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이가 대륙(2)
*이틀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안식처에서 자리한 엘프의 숲 너머에서도 사건사고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행동거지들을 똑바로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저기 오는 군.”
태현은 지금 공항 입구 옆 편의시설에서 자리해있었다.
오늘은 중국의 갓 급 헌터 진진과 만남이 있는 날.
진진은 비행기에서 내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을 처음 온 모양인지, 살짝 헤매는 감이 없지 않았다.
‘생각보다 순진한 사람이네.’
대충 보니 진진이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었다.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
갓 급의 품성이라고는 조금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깁니다.”
“아! 안녕하세요!”
진진이 그를 발견하고는 급히 다가왔다.
혹시 알아보기 어려울지도 몰라 진진이 자신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태현이야 뭐··· 애초에 유명 인사였으니 인터넷에 대충 검색만 해봐도 얼굴이 나오니 패스.
“혼자 오셨습니까?”
딱히 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기감으로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진 혼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다른 사람까지 부르는 건, 실례가 아닙니까? 그래서 혼자 왔습니다.”
끄덕.
태현이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있는 사람.
“어···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죠?”
진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사실 한국에 오기 전에 태현이 게이트를 클리어 한 뒤에 나누는 인터뷰를 낱낱이 살폈다.
중국어로 번역되어 만들어지는 기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은 태현이 서론을 길게 이어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인터뷰를 보아도, 본론부터 시작해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이후 잡담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건 태현이 질문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기자들은 태현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캐내려고 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네. 제가 서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아시는 모양이네요?”
사전준비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태현은 그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본래 첫인상은 한 번 박히면, 지우기가 쉽지 않은 법.
진진은 그 부분에선 합격점이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기사들을 찾아보다보니···.”
“흠,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요? 그러고 보니 아직이네요···.”
기내식을 먹긴 했지만, 3시간 전에 먹은 것이 전부였다.
배를 만져보니 확실히 공복이 느껴졌다.
“그럼 식사부터 하러 가시죠? 음식 가리는 건 있으신지?”
만약 진진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면, 서로 용건을 마치는데 초점을 맞췄으리라.
“저 가리는 거 없습니다. 한 헌터님이 좋아하시는 곳으로 가시죠!”
“그럼 바로 갑시다.”
그가 향할 곳은 고급 한식당.
예전에 진도윤과 함께 그곳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맛이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접대용으로는 나쁘지 않겠지.
가리는 게 없다고 했으니 분명 입맛에 맞으리라.
*나이가 대륙.
바이아드 공작가 베른 마을.
마을의 광장에는 기사와 마법사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중심은 렌과 발락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 해골이···.”
“해골이 아니라 발락이라는 이름이 있다!”
“···어쨌거나 정말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그딴 저급한 흑마법사 따위가 아니야!”
위대한 네크로맨서다!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렌이 황급하게 발락의 입을 봉인했다.
“음··· 그래도 이 부분은 바이아드 공작님께 보고를 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나? 그러면 우리들이 곤란해지는데.”
“어째서입니까?”
“우리는 이 세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구경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지금 곧장 사라지도록 하겠네.”
“···죄송합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에 의문이 들긴 했지만, 성기사인 렌의 말이기에 일단은 믿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렌과 발락은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사라지려고 했고, 길을 막고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황급히 길을 비켜주었다.
“발락··· 돌아가면 주군께 보고하겠어.”
“···진짜 그러지 마라. 나한테 왜 그러냐?”
“왜 그러냐니? 내가 아니었으면, 넌 분명 저 자들을 죽였을 거야. 내 말이 틀리나?”
“끙···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기에는 스켈레톤을 소환하려던 자세가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그냥 넘어갈래?”
“흐음··· 그러면 돌아가서 스켈레톤 1마리에게 신성력을 실험 해봐도 되겠나?”
“되겠냐!”
네크로맨서와 성기사는 상극이다.
서로 친한 것도 태현의 수하이기 때문.
원래라면 적의를 가져야 정상이다.
“으아아악!”
순간, 저 멀리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렌과 발락,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비명이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는 마차가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몬스터로군···.”
“흐음··· 주군의 말씀대로 놈이 여기를 노린다는 게 사실이었어.”
몬스터가 마차를 바짝 쫓고 있었다.
