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리유키 코타로(1)
*안식처에서 수련 중이어야 할 수많은 병사들.
그러나 지금은 수련에 정진할 때가 아니었다.
“주군께서 저렇게 앉아만 계시니···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태현이 포탈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니 수련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고, 다른 휴식을 취하자니 그럴 수조차 없었다.
주군께서 저렇게 고생을 하는데, 어찌 부하인 자신들이 쉴 수 있겠는가?
“설마 주무시는 거 아닐까?”
“나도 그 생각했는데.”
“호오··· 네가 나랑 같은 생각을 했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뭐 이 새꺄?”
덕배와 발락이 다시금 말다툼을 시작하려하자, 레온이 급히 저지했다.
“그만해. 주군 계시는데 싸울 셈인가?”
“···주군께서 너를 살렸다.”
“웃기네. 너를 살린 거지.”
으르렁거리며 어떻게든 안 지려는 모습.
마족들은 그런 태현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본래 마계의 왕께서 생각에 잠기셨을 때에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것이 도리.
그렇기에 발락과 덕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싸우지 말라는 명령에 꾹 참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싸워도 된다고 한다면, 진즉에 결판을 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흠··· 그래도 조용히 하자고. 주군의 집중을 흐트릴 생각은 아니지?”
눈치가 빠른 수하들은 급히 인원들을 저지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게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꾸벅.
마족들은 눈치가 빠른 수하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수하들 역시 고개를 숙여 응수했다.
그러나 태현은 그들이 어떤 대화를 하던, 집중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미 고도의 집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몸을 건들지 않는 이상 끊어질 염려가 없다.
[‘초대 킹 가오스의 접견실’]
-초대 킹 가오스의 접견실 포탈의 입장 열쇠입니다.
-획득하고 200시간이 지나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하···.’
쾅!
태현이 주먹을 세게 내려쳤다.
수하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태현을 보았지만 어느새 잠잠해진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획이 틀어졌다.’
곧바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결국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150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프레드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몸을 추스르기까지 150시간.
앞으로 남은 시간은 불과 50시간이었다.
“좋게 생각해야겠어.”
당장이라도 비밀을 파헤치고 싶어 조급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물리적인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계속 조급하게 앞으로 나아갔을 터다.
그러니 이런 브레이크를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 마음을 추스르는 기간으로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후우··· 이렇게 됐으니 관리국이라도 다녀와야겠어.”
일단 미국의 G급 게이트에 관해서 보고를 하긴 해야 한다.
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제야 수하들이 태현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니 인사만 받고, 포탈 앞에 앉아 시간만 보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지?”
“없습니다!”
“없습니다!”
수하들과 마족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훗.”
이제 동료처럼 지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것이 선하게 보였는데.
“알겠다. 그러면 다음 지시가 있기 전까지 각자 휴식을 충분히 취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차를 홀짝이는 진도윤의 얼굴빛이 어둡다.
그 앞에는 태현이 앉아있었다.
대화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고, 살인귀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G급 게이트도 G급에 준하는 능력자가 출현한 것이 핵심내용이다.
특히 갓 급 능력자로 인해서 미국의 갓 급 각성자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는 것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속은 뒤틀렸을 겁니다.”
태현이 차를 홀짝였다.
확실히 그의 집에서 봤던 프레드의 모습은 멀쩡했다.
하지만, 속은 그러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도 갓 급인데, 크라포스에게 농락을 당했고 죽을 뻔했다.
그런데 비무를 신청했던 태현이 나타나서는 맨주먹으로 크라포스를 박살내지 않았던가?
그것도 끔찍하게 말이다.
자존심이 강한 스타일 같은데, 아마 엄청 큰 스크래치가 일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겠지요··· 허,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상식 밖의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미래에는 이것보다 더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도윤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태현을 보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더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어쨌거나 지금 보유하고 있는 헌터들이 몬스터의 박멸에 힘쓰는 것이 최선입니다.”
“헌터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지요.”
“저를 100% 신뢰하시는 건가요?”
“저는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자부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후후, 그 땐 제 어리석은 판단을 후회하겠지요. 하지만, 헌터님을 믿는 건··· 적어도 후회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태현이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크게 벌렸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큰 신뢰를 받고 있었던가?
받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처럼 무한한 신뢰일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답니다.”
“흠··· 앞으로 G급 게이트가 또 등장할 가능성이 있겠군요.”
끄덕.
태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갓 급들이 움직여야 될 때일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번 G급이 1번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도윤의 말은 진심이었다.
G급이라면, 갓 급들이 나선다 하더라도 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태현 역시 동감하는 바다.
크라포스 한 명으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몬스터들이 전부 갓 급에 준하는 녀석들이었다면, 꽤나 골치 아팠으리라.
“일단은 다음 게이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평소대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당연하지요, 게이트는 민감한 부분이니 헌터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건, 안 좋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
역시 진도윤은 헌터들을 우선시하는 센터장이다.
태현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미국 갓 급 헌터.
