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39화 (39/345)

# 39

지금까지 무엇 하나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이제 호영이 달성해야 할 목표는 몇 가지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하나의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또다시 원정을 나설 필요가 있었다.

“준비를 끝마치면 강 너머로 진출해야겠어. 겨울이 오기 전에 말이야.”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 강 너머의 땅. 호영은 바로 그곳을 다음 목적지로 선택하였다.

* * *

“오랜만이군요.”

“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호영은 집 근처의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외출은 매일같이 해도 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있는 그였기에 만날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카페 같은 공간에서 만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홍준기.

지금 호영과 마주하고 있는 사내는 바로 홍준기였다.

“그런데 이분은?”

하지만 홍준기는 혼자 오지 않았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활달하게 생긴 여인이 함께였는데, 한눈에 봐도 홍준기와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둘이 똑 닮은 것이 아마 남매이거나 친척 관계이리라.

“안녕하세요. 홍지영이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동생이 계속 억지를 부려서.”

호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제 딴에는 호영과 친해진 것 같으니 동생을 불러온 것이겠지만 호영으로선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가 친해진 것은 홍준기였지 홍준기 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내색하지는 않고서 자신도 통성명을 하였다.

“송호영입니다.”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더라도 싸늘해진 분위기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홍준기는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제 동생이라 무엇 하나 숨길 수도 없더군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호영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런 호영을 보며 홍지영이라 이름을 밝힌 여인이 말문을 열었다.

“신비주의 컨셉인 거,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딱히 SNS나 커뮤니티 같은 거 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솔직히 같은 센추리 유저로서 서로에 대해 궁금하잖아요?”

외모처럼 시원스럽게 말하는 여인이었다. 호영은 그런 홍지영의 태도에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꺼림칙한 마음은 여전했다. 왜냐하면 센추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국가적인 관심을 받을 게임이기 때문이다.

기업 또는 정부가 그에게 접촉을 시도할 수도 있을 터.

그가 계획했던 대로 한반도 전체의 왕, 또는 황제가 된다면 누군가는 필히 접촉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당연히 그의 신분은 될 수 있는 한 감추는 것이 이로웠다.

‘하지만 숨어 살려고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의 목표는 일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개 왕국이 아닌 제국을 건설하는 것. 당연히 유저들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홍준기가 호영이 아는 그 홍준기라면 추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 신상이 밝혀질 위험 정도는 감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그의 인물됨이 어떤지를 계속해서 지켜봤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홍지영 씨도 센추리 유저인가 보군요.”

“뭐, 저는 튜토리얼을 깨지 않는 ‘뉴비충’이지만 말이죠, 후후.”

그녀의 대답에 호영은 ‘그렇습니까?’라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하였다. 본 게임을 한다면 모를까, 초보자의 섬에서만 활동하는 유저에겐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다.

호영은 고개를 돌려 준기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그가 카페에 온 이유는 홍준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지영과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영은 그런 호영의 속내를 모르는 것인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부족에서 어떤 위치에 계세요? 그러니까, 신분 같은 거요.”

“추장입니다.”

“우와, 정말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 오빠와 만나자고 한 것도 센추리에서 만나자는 뜻으로?”

정말 활기찬 여인이었다. 호영처럼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반응을 하는 남자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상대하지 않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영의 질문 덕분에 호영은 곧장 본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라면 쓸데없는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예. 저의 부족은 이제 외부로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강 너머에 있다는 홍준기 씨의 부족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죠.”

“저, 정말이십니까?”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준기가 놀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외부로 진출할 수 있다는 호영의 말이 무척 놀랍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물론 호영의 입장에선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해 부족을 복속시킨 지도 현실 시간으로 한 달이 넘게 지났다. 게임상으로는 네 달 이상이 지난 것인데, 그동안 현리 부족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였다. 친위대의 수는 삼백으로 늘어났고 부족민의 인구는 2천을 넘어섰다.

또한 지금까지 심었던 농작물을 추수하기 시작하였는데 2천의 인구가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정도의 물량이었다.

이사의 계획대로 강씨 일족이나 수씨 일족을 통해 사냥을 꾸준히 하여 훈제 고기를 대거 저장한다면 겨울을 넘어 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참고로 호영이 그동안 외부로 진출하는 데 제한을 줬던 이사에 관련된 문제도 깔끔히 해결한 상태였다.

