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37화 (37/345)

# 37

“그래, 아마 우리가 방심한 모습을 보이면 그때 공격할 것 같다. 그러니 전사들에게는 은밀하게 적의 존재를 알리되, 티를 내지는 않게 해라.”

봉선이라면 모를까, 수호라면 호영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수호는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가져온 고기를 씹어라! 식사 시간이다!”

겉으로는 식사 시간이라고 외치고는 십장과 오장들에겐 ‘전투 준비’를 지시한 수호.

친위대 전사들은 수호의 은밀한 명령에 풀어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본래라면 경계심을 높인 채 이곳에서 죽은 전우들의 흔적을 찾아 헤맸겠지만 알 수 없는 자들이 숨어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숨어 있는 적들을 없애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키는 게 나을 것이었다.

‘풀어진 모습을 보이면 바로 공격할 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군. 역시 상대는 인간인 건가?’

1시간이 넘게 지났는데도 갈대밭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늑대나 몬스터라면 진즉 공격하였을 터.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라면 공격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미 한번 기습했던 곳에서 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은 여러모로 찝찝할 것이니까.

인간이 확실하다면 그들은 내심 ‘함정’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호영은 그런 생각이 들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군.”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전사들이 호영의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들은 호영의 명령에 따라 풀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 실제로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휘익!

그때 호영의 손에서 창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섬전처럼 쏘아진 창은 갈대밭을 가르더니 그곳에 있던 무언가를 맞혔다.

“끄윽.”

의심할 수 없는 인간의 소리였다. 정확히는 인간의 신음.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괴상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갈대밭에 숨어 있던 일단의 무리가 등장한 것이다.

“끼아악!”

“끼악!”

호영은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예상보다 많은 무리가 갈대밭에서 튀어나왔다. 넓게 산개한 터라 더 많아 보였는데, 대충 세어 보니 쉰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물론 쉰 명이든 백 명이든 호영은 두렵지 않았다.

“공격하라!”

전사들에게 그리 외친 호영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를 향해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무슨 대단한 방법으로 사내를 우두머리라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적들보다 덩치가 크고 눈에 띄는 장신구를 하고 있어 달려든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이 달려든 상대가 우두머리인 게 맞는지 친위대를 향해 달려들던 적군의 일부가 호영을 막아섰다.

‘네놈들이 나를 막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애초에 호영을 상대로 맞서 싸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었다. 계속 기습을 노리든가 아니면 진즉에 도망쳤어야 했을 터.

호영의 실력을 못 알아본 우두머리의 실수는 뼈아팠다. 일개 전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고 초강만큼 거대한 신장을 가진 적 우두머리는 얼굴이 함몰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친위대 전사들 역시 적군의 공격을 무리 없이 막아 내고 있었다. 적군의 공격은 분명 맹렬하였지만 막상 피해는 적군 쪽이 훨씬 많았다.

친위대는 호영에게 훈련받았던 대로 단단하게 대형을 짜서 체계적인 전투를 벌였는데, 숫자의 우위를 확실하게 이용하였다.

물론 봉선을 위시한 여전사들의 활약이 놀라웠다. 그녀들은 마치 별동대처럼 친위대의 대형에서 빠져나와 적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여전사들이 친위대에 소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따로 행동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더 큰 효과를 보았다.

괴상한 함성을 지르던 적군의 포위는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어느덧 함성 소리가 비명 소리로 바뀌는 상황. 적들은 역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끝났군.”

엄청난 승리! 호영은 완벽한 승리에 전율을 느끼며 전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추격하라! 저들을 완전히 끝장낼 것이다!”

“와아아아아!”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름 모를 부족의 전사들은 오직 한 방향으로 도망쳤다.

바로 저 방향에 이름 모를 부족의 근거지가 있을 터.

호영은 이참에 저들의 근거지를 말살시키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물론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적지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들의 본거지에는 훨씬 많은 전사들이 존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친위대가 추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근거지로 향하는 것은 믿을 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즉, 이대로 간다면 100%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으로선 두려울 게 없었다. 아무리 본거지에 전사들이 남아 있다 해도 백 명 정도에 불과할 터.

혼자서도 백 명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호영이기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하기야 이 시대에 그가 두려워 할 존재는 오직 거인밖에 없으리라.

‘그나저나 상당히 먼 곳에 있군. 오크만큼은 아니지만 활동반경이 엄청나게 넓어.’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호영은 이름 모를 부족의 세력이 예상보다 크다는 생각을 하였다.

