보이느냐?”
꺼림칙한 목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제로스는 어느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태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 그게 무슨···.”
오컬은 당황한 눈으로 태현을 보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갓 태어난 악마였다.
그런데 어째서 제로스가 저런 말을 한다는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후, 들켰네.”
태현이 히죽 웃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제로스의 힘을 파악했으니 지체할 필요 없이 공격 개시다.
그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곡괭이를 꺼내들었다.
“너··· 악마 맞나?”
그제야 오컬이 흠칫 놀라고는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태현은 어느새 그에게 다가가 곡괭이를 휘둘렀다.
“덕분에 쉽게 왔다.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오컬을 즉사시켰다.
제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킹인가?”
“그래. 갚아줄 빚이 있어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