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하늘 위의 하늘(1)
*태현은 오랜만에 옥천으로 향했다.
게이트 사태가 종료된 지 일주일 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신기하네요. 설마 한 헌터님도 여기를 오실 줄은 몰랐어요.”
채연화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붙였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죠.”
태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늘은 가족의 기일.
이 날에 그를 제외한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죠.”
그녀의 옆에 있는 채민희는 태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채연화를 살짝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눈치 없이 끼어든 모양.
‘이거 참···.’
태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오감은 이미 그녀가 특정행동을 취하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했다.
“너무 그러지 마. 오랜만에 엄마 만나러 온 거잖니.”
채연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결국 채민희는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조용히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괜찮아.”
태현은 그런 그녀들의 대화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걸음을 빨리 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익숙한 태도로 몸을 돌려 묘지를 지나쳐 들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예전부터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거리감각을 진즉에 깨우쳤다.
그 증거로 그의 앞에 있는 묘지는 가족들의 이름이 아로새겨져있다.
“요즘엔 1년에 한 번 오는 것도 힘드네.”
피식 웃으며 절을 2번 올리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비닐에 담긴 술과 술잔을 꺼냈다.
항상 오자마자 하는 첫 번째 일이다.
“이해 좀 해 주세요. 바쁘게 살다 보니까 소홀해지네요.”
몬스터 소탕, 길드, 퀘스트, 성장 등등 매일같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물론 성묘에 소홀한 것도 있었기 때문에 전부 허울 좋은 변명일 뿐이지만.
그런데 왜일까?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거라.
-무리는 하지 마라. 걱정된다.
-힘내. 망할 형님아.
가족들이 한마디씩 건네는 느낌이다.
태현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아주 떵떵거리며 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복수가 완전히 끝이 나야겠지만 말이다.
태현은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좋은 이야기만 이어나갔다.
옛 친구와 길드를 키운 일.
새로 들어온 길드원들에 관해서.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까지.
나이가 대륙이라는 다른 차원에 대해서도 가볍게 이야기했다.
안 좋은 이야기들은 쏙 빼놓고 말이다.
“그만 가볼게요.”
30분 정도 쉬지 않고 말했더니 더 이상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태현은 그만 쉬라는 말과 함께.
‘끝났나?’
고개를 돌려 채연화 쪽을 보았는데, 언제 끝냈는지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태현은 볼을 긁적이고는 그녀들이 있는 입구로 돌아갔다.
“그만 돌아가 볼까요?”
끄덕.
그녀들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둘의 눈이 부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눈물을 흘렸던 모양이다.
태현은 그런 그녀들을 배려해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3명은 근처 카페로 향했다.
“잠시 화장실 다녀올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도 하기 전에 채민희가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다녀와.”
채연화는 그런 그녀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뭐 드실래요?”
커피는 태현이 사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주문은 민희 오면 할게요.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뭡니까?”
“혹시 민희 좋아해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태현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좋아하냐는 질문.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궁금해서요.”
“그런 걸 묻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태현은 그녀의 질문을 간단히 일축했다.
제 3자의 입장에 서서 질문을 건넨다는 것 자체가 태현의 입장에서는 조금 불쾌했다.
“죄송해요. 그래도 꼭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민희는 이런 부분에서는 너무 답답하거든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태현은 좋게 넘어가자는 생각과 함께 질문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래서 친해지기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기일이 겹치면서 동질감을 느꼈고, 마그마 골렘에서 멀어졌던 거리가 조금 좁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걸 연애의 감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솔직한 걸 원하십니까?”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그러자 채연화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이미 대답은 나온 거 같네요. 괜한 참견을 해서 죄송합니다.”
“네.”
‘눈치가 빠르네.’
고민하는 것이 티가 난 모양이다.
사실 고개를 저으며 No를 말할 생각이었다.
채민희는 단순히 친구 같은 존재에 가깝다고 봐야하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바로 주문했다.
간단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3잔.