이사는 이씨 일족의 수장인 동시에 해 부족의 노예였던 여덟 부족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즉, 해 부족 출신의 부족민 육백 명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리의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절반의 절반에 대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부족을 둘로 분열시킬 수도 있는 존재. 당연하겠지만 그런 존재를 언제까지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회유하든가, 아니면 깔끔하게 죽이든가. 둘 중 하나를 확실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영이 선택한 것은 회유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호영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욕심이 많았고 그중에서 인재, 특히 모사 타입의 인재에 대해 욕심이 많았다.

이사라면 그런 호영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을 터.

하여 호영은 회유를 선택하였는데 이사의 충성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촉한의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 한 것처럼 저자세를 취한 채 열과 성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차가운 말로 헛된 마음을 품지 못하게 경고하며 한편으로는 호영에게 충성했을 때의 이점을 이야기했을 따름이었다.

몇 달의 노력 끝에 결국 이사는 충성을 선택하였다.

절대적인 무력을 갖춘 호영에게 혹심을 품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이사는 호영의 최측근이 되어 부족의 대사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영의 예상대로 이사는 현명한 지혜로 부족의 여러 문제점들을 순식간에 해결하였다.

안 그래도 외부로 진출할 여건을 가졌던 현리 부족은 이사의 활약을 통해 더욱 만족스러운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즉, 강 너머 미지의 땅에 있는 준기의 부족을 찾아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준기에게 말하였다.

“저의 부족은 강합니다. 홍준기 씨가 말해 주신 수인족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수인족을 무찔러 홍준기 씨를 구해 줄 것이니.”

“……!”

조금만 기다리면 수인족을 무찔러 준다는 호영의 확답에 준기는 몸을 떨었다. 도대체 부족의 역량이 어느 정도나 되기에 수인족을 상대로 이토록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기도 하였고, 기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서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그는 크게 기뻐하는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리 부족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희생이 결코 작지 않을 텐데 저와 저의 부족을 구해 주신다니.”

“그 대신 홍준기 씨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요? 말만 하세요. 저, 센추리에 목숨 건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을 구원해 주시는 것은 제 가족을 구원해 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말에 지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준기를 노려보았지만 호영도 준기도 개의치 않아 하였다. 호영은 그런 준기를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저의 부탁은 한 가지입니다. 앞으로 센추리에서 저를 지지해 주십시오.”

“……그것이 부탁입니까? 굳이 부탁하지 않으셔도 저는 호영 씨를 지지할 것입니다. 호영 씨가 추장이니 당연한 이야기죠. 게다가 호영 씨가 저보다 한 살 위이지 않습니까?”

“나이 한 살 많다고 상급자 행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운을 남긴 채 잠시 말문을 닫은 호영은 강렬한 눈빛으로 준기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 부탁은 홍준기 씨의 말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번 회 차만이 아니라 다음 회 차, 그다음 회 차에서도 홍준기 씨의 지지를 바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즉, 센추리에서 홍준기 씨는 영원히 저의 수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호영이 굳이 지금 같은 시기에 강 너머로 진출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유저 출신의 수하를 얻는 것. 이 정도면 희생을 무릅쓸 이유로 충분하였다. 게다가 그 유저가 ‘홍준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다음 회 차에 내 아바타의 신분이 정확히 무엇일지 확신할 수 없다. 대준이 추장에서 물러날 수도 있고 사사의 아들이 추장의 직위를 잇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유저 출신의 수하가 현리 부족의 일원으로 있다면 추후 권력을 얻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야.’

다수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으니 아무리 못해도 간부급의 지위는 갖게 될 터. 그때 준기가 정치적으로 지지해 준다면 추장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를 제외하고도 준기를 얻어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만약 눈앞의 홍준기가 호영이 아는 그 홍준기라면 그의 쓰임새는 더욱 다양해질 것이고 말이다.

“영원히 말씀이십니까……? 좋습니다.”

“오빠! 그걸 허락하면 어떡해!”

준기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는데 정작 당사가가 아닌 지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로선 겨우 한 번 도움 받는 것으로 평생을 떠받들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도 센추리에서의 삶이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현실이라 할 수 있는 센추리 세계에서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물을 상관이랍시고 떠받들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말했잖아, 우리 부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 말하자. 어차피 나는 추장이나 지도자가 될 생각이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저 센추리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해.”

“…….”

지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친동생이라 해도 준기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우리 부족을 구해 주십시오. 부족만 구해 주신다면 센추리, 아니 현실에서도 호영 씨를 지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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