“제··· 젠장! 조금 평화롭나 싶더니··· 이게 뭐냐!”
“다른 마을에는 같은 피해가 없다고 하나? 빨리 바이아드 공작님께 보고를!”
기사와 마법사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증거.
프로세스 자체가 미흡하게나마 만들어진 듯하다.
“빨리 처리하지. A급 정도야 우습지.”
“동감. 이번에는 양보하지.”
“고맙군.”
반면, 렌과 발락은 평온했다.
지금 마차를 쫓는 몬스터는 기껏해야 A급이 조금 안 되어 보인다.
애들 장난하듯이 상대할 수준의 몬스터라는 것이다.
스르륵.
렌이 검을 빼들었다.
그의 검에서 신성력이 검기를 이루었다.
8성으로 승급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된, 엑스칼리버.
그는 몬스터를 향해 사선으로 그어버렸다.
다른 이들 눈에는 먼 거리에서 허공을 베는 칼춤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검에 서린 첨예한 신성력이 몬스터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콰직!
서걱!
“꾸웨엑!”
“꾸웨엑!”
신성력은 몬스터들의 시체를 사정없이 베어냈다.
예리한 칼날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들었다.
“···마스터다!”
“성기사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다니!”
기사들은 어느새 보고하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렌의 신성력을 주시했다.
어떻게 신성력을 저렇게까지 다룰 수 있는 거지?
상식 밖의 일에 얼이 빠졌다.
“흐음, 꽤 쓸 만한 스킬이군. 그래봤자 나한테는 안 돼.”
발락은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도대체 어느정도 실력자길래 저게 아무렇지 않다는 거지?
렌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목숨을 걸고 발락을 처리하려고 했을 것이다.
‘휴··· 살았다.’
‘덤볐다간 목숨이 날아갈 뻔 했어.’
가슴이 철렁했다.
온 몸이 싸한 것이 느껴졌다.
콰직!
때마침 마지막 남은 몬스터가 절명했다.
그제야 렌은 검을 도로 집어넣고,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보스 몬스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끝이 아니로군.”
발락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저··· 혹시 저 괴물의 정체를 아시는 겁니까?”
기사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뭐야? 지금까지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그것도 몰랐나?”
발락은 놀란 눈으로 기사를 보았다.
그러면 지금까지 몬스터라는 것도 모르고, 상대해왔다는 건가?
기본적인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군.
“예··· 저희들은 잘 모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맨 입으로?”
“네?”
“이 귀중한 정보를 맨 입으로 알려줘야 하냔 말이야. 엉?”
“그건···.”
사람 좀 살리는 셈으로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렌도 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어느새 다가와서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발락, 그냥 알려주는 게 어떤가?”
“너는 내 마음 좀 이해해줘.”
“뭐?”
“해골이라는 이유로 멸시받는 거 봤잖아? 그런데도 나는 베풀기만 해야 하나?”
“······.”
“나도 사람이다! 상처받는단 말이다!”
해골이잖아!
기사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인가?
“으음··· 그러면 바이아드 공작님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성기사님이 몬스터를 처리 해주셨으니까요.”
“나는?”
발락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기사는 말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너는 가만히 있었잖아.”
“···젠장! 역시 내가 처리했어야 돼! 괜히 양보를 해가지고는.”
절규하는 발락을 뒤로하고, 렌은 이 사실을 다른 수하들에게 전달했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위치, 그리고 상대했던 몬스터.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해서 레온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럼 가지. 이야기가 길어질 거야.”
“알겠습니다!”
*헌터 공용 수련장.
VIP룸.
이 곳 VIP룸에는 태현과 진진이 있었다.
다른 인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미리 VIP룸을 빌려 다른 사람들이 사용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얼마 되지 않는 갓 급 2명이 사용한다고 했으니 허가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면적이 너무 넓어 1,000명의 인원이 수련을 한다 하더라도 공간의 여유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심지어 다른 기구들은 전혀 없었다.
그저 바닥에 깔린 마룻바닥이 전부다.
헌터들이 수련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의미.
이 넓은 공간에서 태현과 진진만이 서 있었으니 주위가 휑한 것도 당연하다.
“먼저 제 요구에 응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진진이 포권을 취했다.
