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리유키 코타로(3)
*안식처에는 수하들이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었다.
마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야?”
흑발의 남자가 말했다.
마스터 등급으로 승급한 도일이다.
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군의 명령 없이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
태현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다.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큰일이네. 주군께서 빨리 명령을 내려주셔야 할 텐데.”
“맞는 말이야. 이전 주군이 부활한 거 같아. 빨리 나서서 주군을 도와야한다고.”
마족들이 한마음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마족들의 대표 릴리는 요지부동이다.
“주군께서 필요로 하실 때까지는 기다리자.”
항상 그래왔다.
자신들을 필요로 할 때,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외에는 태현이 싸우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릴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쯧쯧.”
그 때, 혀를 차며 마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인물이 있었다.
“뭐야, 하등한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찾아와?”
마족들이 하등한 놈이라며 무시하는 인물.
다름 아닌 발락이었다.
그는 마족들이 처음 왔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다른 수하들과는 다르게 아직까지 마족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몇 안 되는 수하들 하나였다.
“주군이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그냥 보고만 있을 셈인가? 하긴, 네 놈들은 수동적인 놈들이었지?”
발락의 일침에 마족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들도 가만히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 말 다 했냐!?”
“이 새끼가!”
“그만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결국 싸움이 일어나려는 분위기에 레온과 이안, 렌이 급히 그들을 저지했다.
이안은 뛰어난 머리로 수하들과 마족들이 합심하여 살아갈 수 있는 방안들을 수십 차례로 제안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마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레온과 렌 역시 자신들을 공평하게 대했기에 나쁜 감정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저지함에 마족들이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저 놈 좀 어떻게 해 봐. 왜 갑자기 찾아와서 시비를 걸고 난리야.”
“···잘 타이르겠네.”
레온이 고개를 숙였다.
“뭘 타일러? 딱 보니까 저 놈들의 전 주군이 다시 등장한 거 같은데. 쟤들도 연관 있는 일이라고.”
“발락, 잠시 멈춰주세요.”
이안이 발락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의 저지에 릴리가 혀를 가볍게 찼다.
“쯧··· 우리들도 가만히 있고 싶은 건 아니야.”
“그래도 주군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는 대기하고 있는 게 우리의 사명이다. 너희들도 똑같지 않나?”
“맞소.”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태현의 명령이 없을 때에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주군께는 말씀을 드려볼 수 있겠지요?”
“뭐?”
이안은 부드러운 얼굴을 유지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주군을 따르는 몸입니다. 그건 동의하지요?”
“그래. 이전 주군이 돌아왔다고 한들, 우리들은 지금의 주군을 목숨을 바쳐 따른다.”
“그러면 주군께 말씀드리고, 능동적으로 주군을 돕겠다고 말씀을 올리세요.”
“···그건 안 돼.”
릴리는 단칼에 거부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주군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태현이 주군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을 겁니다. 당신들은 이제 마족이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저희들과 똑같은 주군을 섬기는 백성일 뿐이지요. 그리고 주군은 저희들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분이시고요.”
“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란 말씀을 제가 몇 번 드린 적이 있지요?”
끄덕.
마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마족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일은 여러분들이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으니까요.”
“···주군께서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싫어하실 분으로 보이십니까?”
“······.”
마족들은 복잡한 얼굴로 이안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말이 틀린 적이 있었던가?
괜히 그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의 고민이 끝나고, 마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발락은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거예요.”
“절대 아니야!”
“후후, 빨리 돌아가죠. 발락.”
이안이 조용히 웃으며 발락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미국 LA.
좁은 길목에 한 명의 남성이 쓰러져있었다.
그 길을 지나던 사람들을 미동도 없는 남성을 힐끔거리다가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물론 남성을 도우려는 시민들도 있기 마련이다.
“어? 괜찮은 건가?”
“괜찮으세요?”
젊은 20대 커플이 남성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쥐 죽은 듯이 쓰러져있던 남성이 발작하더니 피를 토했다.
“이런! 진짜 위험한 상태잖아? 허니! 빨리 구급차 불러!”
“아··· 알았어!”
“그··· 그만.”
여자가 구급차를 부르려고 하자, 때마침 발작은 멈춘 남성이 힘겹게 손을 뻗어 저지했다.
