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게이트의 정체(4)
*[지하 21계층 수호자를 처치하셨습니다. 지하 22층 입구의 결계가 해제됩니다.]
태현은 부서진 석상의 파편들을 발로 치우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마저 가죠.”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갓 급 헌터들이 고개를 힘차게 주억였다.
막상 발목을 붙잡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걸림돌이 없어 발목을 잡을 일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물론 태현이 등장하는 수호자들을 농락하다시피 처리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에 심취할 뿐이다.
‘괴물이야··· 진짜 괴물이야.’
조용히 지켜보던 알리나는 지난 일을 떠올리며 사색이 되었다.
그가 S급 이상의 게이트를 독점한다고 했을 때, 다 같이 힘을 모아 처리하기를 내심 바랐다.
그러나 그의 힘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생각들이 바뀌었다.
태현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이 아닌 최선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이다.
“멍하니 서서 뭐하십니까?”
태현의 부름에 알리나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자세히 보니 자신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급히 갓 급 헌터들의 옆에 섰다.
“너무 강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죠?”
진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알리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야.”
팡 린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어디 내놓아도 갓 급은 국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태현의 앞에서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는 어린아이로 비춰지니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인정합니다. 태현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났어요.”
프레드가 동조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태현이 걸음을 멈췄다.
“뒷담을 까려면 안 들리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알리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안 잡아먹어요.”
진진이나 팡 린, 프레드 모두 멀쩡한데 왜 알리나 혼자 자신을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회의 때 있었던 일 때문일까?
그거라면 납득이 간다.
그녀의 발언 때문에 혈압이 오르던 걸 겨우 억눌렀으니까.
“설마 회의 때 일 때문인가요?”
“······.”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다.
태현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런 거 안 따집니다. 레이드 중엔 잡생각을 안 하는 편이라서요. 마음 담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는 태현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까 말이다.
만약 그녀의 발언으로 인해 자신이 내건 의견이 묵살되었다면 결과가 달랐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제 내려가죠.”
태현이 먼저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뒤이어 갓 급 헌터들이 따라온다.
결계가 해제되었기에 계단 아래에 있는 검은 문은 쉽게 열렸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새로운 환경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건··· 방?”
태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지하 1계층부터 시작해서 21계층까지는 광활한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 공통점이었는데, 지하 22계층은 완전히 달랐다.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하나의 작은 방.
인형을 좋아하는 것인지 수많은 인형들이 인테리어랍시고 도배되어 있었고, 벽에는 메시지가 적혀있는 액자들이 무수하게 걸려있었다.
“신기하네요. 지하 22계층이 왜 사람이 사용하는 방으로 꾸며져 있는 거지?”
팡 린이 신기한 듯 물었다.
아기자기한 인형부터 사람 하나정도는 가뿐히 능가할 크기의 인형까지.
“예쁘네요···.”
알리나 역시 이번 방은 마음에 드는 눈치다.
물론 진진과 프레드는 지금 이 계층의 수호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지만.
“이정도 크기면 100평 조금 안 되는 크기인데··· 이런 공간에 수호자가 있다고?”
모든 수호자들은 하나의 거대한 석상이었다.
물론 몬스터를 부리면서 그를 방해하는 석상도 존재했지만, 대거 홀몸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홀몸인 수호자가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어, 이거 좀 보세요.”
태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팡 린이 하나의 쪽지를 들고 그에게로 가져왔다.
“이게 뭐죠?”
“글쎄요? 읽지도 않고 가져왔는데.”
그녀가 쪽지를 건네자 태현은 쪽지를 빠르게 열었다.
[사방신]
-동아시아에서 유래된 사신(四神)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칭한다.
청룡의 방위는 동쪽, 계절은 봄을 뜻한다.
백호의 방위는 서쪽, 계절은 가을을 뜻한다.
주작의 방위는 남쪽, 계절은 여름을 뜻한다.
현무의 방위는 북쪽, 계절은 겨울을 뜻한다.
“이게 갑자기 무슨···.”
태현이 미간을 좁혔다.
