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49화 (49/345)

# 49

#두 거인

현군은 인상을 찡그린 채 잠에서 깨어났다. 상체를 일으킨 현군은 북쪽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광군, 또 미쳐 날뛰는 것이냐. 마족은 더 이상 땅 위에 존재하지 않건만.”

북쪽에서부터 느껴지는 흉포한 기운. 폭군처럼 전성기가 지나 노쇠해진 거인은 결코 낼 수 없는 거대하면서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이만한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족 학살자, 광군! 그 어떤 세력도 보유하지 않은 채 고독하게 생활하는 거인답지 않은 거인이었다.

하지만 광군이 가진 무력만큼은 거인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동족과의 혈투에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증명되었다.

‘광군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기는 하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무엇보다 싸움밖에 모르는 미친 종자와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고.’

그는 거인이었지만 전쟁광은 아니었다. 특히 동족과는 절대 싸우지 않으려 했다. 동족과 싸우고 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군은 오크족의 족장을 불러들였다.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된 오크족의 족장은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현군 앞으로 가서는 부복하였다.

부복한 오크족의 족장을 잠시 내려다보던 현군은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크여, 동족을 이끌고 남진하라.”

“취익? 취익?”

현군의 말이 끝나자 오크족의 족장은 마치 현군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였다.

‘폭군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몇 년 동안 현군의 명을 충실하게 따라 왔기에 이제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물론 단순히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은 아니었다. 현 오크족의 족장. 그는 무척이나 영리한 오크였다. 거인의 언어는 물론이고, 인간과 수인족이 쓰는 언어까지 알아들을 정도로 말이다.

‘늙었다는 게 안타깝군. 올해를 넘기지 못하겠어.’

오크족의 족장을 내려다보며 현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충성스러운 부하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게 어진 군왕을 자처하는 그로선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오크의 죽음이 아니었다.

“폭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적이 남하하고 있다.”

“취이익!”

‘알겠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하는 족장.

그때였다.

‘취익!’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십여 마리의 오크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현군에게 부복한 채 말했다.

“취이익, 취익!”

당연하겠지만 현군은 오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크족의 족장이 있었다.

오크족의 족장은 어설픈 거인의 언어로 현군에게 오크들이 내뱉은 말들을 설명해 주었다.

“뭐라? 인간들이 쳐들어왔다고?”

현군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로서는 황당할 만하였다.

나약하고 열등하기 짝이 없는 인간족이다.

그런 인간족이 오크를 공격한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인간족이 오크를 공격해 왔다면 그들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현군은 그 뒤에 있을 자가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콰앙!

‘폭군! 지나치게 조용하기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건만 나를 속였던 것이냐?’

현군은 얼마 뒤에 마주칠 폭군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인간족의 습격. 당연히 그 배경에는 폭군이 있으리라.

‘위에서는 광군, 아래에서는 폭군이라……. 쌍으로 난리를 치는구나. 광군은 어쩔 수 없이 무시한다 해도, 폭군 당신만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 현군이었다.

* * *

각개격파!

오크와의 전쟁은 철저하게 각개격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상황.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해야 됐다. 그리고 오크족의 전투 방식은 각개격파를 시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였다.

마치 예전의 현리 부족을 보듯 그들의 전력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못하였다. 즉, 다섯 마리에서 열 마리의 소수 병력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크족의 활동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 터라 서로 간의 연락 체계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 보니 오크족은 전면전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것은 이백 마리에 달하는 오크족 전사들이 겨우 이틀 만에 몰살당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생각보다 쉽네요.”

너무도 순조로웠기 때문일까? 대준의 자식, 대성이 아쉬운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제대로 된 전투를 보지 못해서 실망하는 모양새였다.

‘어린아이다운 말이긴 한데, 저런 광경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과연 어린아이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호영은 그런 대성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세 살에 불과한 아이였다. 한창 좋은 것만 보여 줘야 할 나이.

그런데도 전장을 데려와서는 교육이랍시고 잔혹한 전장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제아무리 AI라지만 아이에게 너무 못된 짓을 하는 게 아닌지 회의감이 들었다.

호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옆에 있던 초강이 엄한 목소리로 대성을 질책했다.

“대성! 방심하지 마라! 앞으로가 시작이다!”

엄한 목소리였지만 대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보였다. 초강의 말에 호영이 동조하며 말했다.

“친위대장의 말대로다. 어제야 살아남은 오크가 없으니 오크족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살아남은 오크가 있다. 내일은 분명 다르게 대응할 것이야. 그러니 똑똑히 보아라.”

이러한 호영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음 날이 되자 오크족의 움직임이 돌변한 것이다.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크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정찰병들의 보고. 그 보고는 한 가지를 의미하였다. 오크가 한곳에 집결했다는 것!

