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조건 충족(2)
*바이아드 공작 저택.
접견실에서 차를 즐기던 렌이 불현 찻잔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쨍그랑!
“성기사님!”
유리찻잔이 깨지자, 바이아드 공작이 당황했다.
그가 급히 시녀를 불러 찻잔을 치우라 명령을 내렸다.
반면, 렌은 씁쓸한 얼굴로 발락을 보았다.
“···발락.”
“어··· 주군께서 당하셨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발락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느새 그들의 몸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모습에 바이아드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성기사님! 해골님!”
“젠장··· 해골 아니라니까? 어쨌거나 몬스터는 우리들이 처리할 수는 없을 거 같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간이 다 됐어. 그만 가 봐야 돼.”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몬스터를 누가 처리하라고?
바이아드 공작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렌과 발락은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나머지는 너희들 힘으로 처리해라.”
“분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군이 없는 이상, 더 이상 세상의 미련 따윈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태현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자신들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돌아가서도 주군을 따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오랜만에 생각이 맞네?”
“하하.”
팟!
그 대화를 끝으로 렌과 발락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던 바이아드 공작은 정신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갑자기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태현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에는 괴상한 건물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탑의 주위로는 어둠이 가득했고,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을 제외한 다른 땅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직진만 하도록 만들어진 길.
괜히 옆으로 갔다가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 떨어진다.
‘후우··· 두렵군.’
태현이 다시금 건물을 보았다.
3층은 되어 보이는 높이.
그가 손을 들어 쥐락펴락했다.
느낌이 있었다.
죽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느낌이.
“주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하들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자신들의 수하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
“너희들··· 여기는 어떻게 왔냐?”
레온, 발락, 이안, 렌.
총 4명이 자리해있었다.
“주군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희들도 지금 있던 세계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 여기 왔냐는 소리다.”
그는 죽었다.
킹이 죽었으니 수하들도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라질 걸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을 뜨니까 주군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 나머지는 어디 갔지?”
4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레온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들 빼고는 완전히 소멸한 듯싶습니다.”
“···후우.”
화가 났다.
발악조차 해보지 못하고, 벨루아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자신을 포함한 수하들의 죽음.
그리고 이후에 있어질 지구의 종말.
‘열심히 강해지려고 노력했는데.’
노력한 결과가 지금 이것이다.
‘아니지··· 그런데 어째서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던 거지?’
좌절할 때가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죽고 난 뒤에 조건을 충족했다고?
그 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은 진입해서 비밀을 푸는 것이 최선의 선택.
이 4명이 어째서 자신의 뒤를 따라올 수 있었는지도 나중에 가면 풀리지 않을까?
“일단 탑에 진입한다.”
“알겠습니다!”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수하들의 모습에 태현이 볼을 긁적였다.
미안한 감정이 크게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올 생각이냐?”
“주군을 섬기는 것이 저희들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알겠다.”
태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탑의 성문으로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다.
끼익.
성문에 다다르자,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음침한 소리와 함께 어둠이 펼쳐진다.
들어가기 꺼려질 정도.
하지만, 태현의 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걷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렇게 안으로 진입하자,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을 반겼다.
“음··· 많이 어둡습니다.”
“제가 불빛을 밝히겠습니다.”
렌이었다.
성기사지만, 신성력을 통해 간단한 마법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불을 밝히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주위가 환해지자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낡은 오두막.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낡은 소리.
태현의 시선은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였다.
인테리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책상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서들과 약물들이 가득했는데, 연구나 실험을 하던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정면 끝에는 낡고 허름한 문이 보였다.
누군가 여기서 지내고 있던 모양.
“여··· 여기는···.”
처음으로 발락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여기가 어딘데?”
태현이 그를 보며 물었다.
“그···.”
끼이익-
발락이 무언가 말하려던 그 때, 낡은 문이 소음과 함께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응···? 저건?”
태현의 눈이 가늘어졌고, 발락을 제외한 나머지 수하들이 전부 발락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국 헌터관리국은 초토화됐다.
“이··· 이게 무슨···.”
헌터들이 수련할 수 있는 곳에서도 VIP룸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단검이 꽂힌 채로 사람이 죽었다는 제보.
혹시나 싶어 진도윤이 방문해서 죽은 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름 아닌 한태현.
대한민국의 갓 급 헌터인 그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었다.
“으흐흑···.”
“끄윽···.”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왕국 길드원들.
특히 S급 헌터인 장 쌍둥이는 그 자리에 쓰러져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임지성 역시 참담한 얼굴로 태현 앞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쩌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최강의 헌터가 이렇게 가버리다니.