알드레드 프레드.
그는 지금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하루에 10분씩 총 3번 명상을 한다.
마음 속에 잡념들을 떨치기 위한 정신수양이다.
그러나 오늘 그의 명상은 10분이 아닌, 30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왜 사라지질 않는 거냐.’
프레드의 눈이 떠졌다.
그의 얼굴에는 찝찝함이 가득했다.
“후우··· 도대체 한태현의 등급은 어느 정도지?”
갓 급인 자신을 월등히 뛰어넘었다.
기운만으로도 자신을 완전히 압살할 정도.
그러니 크라포스가 맥을 못 추리는 것도 당연했다.
“답답하군···.”
가슴이 답답했다.
갓 급으로 각성한 이래 자신이 최고라고 굳게 믿어왔는데, 깨진 유리마냥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답답한가?”
흠칫.
갑작스런 목소리에 프레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태현과 비슷한 용모의 동양인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프레드가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
갓 급인 자신의 뒤를 인기척도 없이 붙었다고?
어떻게 봐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질문은 받지 않아.”
동양인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굉장히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프레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팔뚝의 솜털은 공포를 느꼈는지 오소소 일어난 상태다.
“···누구냐.”
“질문은 받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뭐, 알려주자면 일본의 갓 급 헌터라고 하는 게 익숙하지?”
“나리유키 코타로인가···.”
나리유키 코타로.
일본의 갓 급 헌터다.
어둠의 힘을 다룬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그 누구도 그의 무위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프레드 역시 코타로를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왜 답답하지? 설마 한태현이라는 놈 때문인가?”
코타로의 입에서 태현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뭐지··· 조금 이상한데.’
마치 면식이 있는 것 마냥 행동하는 코타로.
심지어 목소리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한태현 헌터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내 힘 때문이지.”
“호오? 한태현이 아니었다면, 네가 나약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 건데도 자신의 탓이라는 건가?”
“···끼워 맞추지 마라. 나는 그렇게 멍청한 놈이 아니니까.”
“아쉽군. 눈치껏 기어들어오면, 살려줄 의향도 있었는데.”
“헙!”
쾅!
프레드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옆으로 뺐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어둠에 침식되었다.
“이게 무슨···.”
마치 새로운 차원에 빨려 들어간 것 마냥, 어둠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 내가 계약만 제대로 했더라도, 악마들을 잃지 않았을 것을.”
“그게 무슨 소리지?”
“훗, 기회를 주지.”
“기회라고?”
코타로의 입가가 비틀렸다.
사람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것은 처음 알았다.
프레드는 코타로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을 받고 있는 듯한 모습.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는 코타로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살짝 조작했다.
“나와 힘을 합쳐서 한태현을 없앤다. 그러면 너를 위협하는 존재가 사라질 테고, 나 역시 목적을 달성하니 좋은 거 아닌가?”
“한태현 헌터를 처단하려는 이유가 뭔지 알려줄 수는 없는 건가?”
“큭큭,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 내가 가진 걸 뺏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손댈 사람이 아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얼마나 봤다고 확신할 수 있지?”
“그건···.”
프레드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코타로의 눈이 사납게 휘어졌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창으로 형성되더니 그대로 프레드를 덮쳤다.
프레드가 급히 태양의 룬을 소환해서는 창을 방어했다.
그러나 코타로의 창은 그의 스킬을 가볍게 꿰뚫었다.
몸을 눕혀서 창을 겨우 피한 프레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슨 놈의 힘이···.”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프레드의 손은 쉬지 않고, 주머니에서 움직였다.
“누구에게 보낸 거지?”
코타로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들켰어?”
프레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빼들었다.
그가 휴대폰을 살짝 조작하니 코타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현을 죽이자는 말을 녹음한 것이다.
“큭큭, 그걸 녹음해서 한태현에게 보낸 건가?”
“정답.”
프레드가 씨익 웃었다.
이미 태현에게 목숨을 빚진 이상, 그를 배신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니 조금이라도 도움은 주는 게 맞겠지.’
코타로가 다가왔을 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태현에게 정보를 넘겨줘야겠다는 마음으로 휴대폰으로 녹음을 했다.
‘휴대폰을 습득한 게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휴대폰을 충전해준답시고, 그의 휴대폰 번호를 몰래 빼냈다.
그렇기에 그에게 녹음 파일을 전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뭐··· 상관없어. 애초에 네 놈이 나를 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프레드의 전신에서 붉은 연기가 솟구쳤다.
그의 안광이 잿빛으로 일렁였다.
“비싸게 주고 지은 건데.”
특수 제작한 집인데, 갓 급이 스킬을 사용하니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프레드는 아쉬운 감정이 섞인 눈으로 망가진 집을 훑었다.
태양과도 같은 화염이 감싸기 그의 팔을 시작했다.
“먹어주마.”
코타로가 혀를 날름거렸다.
“웃기는 소리.”
프레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코타로에게 바짝 붙었다.
그의 팔에 둘린 화염이 코타로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