“괜찮으십니까!?”
“뭐··· 라는 거야.”
남성의 입에는 영어가 아닌, 일본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구급차가 올 예정입니다.”
“끙··· 괜히 이상한 짓을 하는 모양··· 끄아악!”
힘겹게 숨을 내쉬는 남성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괴로워하던 얼굴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평온한 얼굴로 몸을 털고 일어나는 남성.
커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남성을 보았다.
“흐음··· 역시 너무 질기단 말이지.”
“여··· 영어 할 줄 아십니까?”
남성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아까와는 다르게 알아듣는데 지장이 없었다.
“다··· 달링··· 그만 가자.”
여자는 불안한 얼굴로 남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남성의 얼굴이 180도 바뀐 것도 모자라 광기에 물든 상태였다.
“내가 무서운가?”
흠칫.
남자가 몸을 움찔 떨었다.
목소리가 변했다.
그것도 꺼림칙한 목소리.
커플은 몸을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으으···.”
“후후. 나를 보고 도망치려고 하다니, 배짱이 좋구나. 으윽!”
남성이 다시금 괴로워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발버둥치는 모습에 커플이 아연실색했다.
“도··· 도망가!”
남성, 나리유키 코타로가 소리쳤다.
방금 전, 소름 돋게 만들었던 목소리가 아닌, 일반 남성의 목소리였다.
커플들은 경직된 몸을 겨우 풀었다.
“빠··· 빨리 가자.”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급히 제 갈 길을 갔다.
일본어가 흘러나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도망가라는 말이라고 느꼈다.
덕분에 그 자리를 탈출한 커플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여자는 걱정된다는 얼굴로 도망쳐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괜찮을까?”
위태로워보이던 남자.
이중인격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하나의 인격이 다른 인격을 눌러주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을 것이다.
“···신경 끄자. 거기서는 우리가 뭘 도울 방법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의 양심과 합의를 보고, 차를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마음 좀 달래자.”
“응.”
커피포트에 물을 데우고, 커피가루를 2개의 찻잔에 정량을 넣었다.
그리고 데워진 물을 취향에 맞춰서 넣고, 티스푼으로 저었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거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실에는 피칠갑 된 남자, 나리유키 코타로가 꼿꼿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여자가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로 죽어있었다.
입에는 검은 연기가 가득했는데,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쨍그랑.
남자의 손에서 떨어진 유리찻잔이 바닥과 부딪치며 조각조각 깨어졌다.
그리고는 곧장 여자에게 달려갔다.
“레나!”
“나를 보고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흠칫.
남자의 몸이 기계마냥 정지되었다.
고개가 뻣뻣이 돌아갔다.
“도대체···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 별로 없는데?”
히죽 웃으며 말하는 모습은 가히 공포와도 같았다.
“네? 그게 무슨···.”
서걱.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코타로의 오른손에서 춤추고 있는 검은 기운이 첨예하게 변해 남자의 목을 베었기 때문이다.
목을 잃은 신체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피가 분수마냥 솟구침에 코타로가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창밖을 보았다.
“한태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태현과 임지성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부터 찾았다.
알드레드 프레드가 입원해있다는 병실.
극비 보안사항이기에 갓 급의 헌터가 입원해있다는 병원은 태현만 알고 있었다.
그가 병원 안에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발걸음으로 프레드가 있는 병실을 찾았다.
VIP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VVIP병실.
꾸벅.
병실 앞에 대기하고 있던 S급 헌터는 태현의 얼굴을 알아보자 고개를 숙였다.
태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응수하고는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실 안에는 익숙한 두 명의 얼굴이 보였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일전에 한 번 봤던 분들이시군요.”
레오나르도와 릭.
어째서 둘이 여기에 있는지는 뻔했다.
의식을 잃은 프레드를 호위하는 것이다.
“뒤에 계신 분은?”
“제가 있는 길드의 부마스터입니다. 프레드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헌터죠.”
“그게 정말입니까···?”
A급 헌터의 힐링으로도 프레드를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에 S급 힐러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포스에 의해 S급 힐러 2명이 사망했다.
다른 국가의 S급 힐러를 부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여기서 마침 태현이 나타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길을 열어주었다.
‘생각보다 위험하군.’
태현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프레드가 죽은 줄 알았다.
