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더군다나 정통성도 갖추었다. 그는 최초로 폭군에게 저항했던 스무 명의 결사대 중 한 명이니까.
물론 호영으로선 정통성보단 그의 충성심을 더욱 생각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내가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초강이 추장이다.”
결정을 내렸으면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하는 법.
호영은 정찰병들에게 거인의 참전을 듣자마자 곧바로 후계 문제를 확정 지었다.
그러자 당사자인 초강부터 시작하여 유저 출신의 준기까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준기도 후계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너도 들었다시피 머지않아 거인이 이곳으로 올 거야. 그리고 나는 그 거인을 혼자서 막을 생각이지.”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혼자서 거인을 상대하겠다니!
만약 다른 사람이 이같은 말을 했다면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내뱉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호영이었다. 객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전율스러웠다.
“추장님, 저는 안 데려갑니까?”
그때 준기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호영은 잠시 웃음을 짓다가 그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너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 오크족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하지만…….”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런데 네가 있으면 도망치기가 쉽지 않지.”
“아직은 방해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준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름 성장했다지만 호영과 비교하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그것을 알기에 준기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추장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오크와의 전쟁이 끝난다면 그때는 추장님과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도록.”
처음 거인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친위대의 병사들은 반쯤 패닉에 빠졌다. 거창하게 세계의 지배자라고 표현할 필요도 없이 거인은 존재 자체만으로 두려움을 안겨 주는 종족이었다.
숫자가 많다고 거인을 상대할 수 있을까?
친위대의 그 어떤 병사도 자신 있게 거인을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크조차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면서도 거인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호영의 이 한마디는 병사들에게 있어 큰 힘이 되었다.
“거인은 내가 상대할 것이다. 너희는 오크들만 맡아 주면 된다.”
홀로 거인을 상대하겠다는 호영의 선언! 병사들은 환호하였다.
이미 거인을 죽여 본 경험이 있는 그들의 추장이었다.
추장이 나선다는데 더 이상 거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리라!
호영은 그렇게 모두의 환호를 받고 홀로 전장으로 떠났다.
물론 그 혼자 전장으로 떠났다고 해서 그 혼자만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호영이 떠나기 무섭게 친위대와 오크의 전투가 재개되었으니.
하지만 거인을 상대하는 것은 그 혼자였기에 병사들로선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호영이 거인을 상대로 승리하고 돌아온다면 그들의 충성심은 더욱 절대적으로 변하리라.
‘1회 차 유저들이 아무리 되도 안 되는 전설들을 잘 만든다 해도 나 이상의 전설은 만들지 못하겠지?’
두 마리의 거인을 죽인 이가 그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애초에 한국에서 거인을 잡았다는 유저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외국에서도 거인을 잡았다는 유저가 제법 있었지만 두 마리 이상의 거인을 잡았다는 유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거인 하나를 잡은 것도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거인을 상대하러 나서는 호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또 하나의 업적을 만들러 가는 길.
분명 위험하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이 많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웃을 수 있었다.
그때 호영은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폭군보다 강인해 보이는데?’
무언가의 정체는 거인이었다. 그것도 호영이 익히 본 적이 있는 폭군이라는 이름의 거인보다 훨씬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거인.
하지만 호영은 탄성을 내질렀을 뿐,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곧추 세운 채 거인의 정면으로 달려갔다.
“우어어어어어어!”
마음에 안 들던 인간이 등장했기 때문일까? 거인이 다짜고짜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젠장, 소리 한번 질렀다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물론 진짜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땅이 울리는 것을 보면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고막이 상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거나 기절했겠지.
그만큼 거인의 포효는 호영이 느끼기에 비현실적으로 강력하였다.
“뭐,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예상한 일이었다.
물론 폭군 때보다 훨씬 강력한 포효였지만 마력이 있기에 타격을 입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 당황할 필요 없이 침착하게 상대하면 된다.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한 호영은 거침없이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영이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일까? 거인은 살짝 주춤한 기세로 호영의 공격에 뒤늦게 반응하였다.
콰앙!
인간이 거인을 공격하였는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보다 놀라운 것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거인의 무릎에 난 거대한 상처! 피가 콸콸 흐르는 것이, 한눈에 봐도 생채기 수준을 넘어섰다. 한마디로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과연 거인의 포효와 호영의 일격 중 누가 더 비현실적인지가 의문스러운 광경이었다.
“우어어어어어!”
당연하겠지만 거인도 통증을 느끼는 존재였다. 호영의 일격에 잠시 당황하였던 거인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까보다 한층 더 강렬해진 지진이 일어났다. 호영조차도 잠시 동안 몸을 가누기 어려워할 정도의 천재지변이었다.
