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1화 (21/345)

# 21

‘제법 반발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당연한 지시라서 그런가?’

이견을 내세우기는커녕 저마다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나서니 내심 ‘반발’을 기대했던 호영으로선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호영이 지시를 내릴 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키고는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내가 가용하는 전사들도 늘릴 거야. 고작 서른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호영의 말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따를 것 같은 태도를 보였던 그들이 순간적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가용하는 전사들을 늘리겠다는 호영의 말.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사병’을 늘리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추장의 권력은 더욱 강해지고 그들의 권력은 더욱 약해질 것이었다.

“전사들은 어떻게 늘리려고?”

“너희 일족들이 각출해야겠지.”

당당하게 말하는 호영의 모습에 세 일족의 수장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호영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른다고 해도 전사들을 내주는 것은 꺼려질 것이었다.

목책과 망루를 만드는 것처럼 노동력을 제공하고 다시 돌려받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호영의 사병으로 내줘야 하는 까닭이었다.

인력이 무척이나 중요할 수밖에 없는 세 일족으로선 무척이나 난감할 수밖에. 하지만 언제까지 침묵을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씨 일족의 수장, 중한이 목소리를 낮추며 호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숫자는 어느 정도 줘야 하나?”

“각자가 보유한 수컷의 수를 고려해야겠지.”

“수컷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이 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 물음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된다!”

호영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반발이 튀어나왔다. 각진 얼굴을 가진 사내였는데 체구가 초강만 하였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

“수컷을 더 많이 가졌다고 더 많이 내줘야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부디 추장은 공평하게 처리해 주길 바란다.”

“…….”

공평함을 거론하는 사내의 모습에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 뭐냐?”

“크흠! 추장, 너무하다! 나 수호다. 수호!”

얼굴을 붉히며 말하니 제법 미안한 기분도 들었지만 호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판 즉, 아바타가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인데 어찌하겠는가?

호영이 지금까지 대준으로서의 삶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보조적인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상대의 얼굴 위를 쳐다보면 ‘이름’과 ‘약력’이 나오는 기능도 존재하였는데 이건 사실 모든 상대에게 통용되는 기능이 아니었다.

이 기능 역시 다른 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아바타의 지력에 영향을 받는데 문제는 대준의 지력이 15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30만 되었어도 부족의 웬만한 이들은 전부 이름이 나타났을 텐데, 지력이 15밖에 안 되니 눈앞의 수호처럼 나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조차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너의 잘못이야. 대준이 기억할 가치조차 없었다는 것이잖아?’

속으로 대준을 변호해 준 호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호에게 말하였다.

“수호라고? 그래, 너는 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추장도 알지 않나. 다른 일족의 수컷이 적은 이유가 그들 중에 배신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신하지 않았으니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

단순 무식하게 생긴 것을 볼 때 아무 생각 없이 이견을 내세웠다고 생각했는데 수호는 나름 명분이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의 일족이자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다른 수씨들도 동조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중씨의 중한과 강씨의 강예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수호를 노려보았지만 말이다.

“배신하지 않았으니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네놈들은 내가 쫓겨났을 때 무엇을 했었지?”

“……그, 그건……!”

“내게는 수씨나 중씨나 다 똑같다. 강씨 역시 마찬가지지. 그러니 내게 불공평하다느니 수씨를 위해 달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라.”

“하지만 추장!”

여전히 이견을 내세우려는 그를 보며 호영이 발을 굴렀다.

쾅!

고작 발짓 한번 했다고 땅이 움푹 파이는 충격적인 광경에 세 일족의 수장들 모두가 숨을 훅 삼켰다.

호영을 바라보는 눈빛도 순식간에 바뀌었는데, 호영이 가진 무력을 다시금 실감한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수호 역시 마찬가지로 아연한 얼굴을 하였다.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은 모양새였다.

그때 다른 수씨들이 나섰다.

“미안하다, 추장. 이놈이 이상한 말 했다.”

“수호, 네놈은 역시 일족을 책임지기에 부족한 놈이다. 추장! 우리 수씨는 추장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겠다.”

현리의 수씨 일족은 현재 세 개의 일족 중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호영이 일으킨 거사에서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던 까닭이다.

더군다나 강씨처럼 오크를 사냥하면서 피해를 보지도 않았으니 장정 수가 가장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수씨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권력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보는 것처럼 수씨의 삼형제는 합심하기는커녕 서로를 견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수호가 호영에게 질책을 당하는 상황에서 되레 수호를 비난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수씨 일족이냐?”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말하는 수호였지만 다른 수씨들은 그저 비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한 명쯤 처벌하여 본보기를 보이려고 하였는데, 이거 참 상황이 우습게 되었군.’

이미 강철을 죽임으로써 어느 정도 본을 세웠다고 할 수 있지만, 또 그래서 중씨와 강씨가 아무 말 없이 호영을 따르는 것이지만, 수씨의 경우는 한 번쯤 본보기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부족의 5할에 가까운 인구가 수씨 일족이니 그들에게도 추장으로서의 위엄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서로 반목하는 수씨 삼형제를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괜히 본을 세워 적대감을 키울 필요 없이, 삼형제를 이용하면 되는 까닭이었다.

