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46화 (46/345)

# 46

센추리에서는 군신 관계이자 사제 관계이고 현실에서는 거의 의형제 관계라 볼 수 있는 사내.

바로 홍준기가 공터 한복판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호영은 혀를 내두르며 탄성을 내질렀다.

홍준기. 회귀 전, 문파의 수장이라고 불렸던 자답게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 물론 현실에서의 준기는 빼빼 마른 몸답게 무술은커녕 기본적인 운동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못했다.

정신과 육체가 극단적으로 갈린 것인데, 센추리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으나 센추리가 존재함으로써 그의 재능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재능 역시 호영이 없었다면 뒤늦게 빛을 보았을 것이다. 애초에 호인족의 노예로서 살아가며 수련은커녕 목숨을 연명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터.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호영이 있었고, 그 덕분에 원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그의 재능이 개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개화된 재능은 호영조차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현실 시간으로 반년도 안 되어 스킬을 만들어 내는 수준!

비록 그가 만든 스킬들이 최고가 C급인, 마나를 필요치 않은 무술 스킬들이라고 해도 ‘스킬 제작자’가 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스킬의 원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호영처럼 계승 특전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가르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유저도 그가 만든 스킬을 스킬로 만들 수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벌써부터 마나를 감지하려고 한다는 것이지. 이러다가 보법까지 스킬로 만드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우는 재능. 이전의 호영이었다면 미치도록 탐이 났을 천재적인 재능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호영은 부러워하기는 하나 결코 질투하거나 시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준기의 재능이 개화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호영, 그 역시 준기를 가르치는 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던 까닭이다.

“이제 대련하자.”

“예, 알겠습니다, 추장님!”

준기의 성장을 확인한 호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대련을 함으로써 수련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러자 준기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련에 응하였는데 호영은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준기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해도 수련이란 결코 즐길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호영과의 대련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영은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센추리에서는 특히나 배려심이 부족한 편에 속하였다.

한마디로 봐주지 않고 공격한다는 것인데, 치명타를 가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자칫하다간 ‘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을 거침없이 퍼붓는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호영의 체력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맹공을 쉬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체력을 가졌는데, 당하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정신을 붙잡기도 힘들 정도였다.

호영과의 대련은 정신과 육체를 극한의 극한까지 내모는 수련이었다. 그런 수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한다니. 그것도 즐기면서!

어쩌면 이것은 준기가 가진 무에 관한 재능보다 훨씬 대단한 자질일 수도 있었다. 천재도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수련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니까.

‘하필 지금 오는군.’

준기와 한창 공방을 나누는 도중, 은근하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민.

유저로 의심받는 병사였다. 며칠 전부터 뜬금없이 자신에 대해 탐문하였고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수상한 행동들을 하였다.

이미 현리 부족 내부에 존재하는 유저를 여러 명 색출해 낸 호영이기에 당연히 민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원재를 시켜 불러온 것이었지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하필 대련할 때 찾아오다니. 이렇게 된 거, 본래의 목적대로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슬슬 끝내자.”

호영은 준기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더욱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련을 빠르게 끝내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준기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는데 지금의 준기는 그야말로 쩔쩔매며 간신히 막아 내는 모습이었다.

결국 준기는 호영의 공격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창날 끝이 목에 닿자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준기와의 대련을 끝마친 호영은 곧장 고개를 돌려 ‘민’이라는 이름의 병사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는 호영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예?”

“이름이 뭐냐고.”

“민입니다만…….”

“아바타 이름 말고.”

“……!”

민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당혹감이었다. 단도직입적인 호영의 질문에 당황한 것이 분명하였다.

호영은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하였다. 유저가 맞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름 밝히는 것이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추장께서도 역시 유저셨던 것입니까?”

“알아보고 다녔잖아. 예상한 일이었을 텐데? 애초에 사이트 조금 뒤져 보면 내 정보를 찾을 수 있을걸. 누군지 몰라도 내 부족과 나에 관해 나름 자세하게 적어 뒀던데.”

센추리를 플레이하는 유저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서울에서만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었다. 그중에 튜토리얼을 깬 유저는 적어도 수백 명은 될 것이고 말이다.

현리 부족은 센추리에서 서울에 해당하는 지역에 근거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울의 강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는데 이곳에도 유저수가 수십 명은 될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지역에서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현리 부족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인간족, 아니 오크족과 거인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 중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세력!

아무리 소식이 느린 세계라고 해도 현리 부족처럼 거대한 세력이라면 유저들도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유저들 사이에서 현리 부족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지대했다.

현리 부족의 군사력은 어떻게 되나?

부족에 소속된 유저의 숫자는?

추장은 누구일까?