치명상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지성아.”
“알았다.”
S급 힐링을 뛰어넘는 힐링.
축복의 노래.
물론 몸의 일부분만을 회복시키는 것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끄응···.”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의식이 없던 프레드의 입에서 미약하지만, 신음소리가 토해진 것.
태현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붉은 물약 하나를 꺼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성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직접 제조한 성수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가까운 사람에게도 효과를 볼 수는 없습니다.
-병에 들어있는 원액을 전부 섭취하십시오.
현재 킹의 상점에서 회복물약으로는 가장 좋은 아이템이 바로 이 성수였다.
그렇지만, 성수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용도가 아니다.
물론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프레드는 죽음의 문턱에서 멀어졌다.
태현이 붉은 물약의 마개를 열어 프레드의 입에 넣었다.
“마셔.”
꿀럭꿀럭.
곧 죽을 거 같더니, 마시기는 아주 잘 마신다.
“어··· 음···.”
레오나르도와 릭은 말려야하나 고민했지만, 태현의 눈치에 가만히 자리를 지킬 뿐이다.
임지성은 축복의 노래를 마쳤기에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끄응···.”
신음소리가 점점 커졌고, 그것은 이내 편안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레오나르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허··· 정말 나았다.”
분명히 나았다.
겉에 보이던 치명상의 상처들도 순식간에 사라졌고, 프레드의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야, 일어나라.”
태현이 프레드의 볼을 살짝 때렸다.
“으음··· 엇!”
프레드가 정신을 차리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좀 낫냐?”
“···여긴?”
“병원이다. 도대체 누구한테 습격을 받은 거지?”
태현의 말에 프레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리유키 코타로다.”
“역시···.”
예상했던 인물이다.
프레드는 의외라는 얼굴로 태현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나리유키 코타로와는 면식이 있는 모양이지?”
“뭐··· 어떻게 보면 있다고 봐야겠지?”
이걸로 확신했다.
나리유키 코타로는 제로스에게 먹혔다.
그러지 않고서야 프레드의 입에서 나리유키 코타로의 이름이 나올 수 없다.
“정말 위험한 놈이었다. 같은 갓 급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심하다니···.”
분했는지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태현이 의아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녀석이 그렇게 강했나?”
“그래. 나 같은 건, 손 쉽게 끝을 보더군.”
“···그럼 너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로스라면, 프레드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프레드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태현의 질문 때문에?
아니다.
그 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나는 패배했다. 그렇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나리유키 코타로가 이상증세를 보이더군.”
“이상증세?”
끄덕.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런 얼굴로 내게서 사라지더군.”
“사라져?”
“그래.”
“으음···.”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야. 목소리가 바뀌었어. 그리고 ‘당장 내 몸에서 나가’라고 중얼거리더군···.”
“!”
태현이 눈을 부릅떴다.
아직 완벽하게 먹힌 게 아니었나?
‘으음··· 엄청난 정신력이네? 어째서 제로스가 계약 이후로 코타로에게 절반 이상의 힘을 빼앗겼는지 이해가 가.’
그렇다면 아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가?
일단은 코타로를 만나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뭐··· 그렇게 갔다지만,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프레드가 감사를 표했다.
“나한테 그러지 말고, 부마스터에게 인사해. 이 친구 없었으면, 넌 진짜 죽었다.”
태현이 임지성을 가리켰고, 프레드가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저번에는 미안하게 됐어. 내가 너무 경솔했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임지성은 부담스러웠는지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한태현 헌터.”
프레드의 시선이 다시금 태현에게로 향했다.
“왜.”
“어쨌거나 조심해. 그 녀석, 계속 너를 찾더군.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어.”
태현은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대신에 임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식처로 일단 가야겠어.”
“안식처는 갑자기 왜?”
“놈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의견을 나눠봐야 해서.”
“지금 바로?”
끄덕.
태현이 프레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몸 관리 잘해라.”
“···벌써 가나? 놈을 상대하려고?”
“그래. 빨리 족치고, 쉬련다.”
“반드시 승리하길 빌지.”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임지성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헛!?”
“이건 무슨 스킬이지?”
레오나르도와 릭은 놀란 눈으로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훗.”
프레드는 왠지 태현이 이길 것이라고 느꼈다.
확신은 아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