난데없이 사방신이라니?
너무 뜬금없는 메시지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읽어보자.”
뒤늦게 쪽지를 확인한 프레드가 그의 손에서 쪽지를 가져왔다.
진진도 그의 옆에 서서 쪽지를 확인했고, 그들도 할 말을 잃었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 방은 수수께끼로 가득한 모양인데요?”
진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반대편에 있는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각 사방신을 그린 그림이 액자로 만들어져 붙어있었다.
[지하 22계층에는 총 5개의 결계가 있습니다.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각각 해제할 조건을 갖추셔야 합니다.]
“결계가 5개라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단순히 수호자를 잡아내는 게 아니라는 건가?’
생각해보면 이 쪽지가 괜히 나온 건 아닐 것이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애초에 이런 인테리어에도 이질감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팡 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 다행이라는 말이 나와?
진진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는데··· 다행은 아니지.”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드디어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어서.”
계속 구경만 했다.
그러니 지금 같은 경우는 머리를 사용하는 일이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 왜요?”
팡 린이 불만이 서린 눈으로 태현을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신괴를 다시금 꺼내 들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귀찮게 이런 걸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저는 제 방식대로 갑니다.”
부순다.
그것도 전부.
애초에 결계를 하나씩 해제하고 내려간 이유도 수호자들을 처리하기만 하면 알아서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태현은 신괴를 들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가 신괴를 휘두를 때마다 벽들이 무너져 내렸다.
“태현!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고!”
프레드가 만류했지만, 그의 행동은 멈출 줄 몰랐다.
“천장 무너지는 걸로 다칠 리가 없잖아?”
그저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건넬 뿐이다.
모두 갓 급이다.
천장이 무너지는 걸로 피해를 받을 수가 없다.
일개 헌터들도 이 정도로는 무사할 터.
쾅!
쾅!
벽들이 무너지고, 태현의 파워를 감당하지 못한 결계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오, 확실히 쪽지가 단서였네.’
벽들이 무너지면서 수 십 개의 마법진과 결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마법진 안쪽에 위치한 결계.
각기 사방신의 형상을 한 결계.
총 4개였다.
“저게 결계···.”
태현의 뒤에 서 있던 헌터들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계는 드러난 지 10초도 되지 않아 태현의 손에 무참히 박살났다.
[Error! Error!]
[외부 충격으로 결계가 무너졌습니다. 계층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가 나타납니다.]
에러는 지x.
어떻게 풀더라도 결계를 없애면 그만.
태현은 나머지 3개의 결계도 전부 박살냈다.
마법진 역시 그의 신괴를 버티지 못하고, 문양이 지워지면서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무너진 벽 너머로 뚜벅 뚜벅 발소리와 함께 석상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아마도 저게 22계층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인 모양이다.
-내 공간을 박살낸 게 네 놈이야?
어린아이의 형상을 한 조그마한 석상.
석상의 품에는 조그마한 곰 인형이 들려있었는데, 태현의 시선은 그 뒤에서 분출되고 있는 흉흉한 기운을 향하고 있었다.
곰의 형상을 하고 있는 꿀렁꿀렁한 어둠의 기운.
아마 저게 곰 인형의 본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의 주인은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의 석상일 것이고.
“난데?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도? 어이가 없군. 남의 공간을 파괴하고도 그런 말을 쉽게 내뱉어?
“그 부분은 미안하게 됐어. 사람을 농락하는 쪽지를 보니 그냥 부수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이걸 준비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기나 하나!
어린아이의 석상이 울부짖었다.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태현은 태연했다.
“어차피 지구의 문화를 본 따서 만든 거잖아? 사방신은 동아시아에서 방위를 나타내는 건데.”
-그게 내 공간을 파괴시킨 행동이 무마될 수는 없다!
그 말과 함께 석상이 들고 있던 곰 인형의 검은 기운이 태현을 덮쳤다.
“아쉽군. 말이 통하질 않아.”
태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 기운을 그대로 받아냈다.
정확히는 피하지 않아도 아무런 타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갓 급 헌터들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한 헌터님!”