“괜찮아요. 안 그래도 갓 급의 소환사는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었으니까.”
피식 웃으며 말하는 태현의 모습에 진진도 따라 웃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주셔야죠. 제 조건이었는데.”
그 말과 함께 태현의 수하 중, 아론이 소환되었다.
8성 궁수.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게 있었는데.
“헉! 주군!”
“너 이 새끼···.”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피규어였다.
그것도 옷을 골라서 입힐 수 있는···.
“이··· 이건··· 오··· 오해이십니다.”
“내놔. 부셔 버릴라니까.”
“으으··· 제발 살려 주십시오··· 키린만큼은···.”
“···미x. 키린? 키린~? 돌았냐?”
“아··· 아닙니다!”
최근에 가만히 냅뒀더니 더 심각해졌다.
아무리 취향이라지만, 비무에 앞서 이런 꼴을 보여주니 자신이 다 창피했다.
“저··· 한 헌터님··· 이건 무슨?”
진진도 당황한 눈으로 피규어를 응시했다.
뭔 놈의 소환수가 저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아닙니다.”
“네···?”
“제가 시킨 거 아니라고요.”
“아··· 넵!”
대답을 하긴 했지만,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좀 자중해라.”
“노력하겠습니다.”
아론이 급히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키린이라고 불리는 피규어는 손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빼앗아 부수려던 태현은 가까스로 화를 참아냈다.
어찌 되었든 저건 아론이 아끼는 물건.
“괜히 너를 불렀어.”
맛보기로 궁수를 소환한 것인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은.
“죄송합니다.”
“됐어. 어쨌든 그거 두고, 다시 나와. 앞에 보이지? 저 사람이 소환하는 소환수를 상대할 거니까.”
“네!”
아론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생각 외로 강한 기운에 진진의 놀란 눈이 되었다.
‘저런 변태 궁수가 S급 중후반의 힘을? 대단하구나.’
저런 궁수도 S급 중후반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태현의 능력은 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진진은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소환.
그의 명령에 3명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소환수를 부리시는군요.”
흑마를 타고, 장창을 들어 위용을 과시하는 모습.
그것도 3명.
“하하··· 그래도 제 소환수중에서는 가장 강한 녀석들입니다.”
진진의 말대로 그가 소환한 기사 3명은 S급 초반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꽤 놀라운데?’
진심으로 놀랐다.
갓 급 헌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S급 초반의 기사를 3명이나 소환하다니.
그렇지만 가장 놀라운 사실은 기사의 용모가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에일린의 병사와 흡사하다.’
에일린의 성에서 보았던 병사와 용모가 매우 흡사했다.
물론 성의 병사들은 너무 약했지만 말이다.
“흐음··· 1명 더 소환을 해야겠네요.”
아론 혼자서는 조금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번에는 레온까지 같이 소환했다.
어느새 피규어를 정리하고, 궁을 들어 상대를 겨냥한 아론 옆에 레온이 섰다.
“허··· 역시 한 헌터님이시군요.”
진진은 이미 승부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
그는 망설임 없이 태현의 수하들을 공격하라 지시했다.
기사들은 그 명령에 레온과 아론에게로 돌진했고, 진진 역시 몸을 움직였다.
노리는 것은 태현.
‘소환능력은 내가 진다. 하지만, 신체 능력치라면!’
소환사다보니까 신체 능력치가 남들보다 우월했다.
그리고 태현의 소환능력으로 보아 소환쪽에 치중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어느새 손에 들린 장창이 태현의 심장부를 찔러 들어갔다.
카앙!
하지만, 몸에 닿기는커녕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장창이 밀려났다.
“뭐지···? 분명 들어갔는데···.”
“흐음, 소환능력만 따져보자고 했는데, 진심으로 죽이실 생각이셨나요?”
어느새 태현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첫인상이 좋아 잘 대해줬는데, 비무랍시고 심장을 노려?
“그··· 모든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셔서···.”
진진이 우물쭈물거렸다.
“그래요? 뭐, 좋습니다. 대신 그만한 목숨을 노린 대가를 치르셔야할 겁니다.”
“네···? 커헉!”
우드득!
진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태현의 주먹이 진진의 복부를 강타했으니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태현의 주먹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진진의 비명이 VIP룸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