“어머, 저는 뭐 먹고 싶은지 아직 말 안 했는데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니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그냥 드십시오.”
“네~”
왠지 피곤하다.
한숨으로 피곤함을 한 번 털어내자,
“아이스 아메리카노 3잔 나왔습니다.”
아메리카노가 준비됐다.
“감사합니다.”
태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3잔을 받아들고 채연화와 함께 구석에 있는 자리로 향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자리에 앉으니 채민희 역시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시작으로 2시간에 걸쳐 긴 대화를 나누었다.
*채연화와의 가벼운 헤프닝이 끝나고, 태현은 헌터관리국으로 향했다.
“헌터님! 어서 오십시오!”
지금은 태현에 대한 예우가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관리국에 그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
“한태현 헌터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문에서 태현을 기다리고 있던 진도윤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진진 헌터는 아직 여기 있습니까?”
“네. 아직 헌터님과의 볼 일이 남았다고 하더군요.”
진도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왕국에 신세질 수 없다고, 나가더니 관리국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지내는 것일 테니 넘어가기로 하고.
“뭐, 그 부분은 넘어가고요. 이번 게이트 사태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회의를 진행한다고요?”
“네.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갓 급의 헌터들은 전부 참여를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흠··· 다른 인원들도 알고 있습니까?”
“네. 진진 헌터와 팡 린 헌터에게도 직접 전달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게이트 사태에 대해 대응방침에 대한 국제헌터회의.
그리고 그 자리에는 사망한 나리유키 코타로를 제외한 5명의 갓 급 헌터가 필히 참석해주길 바라고 있다.
“헌터님··· 참여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 회의가 한국에서 열린다고요?”
“네. 맞습니다.”
한국에서 회의를 한다.
이건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의 S급 이상의 헌터들과 관리국의 대표들이 모이는 장소를 한국으로 지정했으니 말이다.
물론 갓 급 헌터인 진진, 프레드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기도 했다.
이번 사태를 종식한 데에는 태현의 공이 가장 컸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번 논의는 앞으로의 대응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현에 대한 호기심이 겹쳐졌다고 할 수 있다.
‘흐음··· 국제헌터회의라.’
사실상 회의할 필요성을 크게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는 있겠지.
얼추 납득이 되는 회의라고 볼 수 있다.
“알겠습니다. 참석하죠.”
“정말 감사드립니다!”
진도윤이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내심 그가 참여를 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는데, 그것이 말끔히 씻어졌기 때문이다.
“감사까지야··· 국장님은 안에 계시지요?”
“네. 안에 계십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국제헌터회의 말고도 오늘은 관리국에 용무가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다.
태현은 곧장 발걸음을 놀렸고, 진도윤이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런데 태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진도윤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갓 급 헌터에 대한 예우가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네? 아···.”
진도윤은 금새 이해했다.
일부 관리국 직원들이 태현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일전에 무시했던 것 때문에 아직까지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다.
물론 대부분의 직원들이 깍듯했지만, 태현은 그 소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제대로 예의를 갖춘다고 하던데··· 제가 너무 예민했나요? 하하.”
“아닙니다. 제가 헌터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심기가 거슬릴 것입니다.”
“뭐··· 굳이 한 소리 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괜히 여기서 크게 떠들겠습니까?”
여기는 관리국 1층 로비다.
진도윤 뿐만이 아닌, 대다수의 직원들이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계속 무서워하니까 짜증난단 말이지. 내가 뭐 죄 지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태현은 그런 이들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겼다.
진도윤까지 들어왔고, 엘리베이터는 6층을 향해 올라갔다.
6층에는 채병국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태현을 기다리고 있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태현이 등장하자 허리를 굽혀 자동으로 인사했다.
“헌터님 오랜만입니다.”
“국장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걱정해주신 덕분에 편안히 잘 지냈습니다.”
“다행이군요.”
태현이 고개를 주억였다.
갓 급답게 채병국도 그를 극진히 대접할 수밖에 없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그러죠.”
