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폭군은 경악하였다.
자신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인간. 그 인간은 폭군에게도 낯이 익었다. 한때 자신을 공격했던 인간족의 수장!
사실 폭군은 인간의 얼굴을 따로 구별하지는 않았지만, 이례적으로 눈앞의 인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인간에게 공격당한 기억은 폭군에게 있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폭군이 경악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인간족의 수장이 창을 든 채 자신의 눈을 공격했다는 것! 그게 바로 폭군이 경악한 이유였다.
“끄아아아악!”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인간이 거인을 공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 그 공격이 제대로 적중하여 거인을 비명 지르게 하다니.
심지어 인간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폭군의 왼쪽 눈을 실명시킨 인간은 오른쪽 눈까지 실명시킬 생각으로 공격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인간의 공격이 성공한다면 폭군은 얼마 동안 시력을 잃게 될 것이리라.
파직!
그러나 인간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타격이 아예 없지는 않은지 눈꺼풀이 움푹 들어갔지만 인간의 창은 폭군의 눈꺼풀을 뚫지 못하고 박살 나 버렸던 것이다.
‘용서치 않는다. 절대 용서치 않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통에 폭군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눈앞의 인간을 찢어 죽일 생각이었다.
분노한 폭군이 몸을 강하게 움직이자 그를 제약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물리적 제약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 그러나 인간은 폭군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창이라는 무기를 잃은 인간은 맨손으로 폭군의 오른쪽 눈을 가격하였다.
콰앙!
인간의 맨손 공격을 우습게 봤던 폭군이지만 그는 오른쪽 눈에서 느껴지는 극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방금 왼쪽 눈을 잃었을 때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뇌를 직접 타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퍽! 퍽! 퍽!
연달아 느껴지는 극통! 육체가 묶인 폭군으로선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어찌 인간 따위가 이만한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폭군은 그같은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자신에게 공격하는 인간과 그 인간이 가진 무력.
무엇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언제까지 의문만 품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목숨’의 위급함을 느낀 폭군은 본신의 힘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거인족이 가진 본연의 능력. 마족과 용족의 저주로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오직 동족과의 싸움에서만 사용했던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짓밟아 주마!”
폭군은 그같이 외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인간에게 입은 상처가 그의 신경을 계속 자극하였지만 능력을 사용함에 따라 이제는 버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은 더 이상 공격을 이어 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폭군이 몸을 일으켰다는 것. 그것은 폭군의 머리 위에 있던 인간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만큼 위협적일 것이었다.
* * *
호영은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자신의 맹공격으로 비명을 지르는 폭군의 모습에 ‘승리’를 자신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사실 호영은 부족민들을 억지로 전투에 동원하였지만 그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폭군의 무력은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인간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폭군에게는 개미 떼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억지로 전투에 참가시켰다. 어차피 직접적인 전투에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을 시킬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보조적인 역할이 호영의 생각과 다르게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였다. 폭군이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당하기만 한 것이었다.
“이제 끝이다!”
승리를 확신한 호영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우지끈, 무언가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발을 디디고 있던 폭군의 신체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뭐지?’
호영이 순간 당황해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그의 발바닥이 폭군의 얼굴 가죽을 뚫고 단단히 고정되었다.
설령 강진이 온다 해도 지금의 그를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호영은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위기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구어어어어어어!”
방금 전의 흔들림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세상천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반이 꺼지고 새로운 지형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호영은 훅, 숨을 강하게 들이마시고는 허리를 숙였다. 하체를 고정시킨 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아 상체까지 고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호영의 대응은 나쁘지 않았다. 폭군의 얼굴 가죽에 척 둘러붙음으로써 땅에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호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광경부터가 달라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구덩이 안에 있었었다. 폭군은 강하게 결박되어 있었고 호영은 그런 폭군의 머리 위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그는 구덩이 바깥, 정확히는 하늘에 떠 있었다. 호영이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하였다.
폭군,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결박에서 풀려난 것이야 예상했던 일이야. 그런데 왜, 높이가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이지? 설마 안 그래도 거대했던 거인 놈이 더 커지고 있다는 말인가?’
호영은 언제가 되었건 폭군이 결박에서 풀려날 것이라고 예상하였었다. 아무리 수백 명의 부족민을 동원하여 단단히 결박시켰다고 해도 거인의 힘은 규격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1분만 버텨도 충분히 선전했다고 생각했던 호영. 그렇기에 결박이 풀린 것으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폭군이 몸을 일으켰음에도 계속해서 높이가 올라간다는 사실이었다. 높이가 올라간다는 것, 한마디로 표현해서 거인이 커지고 있음을 뜻하였다.