“젠장··· 저 기운은 너무 사악해.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지?”
그들은 어느새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레벨로만 따지면 어린아이의 석상은 자그마치 2,500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200레벨이 넘는 수준으로는 견줄 수 없다.
하지만, 태현은 다르다.
레벨만 18,000.
“끝?”
그 증거로 태현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석상에게 다가갔다.
-이··· 이 자식이! 오지 마라!
검은 기운이 다시금 태현을 덮친다.
하지만, 그는 날카로운 검은 기운을 다시금 받아냈다.
그럼에도 걸음은 쉬지 않았다.
-···!
어느덧 태현이 석상의 앞에 섰다.
석상의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공포였다.
“넌 상대를 잘못 만났어.”
그 말을 끝으로 태현의 주먹이 석상의 얼굴을 가격했다.
쾅!
패신권이 발동되면서 석상의 머리는 완전히 파괴되어 산산조각 났다.
[지하 22계층 수호자를 처치하셨습니다. 지하 23계층 입구의 결계가 해제됩니다.]
“자, 계속 내려가죠?”
태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헌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갓 급 헌터들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사태가 다시금 발생하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멸망하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몬스터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명이 파괴되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S급 게이트를 넘어서 G급 게이트들까지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니 대피소로 대피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젠장··· 그냥 죽을까?”
“몬스터에게 죽을 셈이야?”
“그런 방법밖에 없잖아. 찰나의 고통이 무서워서 멸망을 두 눈으로 지켜보자고?”
급기야 죽을 생각까지 하는 시민들의 태도에 헌터들이 급히 만류했다.
“괜찮을 겁니다! 희망은 분명 존재합니다!”
긍정적인 말로 사람들을 회유하는 작전.
하지만, S급을 넘어선 G급이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마음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차라리 헌터님께서 우리들을 죽여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2202대피소에만 1,200명가량의 시민들이 대피해있다.
그 인원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들은 이미 삶을 반 포기한 상태다.
분명 다른 수 천 개의 대피소 역시 마찬가지인 상황이리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건 안 됩니다! 저희들은 여러분들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헌터 양반. 지금 지하 11층에서 버티고 있는 것도 이미 한계야. S급 게이트 사태 때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여기서 지냈는데, 이제는 얼마나 더 있어야 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식량문제도 지상에 있는 헌터들이 전멸하면, 대피소에 있는 시민들은 굶어 죽는 수밖에 없어.”
그는 노인이었다.
“어르신!”
헌터들은 노인의 말에 분노했지만,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죽어.”
드르륵.
자동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들을 지키고 있던 헌터들의 고개가 돌아갔고, 이내 헌터의 정체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 한 헌터님의 소환수다!”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그렇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태현의 수하였다.
그제야 시민들의 눈이 번뜩 뜨였다.
“한 헌터라면··· 한태현 헌터님을 말하는 건가!?”
헌터들을 구박하던 노인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수하들의 눈은 싸늘했다.
“죽기를 바라던 자들이 왜 갑자기 눈빛이 바뀌었지?”
“그냥 우리가 죽여주겠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수하들의 살기에 시민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결국 시민대신 헌터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용서하십시오. 이들을 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살려달라고? 어째서?”
“그것이···.”
말문이 막혔다.
“저 분들의 말이 맞아···.”
그 때, 노인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헌터들을 구박했던 그 노인이었다.
“어르신, 앉아계십시오.”
헌터가 노인을 앉히려고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 역시 삶을 거의 포기했어. G급 게이트가 대거 등장한 시점부터 세상은 박살날 거고, 우리들도 죽음의 늪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죽는 건 나 하나로 끝내주면 안 되겠나?”
“역으로 묻지. 살고 싶은가?”
수하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살 수 있는 선택지가 있으면 당연히!”
“그래? 알겠다.”
수하들은 그제야 싸늘했던 눈동자를 지웠다.
그리고는 헌터들을 보며 말했다.
“잘 지키고 있어.”
“아··· 알겠습니다!”
헌터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소환수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