“이제부터 진짜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어떤 전략을 취하실 생각입니까?”

“처음 계획대로 간다.”

호영의 말 한마디에 이틀 동안 단 한 번도 진군을 멈추지 않았던 친위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진군을 멈춘 친위대는 사방으로 정찰을 보냈다.

다음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적의 움직임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북쪽으로 정찰하러 갔던 병사들이 본진으로 돌아와 보고하였다. 보고 내용은 오크족의 집결이 완료된 것을 확인했다는 것.

집결이 완료된 오크족의 숫자는 무려 삼백이었다.

정확히는 삼백이 조금 안 되어, 대략 이백쉰에서 이백일흔 정도 되는 규모.

아군의 숫자도 이와 비슷했다. 삼백 대 삼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숫자는 같아도 아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오크족의 전투력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영은 자신 있었다. 당연한 자신감이었다.

전쟁. 그에게 있어 그보다 자신 있는 것은 또 없었다.

7회 차에서 그가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 전쟁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창을 유별나게 잘 쓰는 것도, 그렇다고 재력이나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호영.

그가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쟁뿐이었고, 그는 전쟁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숫자는 예상했던 대로다.’

숫자가 같다는 것은 변수가 없다는 뜻. 호영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정찰병에게 물었다.

“거인은 보이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오직 오크밖에 없었습니다.”

“좋아.”

정찰병의 보고에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이 왜 보이지 않는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거인족은 지독하리만치 게으른 족속들이었다. 이것은 폭군만 보고 판단한 결과가 아니었다.

센추리 공식 홈페이지.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다양한 정보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세계 최강의 종족인 거인족에 관한 정보도 무척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인족에 대한 정보는 마치 한 명이 쓴 것처럼 모조리 똑같았다. 무척이나 게으르다는 정보 말이다.

‘오크들이 봉변을 당한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리라.’

처음 전쟁을 준비할 때 이런 예상을 했었고 결과적으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호영은 곧바로 지휘관들을 불러 이 같은 명령을 내렸다.

“퇴각을 준비시켜라.”

뜬금없는 명령. 기세를 타고 있었기에 더욱 뜬금없게 느껴지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초강과 백인대장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명을 받들었다.

그러자 친위대원들은 발 빠르게 퇴각 준비를 완료하였고, 이윽고 호영의 입에서 퇴각 명령이 내려지자 곧바로 퇴각하였다.

당연하겠지만 퇴각하는 와중에도 정찰병을 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퇴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병들이 보고하였다.

“오크족이 진군을 시작하였습니다.”

“슬슬 매복을 준비해야겠군.”

매복 작전! 호영이 오크족을 상대하기 위해 생각한 전략이었다.

오크족의 전투력이 무지막지하여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다면 기책으로 상대하면 될 일.

그런 의미에서 매복만큼 적절한 것은 없었다. 다행히 오크가 나다니는 길목에 매복 작전을 펼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장소가 존재하였다.

“이곳에서 오크족을 상대한다.”

“충!”

“매복 작전의 지휘는 초강 대장이 한다.”

갑작스러운 호영의 명령에 초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같은 명령은 사전에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장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상 백인대장과 따로 행동할 거다.”

“……알겠습니다.”

“상 백인대장! 나를 따라와라.”

“충.”

친위대가 매복을 준비하는 동안 호영은 준기와 단둘이 움직였다.

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처녀지. 호영은 그곳에서 몸을 엄폐한 채 준기에게 말했다.

“매복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어. 그러니 우리가 활약해야 한다.”

둘이 별동대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조잡한 목궁과 돌멩이를 날리는 투석구 따위로 오크에게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10퍼센트, 아니 5퍼센트만 잡아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즉, 삼백 마리 중에서 열 마리에서 스무 마리만 잡아도 성공적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호영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역할이 크군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준기의 얼굴에는 초조함이나 긴장감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오크와 실전한다는 생각에서인지 희열감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준기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아직 네가 해야 할 일들은 많으니까.”

호영이 그렇게 주의를 줄 때, 오크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삼백 마리의 오크! 확실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대지가 울리고 공기가 진동하는 기분.

아니, 땅이 울리는 것은 단순히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크들의 발걸음에 땅이 진동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엄청난 무게감이었다.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네요.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쉿. 집중해라.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거다.”

그의 말대로 오크족의 대열은 어느덧 친위대가 매복했던 언덕 인근의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곧 매복 공격이 시작될 터.

“어? 뭐지?”

“오크들이 멈췄습니다.”

“설마 눈치챈 건가? 하지만 어떻게?”

대열의 중심이 매복지에 닿기 직전, 갑자기 오크족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멈출 상황이 전혀 없었는데도 진군을 멈추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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