안 그래도 5미터의 키를 가진 폭군이 더욱 거대해지다니. 호영으로선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악당의 변신을 기다려 줄 필요는 없지. 지금 움직여야 한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신속하였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호영은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폭군의 얼굴 가죽이 움푹 파였고 폭군은 비명을 질렀다. 고작해야 인간의 조그만 주먹일 뿐이지만 폭군의 얼굴을 보면 같은 거인족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피멍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공격으로는 ‘결정타’가 될 수 없었다. 피멍이 늘고 있었지만 이까짓 피멍은 약간의 시간만 지나도 치료될 것이니까.
‘뇌를 직접 타격해야겠어.’
그때 무언가를 느낀 호영이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쿠아아앙!
호영이 몸을 피한 그곳에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손바닥이 강하게 떨어져 내렸다. 폭군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때린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폭군이 자해를 하는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호영의 입장에선 결코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습기는커녕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두려웠다.
폭군의 공격에 맞으면 스쳐도 사망이었다. 이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아무리 호영의 몸이 단단하다고 해도 한층 거대해진 폭군의 힘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하였다.
그러니 폭군의 공격에 막을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되었다. 호영은 오직 피하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콰앙! 콰앙!
모기를 잡듯 자신의 얼굴을 무식하게 때려 대는 폭군. 정말 무식한 공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한 공격이기도 했다.
워낙 거대한 손바닥인지라 날쌘 호영조차 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폭군의 변신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라 지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지형이 변한다는 것은 폭군의 얼굴 면적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호영에게 있어 결코 작지 않은 변수였다.
“흡!”
이제는 손뿐만이 아닌 입까지 사용하는 폭군의 공격에 호영은 정말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다. 거인의 입이라 그런지 정말 엄청난 크기였다. 그런데 폭군의 입을 피하니 이번에는 콧김이 방해하였다.
고작 콧김인데도 태풍이 불어오는 것처럼 몸이 흔들거렸다. 호영은 다리에 힘을 줘서 겨우 견뎌 냈다. 하지만 애써 콧김을 버티니 이번엔 폭군의 혓바닥이 호영을 괴롭혔다.
그야말로 쉴 새 없는 공격.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호영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차라리 입속으로 들어갈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폭군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과 위장 따위를 공격하자고. 만화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입속으로 들어가면 폭군의 이빨이나 혓바닥에 의해 살아남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확실한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호영은 그렇게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고 공격을 피하는 것에만 열중하였다. 그래도 호영에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폭군의 육체가 거대화되면서 힘 같은 것이 상당히 강해지는 반면 지능이 심각할 정도로 퇴화되었다는 점이었다
하기야 폭군에게 이성이 존재한다면 호영을 공격하기 위해 이렇게 자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의 폭군이라면 얼굴에 달라붙은 호영을 아예 무시하고서 현리 부족부터 공격했었을 터. 호영에게나 현리 부족에게나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 말고도 호영에게 유리한 점은 또 있었다. 바로 ‘학습’이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단순하기 그지없군. 아니, 무식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천재였다면 눈 감고도 피할 수 있겠어.’
회귀 전에도 겪어 본 적이 없는 비정상적인 전투, 특히 마력 없이 하는 공격이라 처음에는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폭군과의 전투에 적응하고 있었다.
즉, 학습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공격을 피하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여유라는 것도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호영과 다르게 폭군의 움직임은 가면 갈수록 둔해졌다. 체력이 다했다기보다는 폭군의 ‘거대화’ 능력에 제약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나도 슬슬 반격이라는 것을 해야겠어.’
폭군의 공격을 피하는 것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호영은 조금씩 반격이라는 것을 시도하였다. 반격이라고 해 봤자, 거창한 것은 아니고 폭군의 공격을 한 번 피하면 바닥을 두세 번 내리치는 것이었다.
워낙 거대해진 폭군이라 이런 식의 공격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반격을 거듭할수록 몸을 비비 꼬며 고통스러워하는 폭군을 보니 아예 쓸모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쾅! 쾅! 쾅!
날벌레처럼 잽싸게 돌아다니며 피해를 누적시키는 호영.
간간이 하늘을 뒤덮는 거인의 손이 날아왔지만 그는 날벌레처럼 민첩하면서도 인간의 지성을 가진 존재였다.
약삭빠른 움직임으로 휙휙, 잽싸게 피해 주고는 반격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 무엇보다 나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