“수윤과 수혜는 전사를 동원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추장의 말이면 무조건 따른다!”

“나 역시 동의한다. 수씨의 수컷이 가장 많으니 당연히 가장 많이 동원해야 한다.”

그 대답에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10대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친위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강이야 마음에 든다지만 나머지 전사들은 솔직히 그리 미덥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런 이유 말고도 추장의 권위가 상승한다는 점 역시 호영을 기쁘게 만들었다.

‘하루빨리 친위대를 만들어 강하게 키우고 싶다. 그래야 정복 전쟁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고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만약 외부의 적이 부족으로 쳐들어온다면 내가 가장 먼저 막을 것이다. 그러니 수컷을 보내는 데 주저하지 마라.”

“물론이다. 최고의 전사들을 보내겠다.”

“중씨 역시 마찬가지다. 젊고 힘센 애들만 보내겠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친위대 창설이 결정되었다. 세 일족 모두 호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 친위대 창설에 최대한의 성의를 보일 터.

아마 현리 부족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가 만들어질 것이었다. 물론 호영의 존재로 이미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 중에 다른 부족을 본 사람 있나?”

“다른 종족이라면 많이 봤다.”

“강 넘어가면 다른 종족 많다. 짐승 머리를 한 놈들이 산다.”

호영의 물음에 수씨 일족이 가장 열성적으로 대답하였다. 아무래도 강가 쪽에서 살다 보니 발이 제법 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영이 찾는 것은 ‘다른 종족’이 아닌 ‘다른 부족’이었다. 호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물었다.

“다른 종족은 필요 없다. 우리와 같은 종족을 본 적은 없나?”

“나는 본 적이 없다.”

“……장로들이 다른 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있다.”

죽은 장로들을 거론하는 수호의 말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1회 차는 인간을 찾는 것도 쉽지 않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거인족을 중심으로 강력한 종족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1회 차에선 인간이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인간이 지배받고 인간이 사냥당하는 세상. 1회 차에서 인간족은 초식동물과 다를 게 없었다.

현리 부족이 여태까지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다른 인간들의 경우는 백 명 이하의 소집단으로 동굴 같은 곳에서나 살아갈 것이었다. 마치 쥐들이 숨어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알았다.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도 좋다.”

호영은 더 이상 들을 이야기가 없을 듯하자 그들을 돌려보냈다. 다시 초강과 단둘이 남게 된 호영.

“추장, 그런데 다른 부족은 왜 찾나?”

“부족을 키우려면 꼭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찾겠다.”

“어떻게 찾겠다는 것이냐?”

“우리가 잠시 살았던 산에 다른 부족이 살 수도 있다. 산을 한번 훑어보겠다.”

초강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한 일이었다. 초강이 강자에 속한다고 하지만 그거야 인간을 기준으로 한 강자였다.

비록 거인족의 주 무대인 대평원만큼은 아니겠지만 산 역시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즐비하였다. 산 초입에서 보았던 고블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전사들과 같이 가면 된다. 마침 세 일족이 전사를 보내 주니 그들을 데려가면 된다. 그러니 나를 보내 줘라. 추장.”

“……안 된다.”

“추장, 나를 못 믿는 거냐!”

“믿는다. 하지만 부족 바깥은 위험해.”

“나도 부족 바깥을 경험한 전사다. 현리의 전사로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자신 있게 말하는 초강이었지만 역시 들어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호영은 달래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부족을 찾는 것은 내가 직접 할 것이다. 그때 네가 날 도와라.”

“……추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따르겠다.”

다행히 초강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호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뒤로 부족의 보수공사를 도왔다.

지금 당장 친위대를 만들어 훈련시키고 싶었지만 폭군의 난동으로 엉망이 된 부족을 원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오후 1시쯤 되자 세 일족에서 호영에게 사람을 보냈다.

“너희들이 나의 전사가 될 이들인가?”

“그렇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추장.”

“수호, 너는 왜 여기에 있지?”

“……나도 원해서 온 것은 아니다.”

“대충 무슨 이유인지 알겠군. 아무튼 수씨에선 서른 명을 보낸 건가?”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추장도 알다시피 우리 수씨는 수컷이 많지만 그 수컷들은 모두 물고기를 잡고 있다. 수컷들을 모두 데려오면 부족의 식량 사정은 더 안 좋아질 것이다.”

호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서른이면 충분히 만족하는 호영이었기에 수호를 지적할 이유가 없었다.

“하긴, 지금이 가장 바쁠 때겠지. 이해해 주겠다.”

“고맙다, 이해해 줘서.”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수호의 모습에 호영은 피식 웃고는 시선을 돌려 강씨와 중씨의 장정들을 바라보았다.

두 일족에서 보내온 장정의 수는 총 스무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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