“···일단 시신을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왕국 길드에게 알린 것이 바로 진도윤이었다.
그는 밑의 부마스터인 임지성에게 태현의 시신을 옮길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임지성의 싸늘한 얼굴이 수련장 관리인에게로 향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발생했죠?”
“그··· 한태현 헌터님은 진진 헌터님과 같이 비무를 하시겠다고 올라가신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확실하게는···.”
“진진···?”
진진이라면 중국의 갓 급 헌터.
분명 태현과 연락을 하고 싶다고 관리국을 통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설마 진진과 만났다는 건가?
“그 범인은 어디로 갔죠!?”
“빨리 말해요! 죽여 버리기 전에···.”
장 쌍둥이가 관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말해주세요. 피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그것이···.”
관리인이 우물쭈물거렸다.
“빨리!”
임지성이 소리쳤고, 그제야 관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정문과 뒷문 CCTV를 확인해보십시오··· 진진 헌터님은 들어가신 이후로 아예 보이질 않았습니다.”
VIP룸에서는 창문이 없다.
즉, 정문과 뒷문을 통해서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소리.
건물을 부수고 나갔다고 보기에는 너무 깔끔했다.
심지어 VIP실에는 CCTV도 없기 때문에 정문과 뒷문을 확인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바로 갑시다···.”
일단은 확인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확인해야한다.
임지성이 곧장 움직였다.
나머지 길드원들도 움직이려고 하자, 그가 태현을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눈 좀 떠봐요··· 이대로 가는 게 어딨어···.”
태현의 얼굴을 끌어안은 채로 흐느끼는 장은희의 모습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관리인과 함께 진도윤, 임지성이 CCTV실로 향했다.
*“네가 왜 저기 있냐?”
태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발락.
의자에 도로 앉아 문서들을 훑는 모습으로 보아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건 아무래도 제 과거인 모양입니다.”
“과거? 너 과거에도 해골이었냐?”
“주군까지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태현이 다시금 과거의 발락을 보았다.
불안한지 이빨을 맞부딪치며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너, 과거가 전부 기억나냐?”
자신의 수하들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각자 인격이 존재했다.
그러니 과거가 있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발락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행동하던 모습들도 드물게나마 기억이 남았을 뿐입니다.”
“흐음···.”
“이것도 8성의 경지에 올라오면서 기억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기억조차 없었지요.”
“그게 정말이냐?”
태현이 수하들을 바라보자, 그들 역시 고개를 주억였다.
다들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다는 소리.
“아아악!”
그 때, 자리에 앉아있는 과거의 발락이 머리를 쥐어짜며 소리를 빽 질렀다.
괴로웠는지 그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지?”
“···아마 지금 이 모습으로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분노일 겁니다.”
“분노?”
발락이 고개를 주억였다.
“네. 조금 남아있는 기억에 따르면, 저는 흑마법을 동경했습니다. 결국 저는 금기시되는 소환마법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
“그 부작용이 바로 이겁니다.”
발락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군. 그냥 해골이 된 건 아니라는 거구나.”
“네. 소환수를 다루려면 그에 따른 흑마력이 필요합니다. 일반 사람의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육체를 만들려고 했다가 실패해서 스켈레톤 그 자체가 되었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네크로맨서가 되었지만, 후회가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아마 지금 저 모습이 부작용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일 겁니다.”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과거의 발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가자.”
여기서 더 얻을 건, 없어 보인다.
<네크로맨서 : 발락이 기억의 일부분을 회복합니다.>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뒤를 돌아보니 발락의 몸에서 잠깐의 빛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주··· 주군! 기억이 조금 더 뚜렷해졌습니다!”
발락은 당황했는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래. 나도 알아. 계속 진입하자.”
이게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진입하는 것이 우선이다.
분명 벨루아는 일주일 뒤에 지구를 완전히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그것을 막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제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척!
하지만, 태현을 막는 이가 존재했다.
그는 바로 과거의 발락.
“여기는 지나갈 수 없다.”
“뭐지?”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설마··· 발락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나타난 것인가?’
어쨌거나 여기를 통과하려면, 과거의 발락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
“죽어라!”
발락이 짙은 살기를 내비치며, 태현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태현은 시시하다는 듯, 발락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고스트 스톰을 사용해서 그의 뼈를 아예 가루로 만들었다.
“가자.”
단 5초도 걸리지 않았다.
태현은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주군! 정말 너무하십니다!”
뒤에서 발락의 절규가 울려 퍼졌으나 대충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