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44화 (44/345)

# 44

‘유약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부탁을 하다니.’

하지만 호영으로선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그를 중히 써야 되는데 괜히 노예제를 반대하면 오히려 곤란하기 때문이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해 주지.”

“가, 감사합니다!”

“대신 공을 세우도록. 공을 세우면 그들을 너의 노예로 줄 수 있다.”

“……!”

“그러니 게임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최대한 노력하도록 해.”

준기는 크게 감격한 얼굴을 하였다. 호인족에게서 구해 준 것도 감사할 일인데 이같은 기회까지 쥐여 주다니!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감사할 일도 아니지만 제2의 현실이라 생각되는 센추리 세상이었기에 준기로선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떤 것이든 시켜 주십시오!”

그런 준기를 보며 호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유저들

“매직 앤 소드도 이젠 지겹단 말이지.”

민건우. 그는 돈 많은 한량이었다. 워낙 집안에 돈이 많아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는데, 그야말로 모든 백수들이 꿈꾸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백수들이 꿈꾸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우라고 만사가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건우는 무료함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떠한 자극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 건우는 그 무료한 일상에 질려 가고 있었다.

‘센추리가 진짜 재미있기는 했었는데. 짜릿하면서 뭔가 새로웠었지.’

그가 갑자기 무료함을 느끼는 이유는 몇 달 전에 잠시 했던 센추리라는 게임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이었던 게임.

하지만 건우에게는 엄청난 자극을 주던 게임으로 기억되었다. 아니, 자극을 넘어 생전에 느껴 본 적이 없었던 희열감과 짜릿함을 맛보았던 게임이었다.

어떻게 보면 건우의 인생에서 센추리는 일종에 터닝 포인트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센추리를 했던 그 시간은 건우로선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다.

‘문제는 너무 무섭다는 거야. 특히 그 호랑이 얼굴을 한 놈들은…….’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옛 기억에 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센추리는 그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안겨 주기도 하였다.

느닷없이 쳐들어와 부족을 학살하던 호랑이 머리의 인간들! 건우는 그들이 떠오를 때마다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 트라우마 때문에 센추리 세계를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센추리에 접속하면 그들을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아, 어찌해야 하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린 건우는 오랜만에 센추리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물론 공식 홈페이지라고 해 봤자 센추리 회사가 만든 것이 아닌, 한국 유저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사이트였다.

어쩌다 이곳이 유저들에게 공식 홈페이지로 인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유저들 대부분이 이 사이트를 이용하니 건우로서도 다른 사이트를 이용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이 많이 늘었네?’

사이트에 접속한 건우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게시물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날짜를 보면 모두 오늘 하루 동안 작성된 게시물들이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센추리가 확실히 ‘인기’ 있어 졌다는 사실을. 물론 센추리의 재미를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건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이트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최근 그의 일상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던 까닭이다.

‘초보자의 섬은 여전히 그때와 똑같네. 뭐, 나름 매력적이긴 한데 나는 몸 다루는 것엔 자신이 없단 말이지. 너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센추리의 매력은 그 리얼리티에 있는데 말이야.’

사실 건우가 아바타만 포기한다면 센추리를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초보자의 섬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새로운 아바타로 다시 시작하거나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바타를 포기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바타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살을 하여 분신을 없앤다? 당장은 센추리를 즐길 수 있겠지만 건우가 생각하는 센추리만의 매력은 영원히 잃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센추리를 지겨워하며 다른 게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기에 건우는 아바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무료함에 몸서리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건우는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사이트를 훑어보았다.

두 시간 가까이를 소모하여 사이트 전체를 훑었을까? 건우는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그야말로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다.

‘하고 싶다! 정말 하고 싶다!’

센추리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 사이트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면 어느 정도 욕구가 충족될 줄 알았건만, 오히려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결국 건우는 이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상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였으니. 한마디로 일상의 무료함이 뿌리 깊게 박혀진 트라우마를 이겨 낸 것이었다.

스르르. 건우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먼지 쌓인 캡슐에 그대로 누워 센추리를 실행한 것이다.

‘우웅’ 하는 기계음이 들리며 건우의 정신은 순식간에 센추리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막상 오긴 했는데, 불안하네.’

아직까지도 호인족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도저히 호인족을 마주할 자신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건우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즉, 아바타에 동기화하지 않은 채 구경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아바타는 무사하였다.