호영이 마력을 일으켜 몸을 가누자, 때마침 거인의 비명도 멎었다. 비명이 멎은 동시에 진동도 멈추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에 호영은 소름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를 소름 끼치게 만든 것은 바로 눈빛이었다. 살기로 가득한 거인의 눈빛에 150 이상의 마력을 가진 호영이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
그때였다. 호영이 다급하게 ‘보법’을 사용하자 그가 서 있던 땅에 거인의 발이 마치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만약 그가 피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호영은 지금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변해 있었을 것이다.
호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거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였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거인은 일전에 죽였던 폭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속도만큼은 압도적으로 빠르리라!
그리고 거인이 속도가 빠르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또 없었다.
콰콰콰쾅!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피하는 것!
반격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150이 넘는 마력? 있으면 뭘 하나, 공격할 여건이 안 되는데.
보법도 마찬가지였다. 호영이 만들어 낸 보법은 걷거나 뛰는 것을 보완해 주는 무공에 불과하였다. 축지법처럼 공간을 접어서 이동하거나 순간 이동하는 그런 스킬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우, 후우.’
한참 동안 거인의 발 공격이 계속되었다. 이미 근방의 대지는 대규모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호영의 행색도 엉망진창이었다.
먼지와 땀 그리고 피와 풀 따위로 엉망이 된 모양새.
그야말로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모양새를 하면서도 아직 도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호영이 ‘승산’이라는 것을 엿보았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호영의 움직임은 점점 더 간결해지고 있었다.
마치 폭군의 얼굴 위에서 뛰어놀았던 그때처럼, 거인의 발 공격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마력을 사용하여 공격하는 것이었다면 조금 더 쉽게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저 정도의 육체에 마력까지 사용하면 더욱더 곤란하겠구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를 찾아 가는 호영이었다.
“우어어어어어!”
공격이 통하지 않아서 성질이 난 것일까? 거인의 포효에는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거인의 분노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이제 거인의 공격은 더 이상 호영에게 통하지 않으니까.
어느덧 호영은 거인의 공격을 피해 내기 무섭게 반격을 가하는 수준이 되었다.
호영의 공격은 어디까지나 급소가 모여 있는 상체가 아닌 거인의 하체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하나같이 가볍게 볼 수 없는 공격들이었다.
피를 찰찰 흘리는 거인의 모습만 봐도 호영의 공격 하나하나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영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피해를 강요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한 상황. 그러니 어떻게든 기회를 노려 거인의 급소를 공격해야 했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거냐?”
시간이 갈수록 거인의 공격에 적응하는 호영. 피하는 것도 수월해졌겠다, 이제 슬슬 승부수를 띄우려던 참이었다.
그런 호영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갑자기 거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변화? 아니, 그것은 변신이었다.
9미터였던 거인이 순식간에 10미터를 넘어 15미터가 되는, 말 그대로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호영은 거인의 변신을 가만히 기다려 주지 않았다.
거인의 움직임이 멈췄기에 나름의 여유가 생긴 상황. 더욱 집중하여 거인의 상처를 키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호영의 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챙!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고 밀려나는 호영의 창.
거인은 단순히 커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강철을 덧씌운 듯, 가죽이 몰라보게 단단해졌다.
호영의 공격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푸욱!
“……황당하네.”
마나를 일으켜 창기를 만들어야지만 약간의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그 사실이 호영으로 하여금 당혹감을 선사하였다.
거인의 몸이 금강불괴라도 된다는 말인가?
8회 차에서도 간혹 ‘외공’의 고수라는 이들이 존재하였다. 그들의 몸은 무척이나 단단하여 날붙이에도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실력자들의 입장에서는 보통의 인간보다 조금 더 단단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외공의 S급이 존재한다면 모를까, 8회 차의 그 어떤 인간도 ‘검기’를 맨몸으로 막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황당했다. 마력까지 일으킨 자신의 창이 이렇게 막히다니.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지만 15미터를 넘어서는 거인의 모습을 보면 바늘에 찔린 것과 다름없으리라.
심지어 그 조그만 생채기조차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방어력은 물론이요, 회복력까지 어마어마하게 상승된 모양이었다.
‘이건, 절대 이길 수가 없다.’
호영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폭군 때 그랬듯, 거인의 뇌를 파괴시킨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일단 거인의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높이도 정도껏 높아야지, 무려 15미터 이상의 높이였다.
90도 이상으로 경사진 곳에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올라간다고 해도 과연 폭군 때처럼 얼굴 가죽을 부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가죽의 두꺼움 정도가 폭군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만약 뇌를 파괴하려 한다면 아무런 방해 없이 한참을 두드려야 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