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준기는 호영에게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훈련 교관으로서 병사들에게 기초적인 창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민을 이곳으로 데려온 우원재라는 사내도 사실 유저 출신인데 그는 현재 부족에서 정보를 관할하였다.
홍준기와 우원재 말고도 유저 출신의 수하가 두 명 더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호영에게 조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민 역시 호영의 수하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리 부족에 소속되어 있으나 별다른 직분이 없는 유저들도 존재하였다. 하나같이 아바타의 삶에 몰두하는 이들로, 그저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목적인 유저들이었다.
그러나 이 유저들은 일반 부족민이거나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유저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경계만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민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민은 특수한 경우이기에 유저로서 직접적인 조력을 해야만 했다. 센추리에서 못한다면 현실에서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는 딱히 자신 있는 게 없습니다만…….”
“현실에서는 뭘 하고 있지?”
“대학 다닐 때 광고홍보학과를 공부하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은 딱히…… 백수라서…….”
“광고라. 딱 좋네.”
“예?”
“우리 부족 좀 홍보해 줘야겠어.”
“홍보라고요?”
“카페에서든, SNS든 상관없다. 우리 부족을 널리 알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이지.”
“……왜죠?”
“이유가 중요한가?”
호영의 반문에 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그에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홍보하면 노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전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홍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점을 홍보해야 하나요?”
“지금은 그저 기본적인 것을 알리면 된다. 현리가 어떤 부족인지, 얼마나 국력이 강한지, 인구는 또 어떠한지. 한마디로 한국 최강의 부족이 누구인지를 한국 유저들 전체에게 알리는 거다.”
“그렇다면 크게 어려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결과를 보고 노예를 내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호영은 또 한 명의 유저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센추리에서가 아닌 현실에서 조력해 줄 유저를 말이다.
물론 아직 우원재나 홍준기처럼 현실에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고 썩 믿음이 가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일단 수하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였다.
1:4라는 시간 비율. 현실 시간으로 1년만 지나도 센추리에서 4년을 본 셈이 된다. 앞으로 그 또한 호영의 최측근으로 활약할 것이니 그때 서로에 대해 알아 가면 될 것이었다.
“아, 그런데 혹시 스킬들은 어떻게 얻으셨나요?”
두 사람의 대련을 보고서 이런 물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유저, 아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엔 터무니없는 실력들이었으니까.
민의 물음에 호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노예만 탐하더니, 스킬도 갖고 싶다는 건가? 하긴, 유저로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호영은 민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스킬을 알려 주는 것은 확실한 신뢰 관계가 구축된 이후에나 행할 일.
“스킬은 우리들만의 비밀이다. 알고 싶으면 우선 현리 부족이나 제대로 홍보해.”
“끄응, 알겠습니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뒤돌아서는 민.
호영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평가를 내렸다. 노예와 스킬이 있는 이상 일단 배신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이다.
#오크
호영은 집 근처의 치킨 사냥이라는 치킨집에서 두 명의 사내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 명은 이제 너무도 익숙하여 의형제로까지 느껴지는 홍준기였고, 다른 한 명은 다섯 달 전 센추리에서 처음 알게 되어 세 달 전부터 현실에서까지 연을 맺게 된 우원재라는 사내였다.
“민이라는 유저, 제법 홍보를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원재. 현역 장교 출신의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군 전역한 이후 암울한 현실에 막막해하던 원재는 우연히 센추리라는 게임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호기심에서 게임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호기심 따위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센추리 기기를 살 수는 없으니까.
그는 게임하는 심정으로 센추리를 한 것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해 센추리를 시작한 것이었다.
머지않아 전 세계가 즐기게 될 전무후무한 가상현실 게임! 그의 예상대로 된다면 센추리를 빠르게 시작하는 것은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게임이든 먼저 선점하는 것만큼 유리한 것은 없을 테니까.
아무튼 센추리로 큰돈을 벌 생각을 하는 원재로선 호영이라는 존재는 놓칠 수도, 놓쳐서도 안 되는 귀중한 패였다.
현리 부족이라는 엄청난 세력을 경영한다는 이유도 이유였지만 호영의 결단력과 정보력 그리고 무술 실력과 리더로서의 카리스마 등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원재는 유저 중 유일하게 호영한테 충성을 맹세하였다. 다른 AI들처럼 진심어린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준기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나를 따르고 있지만 사실 이게 일반적이지.’
호영도 원재가 자신을 어떤 마음으로 따르기로 결정하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호영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배신할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 배신할지가 중요했다.