건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상황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느낌, 오랜만이야. 정신은 깨어 있는데 몸은 저절로 움직이는 느낌. 마약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센추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이질감에 건우는 환희를 느꼈다. 이 느낌을 얼마나 고대했었던가!

방구석에 있는 센추리 기기를 볼 때마다 이 느낌을 그리워하였었다. 이것을 느껴 보겠다고 트라우마도 무시하고 센추리 세계에 진입한 것이었다.

건우는 환희에 젖은 채 아바타의 시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게임 시간으로 벌써 몇 년이 지났기 때문일까?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과는 너무도 다른 광경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뭐지? 호인족의 부락이라고 우리 부족과 그리 차이 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건 거의 도시 수준이잖아.’

건우가 마지막으로 센추리에 접속했을 때 그의 아바타는 이미 호인족에게 잡혀가 노예로 부림을 받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도 호인족 부락의 내부 모습이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호인족이 군사적으로 강하다고 해도 문화적으로 월등하거나 규모가 압도적이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한마디로 지금 그의 시야에 비친 부락의 모습은 결코 호인족의 부락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건우는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원인 모를 기대감을 품은 채 아바타의 일과를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이 거대 부락의 주인은 인간인 것 같았다. 어디를 보아도 인간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한 그의 아바타는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아무런 감시도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목책 바깥조차 거리낌 없이 나갈 정도였다.

목책을 아무렇지 않게 오가다니! 호인족의 감시도 감시지만 목책 바깥의 위험 요소들을 생각하면 결코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부족이 호인족에게 정복당하기 전만 해도 목책을 나갈 때면 최소 전사 열 명이 함께 움직이지 않았던가.

그만큼 센추리 세상은 안전이랑 거리가 먼 세계였다. 하지만 지금 건우의 아바타가 위치한 부족은 적어도 안전만큼은 확실하게 확립된 곳인 것 같았다.

건우의 아바타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족민들 또한 아무렇지 않게 목책을 오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허. 고작 몇 년 만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애초에 이것을 과연 변화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 이건 뭐, 적응하기 어려울 정돈데.’

호인족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시대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은 거대한 부락의 모습은 건우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놀란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잘 훈련된 인간 전사, 아니 인간 병사들. 그리고 그 강력하고 두려운 존재였던 호인족이 인간의 노예로 있다는 사실은 건우에게 경악에 가까운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운 변화!

건우는 경악했고, 당황했으며, 전율하였다.

처음에는 더 이상 호인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당황했다면, 이제는 그 호인족보다 신분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에 전율한 것이었다.

‘호인족을 내 노예로 만들고 싶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었다. 호인족은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다주던 존재였다. 이 두려움과 공포심을 씻어 내기 위해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건우 역시 평범한 인간. 당한 만큼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건우는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아바타의 일상을 관찰하였다.

게임을 했으면 게임을 즐겨야 하는 게 맞겠지만 그는 지금 호인족 노예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사실 아바타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다. 건우의 아바타는 친위대 소속의 십장이었는데, 현대의 군인과 달리 병사의 권위가 상당한 곳이었기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훈련을 빡세게 할 때면 조용히 로그아웃하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십장이니, 친위대니 하나같이 센추리와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뿐이군. 심지어 경어까지 사용하잖아? 역시 이 부족은 유저가 경영하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센추리의 세계관은 원시 시대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부족만은 센추리의 세계관과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의복이나 생활양식을 보았을 때, 그렇게 유별난 수준은 아니었다. 가죽으로 된 의복을 입는 것이나, 원시적인 생활양식을 갖는 것은 동일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변화 속도라면 생활양식이 바뀌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일 같았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부족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건우는 유저의 존재를 확신하였다. AI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 정도의 변화를 고작 몇 년 만에 이루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필시, 뛰어난 유저가 부족을 변화시키고 있으리라.

‘추장이 가장 유력하군. 그렇다면 일단 추장에 대해 알아볼까?’

이만한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유저가 지도층에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 부족은 추장이라는 자가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하는 부족이었다.

건우로선 추장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센추리에 접속하여 자신의 아바타를 관찰한지 사흘 째 되던 날, 마침내 동기화를 시도하였다.

제 손으로 직접 추장이라는 자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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