오늘 관리국에 방문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태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그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채병국을 포함한 간부들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켜진다.
“게이트를 말씀이십니까···?”
“네. 가능하면, 제가 부리는 소환수가 게이트 독점 여부에 관계없이 출입이 가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음···.”
간부들은 각기 침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곧바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현재 관리국, 길드의 체제로 돌아가면서 서로 게이트를 클리어 하면서 자원을 마련한다.
태현의 말은 그 자원들을 전부 독차지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진도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헌터님이 부리시는 소환수가 자유롭게 출입하면 나머지 길드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는 태현에게 의견을 물었다.
게이트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달라고 했지, 다른 말은 아직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원은 각 길드에게 정당하게 배분하겠습니다.”
“배분이라고요?”
“네.”
수하들 10성으로 승급하면서 모두 갓 급을 넘어섰다.
그러니 혼자서 S~A급 게이트정도야 클리어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길드원들이 목숨을 걸면서 레이드를 뛰기보다도 그의 수하들이 빠르게 게이트 숫자를 줄여나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헌터들이 게이트 안에서 목숨을 잃을 일도 적어지겠죠?”
매일같이 게이트 안에서 죽어나가는 헌터들이 50명가량 된다.
이들 모두 가족이 있을 것이고, 각자 하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돈을 좀 벌자고 목숨을 걸며 레이드를 뛰는 저(底)등급 각성자들.
태현은 그런 이들에게서 더 이상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특히나 벨루아가 사라지고, 게이트의 증가량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더더욱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음··· 하지만, 다른 길드가 그걸 따라줄까요?”
채병국이 조심스레 말했다.
다른 길드가 허가할까?
하지만 태현의 생각은 달랐다.
“따라주지 않으면 힘으로 굴복시키는 수밖에요? 만에 하나 이게 거절이 되어서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잠시 말을 끊었다.
간부들이 침을 삼키며 태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 절대로 나서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든, 자연이 파괴되든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
간부들의 눈이 커졌다.
갑은 태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것이다.
“전 여기가 아니더라도 지낼 곳은 많거든요.”
사실이다.
가오스의 능력으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제는 가능하다.
그러니 이렇게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그래도 게이트의 총 책임자가 관리국 아닙니까? 그래서 관리국을 먼저 찾아온 겁니다. 부디 길드들의 허가가 떨어지면 좋겠군요.”
“······.”
“이만 가보겠습니다.”
태현은 할 말을 마치고, 안식처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간부들이 침음을 흘렸다.
그의 제안은 확실히 달콤하다.
그러나 그 달콤한 제안을 길드들이 받아 들이냐가 관건.
“후우··· 일단은 한 헌터님의 말씀대로 해보도록 합시다.”
“진 부장!”
“허어···.”
망설임 없이 동의하는 이는 진도윤이다.
간부들은 그의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분노했다.
“그럼 한 헌터에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이 제안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말입니다.”
몇몇 간부들은 전부 중형 길드들과 손을 잡아 게이트를 먼저 선독점할 수 있도록 암묵적으로 돕는다.
그리고 일정한 분량의 몫을 챙기며 호의호식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태현의 제안을 곱게 볼 수 없는 것.
진도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현의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그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국장님, 이 부분은 동의하셔야합니다. 한 헌터님의 말씀대로 게이트의 숫자를 줄이면서 헌터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저희의 목표 아닙니까?”
“음···.”
확신에 찬 진도윤의 단단한 음성에 채병국이 턱을 어루만졌다.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나도 동의하네.”
“국장님!”
“잘 생각해주십시오!”
“그만!”
간부들의 반발에 채병국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
그의 저지에 간부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결정한 사안이야. 이 부분은 내가 길드 대표들에게 전달하지.”
“감사합니다!”
진도윤과 소수 간부들은 그 결정에 기뻐했고, 몰래 빼먹는 간부들은 뒤틀리는 얼굴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