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추장, 혼자만 너무 늦게 일어난다.”
“폭군이 행동을 보이면 깨우라고 했을 텐데? 나는 오늘의 전투를 위해 휴식을 취했어야 했다고.”
호영이 태연스럽게 대답하니 초강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혼자만 푹 쉬었다는 것이 얄미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젯밤의 그 혼란을 생각하면 초강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할 게 아니었다. 호영은 제사장을 죽이고 강철까지 죽이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지만 부족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만약 강철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강철을 중심으로 혼란을 잠재웠겠지만 강철까지 호영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다.
그에 따라 전사들부터 시작하여 현리 부족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부족의 추장, 호영이 돌아온 것부터가 부족민들에게 있어 충격적인 일이었다.
강철이나 몇몇 전사들은 호영의 귀환을 알고 있었지만 반대로 말해서 그들밖에 알지 못한 일이었음을 의미하였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추장의 귀환은 부족민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사장은 부족민들의 정신적 지주.
비록 폭군의 식인 행동으로 거인을 숭배하는 부족민의 수는 크게 줄었다지만 제사장의 영향력은 여전히 굳건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제사장이 갑자기 죽었으니 부족민들로선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부족민들이 가장 놀라워한 것은 바로 강철의 죽음이었다.
전사들의 지지를 받던 강철의 죽음. 이건 마치 혁명 세력과 정부 세력이 동시에 제거되어 무정부 상태가 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부족민들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내 생각보다 충격이 큰 모양이군. 하나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반란을 끝내자마자 잠을 청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오늘 있을 전투를 생각하면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혼란스럽다 해도 당장 폭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전사들은 어젯밤 호영의 무력을 생생하게 지켜본 입장이었고, 또 부족민들 역시 추장의 무력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소란스럽기만 할 뿐,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의미하였다.
“아무튼 추장이 이제부터 알아서 해라.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살짝 삐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초강을 보며 호영은 피식 웃었다. 귀여운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족민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추장의 집’ 근처에 모인 부족민들의 수는 대충 이백 명은 되어 보였다. 전체 인구가 구백 명이 조금 안 되는 부족에서 이백 명이나 모였다는 것은 부족 전체가 모인 것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았다.
“모두 제사장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
호영은 자신의 말에 침묵을 유지하는 부족민들을 보며 ‘역시 이 부족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종받는 것에 익숙한 것 같아.’라고 생각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바로 내가 제사장을 죽였다. 제사장뿐만이 아니다. 장대와 강철을 비롯한 제사장을 따르는 전사들 그리고 부족의 늙은이들까지 모두 내가 죽였다.”
이백 명이나 모였음에도 무척이나 고요하였다. 하지만 말만 없을 뿐, 부족민들의 표정은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환희에 젖었고, 어떤 이들은 비탄에 잠겼으며, 어떤 이들은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속내를 가졌건 호영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호영은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 했느니, 자신이 얼마나 옳았는지 그런 위선적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다만 부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과, 무엇을 우선시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설명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오크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오크를 공격하여 전사를 잃지 않아도 되고, 오크를 공격할 시간에 다른 것을 사냥할 수 있다.”
오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부족민들이 눈에 띄게 기뻐하였다.
사실 폭군의 식인으로 인한 피해보다 폭군의 명령에 따라 오크 사냥에 나설 때의 피해가 훨씬 컸다.
더군다나 부족의 식량 공급을 일정 부분 책임지고 있는 전사들이 매일 오크 사냥으로 소모되니 부족의 식량 사정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오크 사냥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호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모두가 기뻐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30대로 보이는, 하지만 실제 나이는 20대 초반일 것이 분명한 부족민 하나가 호영에게 물음을 던졌다.
“추장, 그런데 정말 폭군을 죽일 수 있나? 폭군을 죽이지 못한다면 다른 건 의미가 없다. 폭군이 우리를 모조리 죽일 것이니까.”
사실 부족민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이 바로 폭군이었다. 지금 부족이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폭군은 두려운 존재였다.
아무리 추장이 강하다고 해도 과연 폭군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부족민들의 이같은 의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너희들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우리가?”