쉰 명이나 되는 전사들을 달려서 10분 넘게 가야 할 곳까지 진출시키는 것은 세력이 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근방에는 저들의 적수가 별로 없었을 터. 몬스터든 맹수든 크게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게 분명하였다.

“도착했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호영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리 부족의 목책에 버금가는 거대한 목책이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 * *

이사는 눈을 감았다.

‘기회가 맞을까? 내가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기회’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일족을 해방시킬 기회를.

현재 그의 일족은 ‘해족’이라는 부족에게 지배당하는 상황이었다. 인간이면서도 맹수나 마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적과도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해족.

이사의 일족도 그런 해족에게 감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수많은 일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이사의 일족이 해족의 노예로 생활한 지도 20년이 지났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족은 변함없는 성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들의 성세는 계속될 터.

하지만 이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씨 일족의 현자라 불리는 존재. 일족의 지도자로서 일족을 구원해 줄 의무가 있었다.

‘내가 실수하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오늘, 거사를 일으킨다.’

그렇기에 오늘,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자신의 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잔인무도한 해족을 응징하기 위해.

눈을 번쩍 뜬 이사는 곧바로 일족의 어른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20대 중반에 불과한 이사였지만 그는 현자였다.

현자로서 일족의 수장 역할을 하는 그였기에 어른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늘입니다.”

단 한마디. 이사가 내뱉은 그 한마디에 좌중은 침묵하였다.

“오늘, 거사를 일으킵니다.”

“…….”

다시 내뱉은 그 말에 이씨 일족의 어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의 말은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 진리와 같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거사를 일으켜야 했다.

“모두 준비하십시오.”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전사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우리 일족만이 아닌 다른 일족들의 전사들까지도.”

“그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같은 처지라고 해도 사이가 좋을 수만은 없었다. 이씨 일족은 무려 20년 동안 노예로 살아온 일족이다.

불과 몇 년도 버티지 못하는 다른 일족들이 보기에 해족의 앞잡이로 느껴질 터.

하지만 이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믿으십시오. 이미 그들과의 이야기는 끝내 놓은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에 더 이상 이견이 없었다.

이사의 말은 절대적 진리.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어른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사의 명령대로 거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들이 배신하지 않을까? 그리고 과연 우리가 해족을 이길 수 있을까?’

얼마 뒤에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날 터.

태연한 표정을 짓던 이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유로운 얼굴을 하였지만 속내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그 역시 두렵기 그지없었다.

해족에 소속된 전사들은 지독하리만치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강한 적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노예를 두는 것을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노예 출신이라 할지라도 용맹하거나 재주가 있다면 자신들의 소속으로 받아들이는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이런 상대였으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그의 전사들은 노예로 수십 년을 살아온 오합지졸이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미 거사는 시작되었다. 내 추측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

얼마 전에 있었던 해족과 이름 모를 부족 간의 전쟁. 이사는 그 전쟁을 기회로 삼아 반란을 계획하였다.

물론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일개 노예가 정보를 얻어 내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는 약간의 정보만으로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 이사가 추측하기로 상대 부족은 꽤나 강성한 편에 속하였다.

해족의 부상자가 적지 않게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는 그 부족이 머지않아 반격에 나서리라 추측하였다.

이 추측은 막연하고 사실에 근거하지 못했지만 오늘, 해족 전사들의 반응을 보며 이사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름 모를 부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고. 지금이 바로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라고.

“혀, 현자님. 해족 전사들이 복귀하였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군요.”

“그런데 돌아온 전사가 얼마 없습니다. 돌아온 전사도 부상자들이 대부분입니다!”

“……!”

이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대로 되었다!’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이사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입니다! 지금 바로 해족 전사들을 공격하세요!”

“와아아아아!”

그같은 외침에 해족의 노예로 부림을 받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봉기를 일으킨 노예들의 숫자는 이백.

그에 반해 해족 전사의 숫자는 예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아무리 해족 전사들이 정예하다고 해도 200이라는 숫자를 이겨 내기는 불가능하였다.

그것도 이처럼 예상치 못했던 봉기라면 더더욱 그랬다.

* * *

“내분이 일어난 것인가.”

호영은 목책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친위대 역시 목책에 진입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목책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대기하는 것이 좋으리라. 어차피 적이라면 어부지리를 취하는 게 좋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소란이 진정되는 동시에 목책의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무리가 등장하였다.

비쩍 마른 것이 전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호영은 그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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