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대응(2)
*각 길드들의 대표가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천태도의 말을 시작으로 서로 인사로 회의를 시작했다.
“파주는 어떻게 됐습니까?”
천검에 큰 타격을 준 파주 사건.
백승한의 물음에 천태도가 쓰게 웃었다.
“타격이 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파주의 사망자.
A급 헌터 20명, B급 이하의 헌터 100명 이상으로 추정.
전부 천검의 길드원이었다.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음···.”
최강식은 천태도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머지 인원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천태도는 그것을 눈치 채고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금 띄우기 위해 최대한 미소를 유지했다.
“자자, 다들 오늘 모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현재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지고 있어요.”
최연화가 운을 뗐다.
“확실히 그렇죠. 정말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망자가 많이 나오지 않는 건··· 역시.”
성수연이 말을 멈췄다.
수많은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얼굴 모를 헌터들.
그러나 그들은 그 헌터들이 누구의 소속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한태현 헌터님이 나서주신 것 맞지요?”
최강식이 한 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태현이 아닌, 임지성이 앉아있었다.
왕국 길드의 대표로 참석한 그는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을 표했다.
“맞을 겁니다. 한태현 헌터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순조로운 결과가 없었을 겁니다.”
임지성의 말이 맞았다.
모두가 고개를 주억였다.
사실상 천검의 피해자는 더 많았어야 정상인데, 갑자기 난입했던 마족들 덕분에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난 것이다.
어쨌거나 천검은 왕국에게 다시금 빚을 지게 되었다.
나머지 길드들도 마찬가지.
“이 자리를 빌어 한태현 헌터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참석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일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태현이다.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한태현 헌터에게 말해두겠습니다.”
각 길드의 대표들이 고개를 주억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제는 중요한 안건에 대해 다룰 차례다.
“네. 그리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변수가 새로 추가되었으니까요.”
“그럼 이전 게이트처럼 일정시간이 지났을 때, 몬스터가 쏟아진다는 이론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건가요?”
길드 대표들이 침음을 흘렸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등장하는 것이 게이트다.
헌터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지구는 몬스터에 의해 잠식되었을 것.
“그건 아닙니다.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어요.”
처음으로 부정한 백승한.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건 제가 가지고 있는 스킬 때문이라 다들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몬스터가 갑자기 쏟아지는 게이트는 다른 게이트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백승한이 가지고 있는 투시(透視).
그가 신궁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스킬 덕분이었다.
물론 태현처럼 강대한 파괴력을 가진 화살을 쏘는 건 불가능했지만, 남들과는 다른 투시능력이 그를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게 만들었다.
“아! 그렇죠. 백승한 헌터의 투시가 있었죠?”
“오!”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지르는 탄성.
백승한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몬스터가 갑가지 쏟아지는 게이트는 약간 붉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색상도 구별이 가능한 겁니까?”
“정확하게는 마력의 띠를 구분할 수 있는 거지요.”
“흠···.”
“지금까지 그런 붉은 마력을 가진 게이트는 처음 봤습니다. 물론 파주나 울산, 밑의 지방에서 발생했던 게이트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서울과 대전에서 발생한 게이트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 두 개의 공통점이 백승한 헌터께서 말씀하신 붉은 마력을 품은 게이트라는 말씀이시죠.”
끄덕.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조금이라도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말씀드린 겁니다.”
“흠··· 그래도 백승한 헌터께서 말씀하신 게 틀린 건, 본 적이 없어서요.”
천태도가 피식 웃었다.
백승한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어느 정도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봐왔었는데, 그 정도도 모를까?
“동의합니다.”
“만약 백 헌터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요.”
나머지 길드 대표들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백승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된다.
그의 투시가 아니라면, 게이트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어요.”
“흐음···.”
“저기 한태현 헌터가 저한테 말 해놓은 게 있긴 합니다만···.”
“네!?”
임지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태현이 남긴 말이란다.
귀담아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희들이 서울을 집중적으로 수호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지역은 한태현 헌터가 직접 맡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지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이번 태현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한태현 헌터는 1만 이상의 소환수를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수하들은 1,000명이 조금 넘지만, 마족들까지 합하면 1만은 가뿐히 넘어간다.
“1만···!”
“헉!”
길드 대표들이 동시에 탄성을 내지른다.
“하긴··· 그 정도 숫자는 됐으니 그런 의견을 꺼낸 것이겠지요.”
채연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에는 이번 일도 태현이 거의 모든 것을 떠안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끄응··· 이렇게 모인 의미가 없군. 결국 짐만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최강식 역시 채연화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머지 길드 대표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굳이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갓 급 헌터가 나서주겠다니 감사히 받아들여야지요. 저희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발목을 잡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백승한이 고개를 주억였다.
“저희가 힘을 합쳐서 서울을 수호하도록 합시다. 제가 투시를 이용해서 게이트를 감시하고, 나머지 분들은 당장 출동할 준비를 마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헌터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건, 피해야 합니다. 정예인원들과 나머지 헌터들은 전국으로 배치해야 되고요.”
태현이 앞서서 상대한다고는 하지만, 게이트에 휩쓸리지 않도록 시민들을 대피하는 것은 헌터의 몫이 될 것이다.