호영은 그 사내를 보며 자신감 있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른 부족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무려 거인족이었다. 전사들조차 거인에게 마땅히 타격을 입힐 수가 없는데 평범한 부족민인 그들이 전투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답답하군, 이 귀중한 시간에 일일이 설득해야 하다니. 역시, 하루빨리 절대 권력을 가질 필요가 있겠어.’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얼굴의 부족민들을 보며 호영은 내심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명령을 강요하거나 부족민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폭군과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부족의 추장이 된 이상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우선 부족민들을 최대한 설득하여 폭군과의 전투에 협력하게 만들어야 했다.
“공격은 오직 나 혼자 한다. 너희들은 그저 폭군을 묶어 주기만 하면 된다.”
“무, 묶는다고?”
“나보다 너희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폭군은 게으른 편이다. 어지간해선 잠에서 깨어나지 않지. 그러니 너희는 폭군이 잠을 자고 있는 그 순간에 폭군이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라.”
그같은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다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왜’ 폭군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중에서 몇몇이 목소리를 높이며 아까 전 사내처럼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가 어떻게 폭군을 묶을 수 있냐.’, ‘차라리 도망치는 게 좋지 않냐.’ 같은 쓸데없는 질문들이었다.
“그래서? 네놈들은 결국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
“나에게 있어 강철과 네놈들의 차이는 단 하나뿐이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배신에 관여했는가. 그 차이가 죽음을 갈라놓았지. 결국 네놈들은 나에게 있어 배신자라는 것이다.”
“우, 우리는 배신하지…….”
“시끄럽다. 배신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왜 나를 따르지 않았지? 결국 다 핑계에 불과하다. 네놈들은 나를 배신하고 폭군의 편에 선 것이야.”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호영은 불편한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은 봐줬다. 하지만 두 번은 봐주지 않을 것이야. 선택해라! 나를 따라 폭군을 죽일지, 아니면 지금 내 손에 죽을지를!”
과거의 대준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온 자를 죽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대준의 몸을 하고 있는 호영의 말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이가 없었다.
제사장을 죽이고 거사에 가담한 강철까지 숙청한 호영!
피를 묻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 그였으니 같은 말을 해도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 따르겠다.”
“나도 추장의 말에 따르겠다.”
이전의 대준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추장으로서의 위압감!
복종하는 것에 익숙한 부족민들답게 그들은 호영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 * *
현리 부족이 ‘폭군 척결’에 대한 준비를 한창 하고 있을 무렵, 폭군은 여느 때와 같이 긴 잠에 빠져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잠에서 깨어 있는 시간은 고작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폭군. 그렇게 잠이 많은 폭군이었기에 현리 부족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인간이란 최소한의 전투력조차 갖지 못한 열등한 종족일 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해도 폭군은 잠을 더 우선시했을 것이다.
고작 인간 따위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은데, 나에게 해가 되는 짓을 했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야, 인간들이여.’
그렇게 잠을 청하던 도중, 폭군은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가 온몸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존재가 자고 있는 그의 몸을 건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들이 감히 자신을 건들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거인족이 세계를 지배한 것도 어언 수천 년째.
마지막까지 거인족에 저항하던 마족마저 땅 위의 어느 곳에도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땅속에 갇혀 지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거인족으로서 자만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애써 지운 채 수마에 몸을 맡겼다.
“도대체 어떤 놈이!”
하지만 폭군은 다시금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감각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의 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리라!
당연하겠지만 폭군은 자신의 잠을 방해하는 존재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자연재해로 인해 잠에서 깨어날 때도 화를 참지 못하여 산이니 땅이니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던 폭군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방해를 받았다면 더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폭군은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하였다.
‘감히!’
어이가 없게도 폭군의 몸은 덩굴과 나무줄기로 결박되어 있었다. 아주 작정하였는지 팔이나 다리 쪽은 통나무로 된 기둥까지 땅에 박아서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상태였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폭군은 사나운 표정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따위 것으로 나를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독히도 멍청한 것이리라.
폭군은 인상을 찡그리며 왼팔에 힘을 주었다.
오른팔은 동족과의 싸움에서 잃은 상태였기에 외팔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하나 이까짓 결박쯤은 한 팔로도 충분히 풀어 낼 수 있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왼팔에 힘을 주니 우두둑, 소리가 나며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곧 자신에게 무도한 짓을 한 자들에게 피의 응징을 할 수 있으리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폭군은 몸에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 폭군의 얼굴에 무언가가 착지하였다.
거인과 비슷한 외형을 가졌으나 체구는 한참 작은 존재.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이 무엄하게도 폭군의 얼굴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었다.
“네, 네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