그리고 호영은 원재가 자신을 배신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감의 원천은 단순했다. 능력을 계속해서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원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능력을.
그렇기에 호영은 원재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민이라는 자는 믿을 수 없어.”
“두 유저처럼 말입니까?”
원재의 합류 이후, 두 명의 유저가 추가로 합류하였다. 실제 나이도, 아바타 나이도 마흔을 넘어가는 중년 유저들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 두 유저와 현실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셋 다, 진지함이 너무 결여되어 있거든.”
“나름 센추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래 봤자 게임이라고 생각할걸. 너처럼 평생직장으로 여기거나 준기처럼 제2의 인생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거야.”
“하기야 접속 시간도 그렇게 길지는 않죠.”
원재는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기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저들이 아니야.”
“오크입니까?”
“그래.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업은 오크들을 정리하는 것뿐이야.”
나직한 그 한마디에 원재가 몸을 움찔거렸다.
오크족!
그들은 타고난 전투 종족이었다. 근력과 체력 그리고 가죽의 단단함까지, 싸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현리 부족이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지만 오크족만큼은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숫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전사 하나하나가 괴물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정리할 필요가 있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은 호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반대로 말해서 호영이 부재한다면 전성기는 더 이상 이어 갈 수 없었다.
만약 전성기가 끝난 시점에서 오크가 침략한다면? 현리 부족은 어쩌면 멸망당할지도 모른다. 오크의 힘은 그만큼 무시무시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오크족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지금 당장의 안위을 위해서가 아닌 앞으로 100년 동안의 안위를 위해서 말이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무섭나?”
원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보를 관리하는 자였기에 더욱더 잘 알고 있었다. 오크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말이다.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다 생각이 있으니. 그리고 너는 출전하지 않을 거야.”
“예? 왜 저는 출전하지 않습니까?”
“네가 부족에서 해야 할 일들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거, 너도 알잖아? 어떻게 보면 그것만큼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없어.”
“하지만 제 싸움 실력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너를 믿고 부족을 맡기는 거야.”
원재는 호영의 그같은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둘의 대화가 끝나자 조용히 맥주를 마시고 있던 준기가 문뜩 입을 열었다.
“형님. 저는 같이 출전하는 거죠?”
“물론이지. 네가 빠질 수는 없어.”
호영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준기는 현리 부족에서 호영 다음가는 실력자였다. 그만한 실력자를 전쟁에 데려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실전을 겪어 놓고 아직도 실전이 두려운가?”
“저는 천성이 그런 것 같습니다.”
준기는 유약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비쩍 마른 체구에 유약한 미소.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연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준기를 보며 호영은 픽 웃음을 지었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면서.’
무술을 좋아하는 준기답게 호전성이 의외로 상당했다. 무엇보다 부족의 변절자를 자신의 노예로 만든 것처럼, 유약하기만 한 성정을 가진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도 호영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셋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호영은 치킨집에서 나오며 둘에게 당부하였다.
“이제 얼마 동안은 쉴 틈도 없이 바쁠 거야. 그러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휴식을 즐겨. 특히 준기. 수련도 좋지만 너의 동생과도 같이 놀고 그래.”
“예. 그런데 어차피 지영이도 센추리만 하는 애라서, 하하하.”
“너희 남매는 볼 때마다 특이하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잘 쉬어라.”
“들어가세요, 형님.”
“편히 쉬십시오.”
그렇게 두 사내와 헤어진 호영은 집에 도착하는 즉시 샤워부터 하였다. 샤워가 끝난 후 수면하였는데 잠자는 그의 머릿속에는 센추리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잠에서 깨어난 즉시 그가 행한 일도 센추리였다. 준기와 원재에게 잘 쉬라고 당부했으면서 막상 자신은 쉬지도 않고 센추리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센추리를 하지 않으면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으니까.’
센추리에 접속하니 그의 아바타 대준은 한창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호영은 동기화를 하지 않고 가만히 대준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참고로 아바타 행동 설정에 ‘수련’을 집어넣은 지는 제법 오래된 일이었다. 정확히는 준기를 가르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누군가의 수련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얻는 게 많다.’
과거에는, 그러니까 회귀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그때는 전장에서 살아남기도 벅찼을 때니까. 지휘관으로서 자리 잡은 7회 차 이후에는 사실상 무력을 키울 시간이 없었다.
병사들을 통제하고 전쟁을 치르며 정치까지 해야 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누군가를 통해 창술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회귀하고 나서 준기를 가르치니 느낀 점이 참 많았다. 그중에서 누군가의 수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얻는 게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그것이 강자라면 얻는 게 더욱 많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