그래야지 소환수가 몬스터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그 계획에 대해 천천히 짜보도록 합시다.”
*새로 생성된 조그마한 게이트.
어린아이의 손바닥 크기의 게이트 안에는 사악한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악한 기운은 정확히 성좌에 앉은 남성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좌 앞에는 한 명의 거구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로 땀을 삐질 흘리고 있다.
“흐음··· 보기 좋게 실패했구나?”
“면목이 없습니다. 벨루아님.”
당장이라도 이마를 바닥에 찧을 것만 같은 태세에 벨루아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됐어. 오히려 잘 되었다.”
벨루아의 입꼬리는 어느새 올라가있었다.
이렇게 즐거움을 느낀 게 얼마만일까?
“벨루아님···? 그러면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입니까?”
거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회? 내가 너에게 기회를 왜 다시 줘야만 하지?”
“그··· 그건···.”
벨루아의 물음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구.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 지어졌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에는 너무도 두려웠다.
“잘 된 건, 오랜만에 괜찮은 놈을 만났기 때문이지, 실수를 눈감아주는 게 아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쿵! 쿵!
거구가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이마에 피가 흘러내림에도 개의치 않았다.
“고개를 들어라.”
벨루아의 음성에 거구가 고개를 들었다.
“네··· 넵!”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일까?
거구가 희망을 품자, 벨루아가 우측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스스슥.
음산한 발걸음에 거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벨루아를 향해 양 손을 비볐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에도 벨루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서걱.
“크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거구의 거대한 몸뚱이가 절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어둠에 가려졌던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임무를 완수했나이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가 묻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래. 네가 볼 땐 어떻지? 밖의 놈 말이야.”
벨루아가 턱짓으로 게이트 밖을 가리켰다.
거구가 움직였던 수많은 몬스터들을 전부 박멸시킨 놈.
“강합니다.”
“그래?”
순수한 답변에 벨루아가 흥미롭다는 눈동자로 단검을 쥔 남성을 보았다.
“네. 놈은 다른 킹들과는 다릅니다. 아예 최고위급 몬스터들을 풀어버려야 합니다.”
“그런가?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르군.”
“하오면?”
“오랜만에 심심풀이를 할 상대를 만났지 않나? 나는 조금 더 즐기고 싶은데.”
“···그 말은 소신이 나서란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야.”
벨루아가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자유입니까?”
남성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굶주리고 있는 늑대와도 같았는데, 그것이 벨루아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죽일 자신은 있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오, 네 입에서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구나? 그만큼 강한 녀석이라는 뜻이겠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태현의 무위를 정확하게 캐치할 수 없었다.
그만큼 강한 상대하는 소리니까.
하지만, 벨루아는 그를 뛰어넘는 강자.
태현의 무위를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저렇게 나온다는 건, 딱 하나였다.
바로 유흥을 즐기는 것.
“큭, 어때? 상대할 수 있겠어?”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말투.
자존심을 살살 긁어대는 저 표정.
알고 있다.
일부러 자신이 태현을 상대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소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남자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따르고 있는 주군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전부 아니다.
그는 그저 싸우고 싶었다.
“좋다. 그러면 다녀오거라.”
“알겠습니다.”
남자는 대답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이번 차원의 킹은 조금은 즐겁게 만들어줬으면 좋겠군.”
벨루아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태현은 길드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늘 헌터관리국 간부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주제가 새로운 게이트의 몬스터인만큼, 태현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가 관리국에 들어서자 국장인 채병국이 대기하고 있었는지 급히 다가왔다.
“헌터님,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태현은 그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예전에 보았던 직원들은 마주칠 때마다 두려운 듯, 허리를 굽혀 인사했는데 왠지 씁쓸했다.
결국에는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건, 여기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기 때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회의실 앞에는 진도윤을 포함한 간부들이 2열로 서 있었다.
태현에게 향하는 예의인 셈이다.
그는 간부들과 악수 한 번씩 주고받은 뒤, 회의실에 입장했다.
그 중에서도 상석.
이번 계획은 태현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 나머지 인원들도 그를 따라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다들 이번 게이트때문에 혼란스러우신 건, 이해합니다.”
채병국이 운을 뗐다.
간부들 역시 익숙한 태도로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한 건, 역시 한태현 헌터님이셨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간부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다행이 게이트는 안정화되었지만, 언제 또 위기가 닥칠지 모릅니다.”
“음···.”
“그리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한국 헌터의 대표인 한태현 헌터님을 모신 것이기도 하지요. 헌터님.”
채병국이 태현을 불렀다.
이제 그가 말할 차례다.
태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귀찮게 서론부터 시작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중요한 사항을 서론이랍시고 포장하는 건 더더욱 사절이고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이번 사태는 절대 중단되지 않을 겁니다.”
“으음···.”
이미 간부들도 알고 있었다.
이번으로 끝날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 심해지겠죠. 몬스터의 등급도 올라갈 테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안은 이겁니다.”
태현이 숨을 한 번 돌렸다.
채병국을 포함한 관리국의 간부들이 일제히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나오는 말이 궁금했으니까.
“저는 서울 일부를 포함한 모든 지역을 도맡아 쏟아지는 몬스터를 박멸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