커뮤니티에서는 이같은 의문들이 조금씩 퍼져 나가는 상황이었다. 호영의 말처럼 잘만 찾으면 현리 부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유저들은 본 게임보단 초보자의 섬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근데 유저라면 왜 저에게 반말을 하시는 거죠?”

유저라는 사실이 확증되었기 때문일까?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거리던 민이 정색한 채 그렇게 말하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민의 입장에서는 호영의 태도가 무례하게만 느껴졌을 터.

아무리 추장과 일개 십장의 관계라고 해도 그것은 센추리 안에서의 관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게임으로 따지자면 길드의 마스터라는 이유로 통성명도 나누지 않은 길드원에게 반말하는 셈이었다.

“게임하고 싶다면 자살해. 죽은 뒤에 초보자의 섬에 가서 즐기고 싶을 대로 즐겨.”

“예?”

“너는 게임하러 온 것이 아니잖아?”

그의 말은 단순 명료하였다. 제2의 인생을 살아 보기 위해 센추리에 접속했다면 그 인생에 집중하라고!

한마디로 현실은 잊으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런 호영의 말에 민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민 역시 지금 당장은 건우라는 이름보다 민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니 대충 알아들은 것 같네.”

“……일단은 추장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다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강요하거나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행동한다면…….”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권력자 놀이 같은 건 질색하는 사람이거든.”

물론 그라고 권력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황제를 꿈꾸는 이가 권력을 싫어할 일은 없었고 말이다.

다만 호영은 현실주의자로서 굳이 권위적으로 나가 유저들의 반발을 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무튼 추장으로 인정한다니,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너는 왜 튜토리얼을 깬 것이지?”

신상 정보나 보유 스킬을 물어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유저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함으로, 제국을 만들기 전까지는 유저들을 최대한 배려해 줄 생각이었다.

괜히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춰내 악감정을 키울 필요는 없는 법. 호영은 이미 몇 명의 유저 출신의 수하를 받은 상태였기에 유저를 대하는 데 제법 능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향을 알아낼 필요는 있었다. 그래야 어떤 당근을 주고 어떤 채찍을 줄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튜토리얼을 왜 깼냐고요? 그야, 게임을 하기 위해 깬 것인데?”

“어떤 유저는 살인이 재미있어서 튜토리얼을 깼다고 하지. 어떤 유저는 섹스를 하고 싶어서. 또 어떤 유저는 원시인의 삶을 체험하고 싶다며 튜토리얼을 깼어. 너는 이 중에 어떤 이유로 튜토리얼을 깬 것이지?”

평범한 유저라면 결코 튜토리얼을 깨지 않는다. 일단,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한마디로 튜토리얼을 깬 유저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호영으로선 유저들의 성향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유저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를 들면 권력을 원하는지, 아니면 일상을 원하는지, 그도 아니라면 살인이나 강간 같은 악질적인 것을 원하는지, 호영으로선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제가 튜토리얼을 깬 이유는 단순합니다. 초보자의 섬은 너무 가짜 같잖아요. 저는 현실적인 또 다른 세계를 원했습니다. 진정한 가상현실을 말이죠. 그리고 이곳은 제가 바라던 대로 모든 게 현실적이죠. 물론 그 때문에 잠깐 두려움에 빠져 살기도 하였지만. 뭐, 거기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뭐 그런 유저들도 제법 있기는 하지.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에 대해 탐문하고 다닌 것이지?”

“그야…… 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얻고 싶은 것은 오직 추장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죠.”

“그게 뭐지?”

“……노예입니다.”

“노예라고?”

“흠흠, 너무 이상하게 보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원하는 노예는 호인족이니까.”

“그게 더 이상해 보이는데?”

호인족을 노예로 원한다라…….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영은 피식 웃고 넘어갔다. 차라리 노예를 원하는 게 나았다. 그 정도면 호영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까.

호영은 건우의 한마디에 경계심을 대폭 낮추었다.

물론 그가 유저인 이상 경계는 계속하겠지만 ‘권력’이나 ‘스킬’을 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경계를 낮출 이유로 충분하였다.

“노예를 얻고 싶다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거래하자는 겁니까?”

“네가 나를 조사하고 다녔던 것도 그러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부족에 대한 장악력이 엄청 나신가 봅니다. 제가 뭘 하고 다녔는지도 다 아시고.”

“뭐, 그런 편이지. 무엇보다 정보를 관리하는 유저도 있어서.”

“그래서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네가 뭘 잘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여기, 상 백인대장도 유저 출신인데, 현재 훈련 교관을 담당하고 있지. 너의 아바타도 아마 상 백인대장에게 훈련받은 적이 있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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