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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센추리-52화 (52/345)

# 52

당연하겠지만 호영이 공격하는 동안 거인이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지금만 해도 변신을 멈춘 채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어.’

작전상 후퇴. 호영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선 빠르게 물러났다. 어느덧 거인이 흉포한 포효를 내지르며 양 주먹을 하늘 끝까지 뻗어 올린 상황.

저 주먹이 땅에 닿으면 아까처럼 지진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후다닥!

추진력이 상당한 호영이기에 후퇴를 결정한 순간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순식간에 100미터 밖으로 벗어난 호영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

지금의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기겁할 것이었다.

땅이 요동친다? 고작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땅이 둘로 갈라진다.’ 이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표현 그대로 거인의 주먹에 땅이 갈라지고 있었다. 호영이 보기엔 마치 세상이 붕괴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영은 질린 얼굴을 한 채 보법을 최대한으로 사용했다.

이미 그가 디디고 있는 지반도 크게 흔들리는 상황.

100미터 정도가 아니라 최소 몇 킬로미터는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호영은 5킬로미터 정도를 체력이 다할 때까지 뛰었다.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는군.’

휴우. 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악착같이 도망친 적은 회귀하고서 처음인 것 같았다, 하기야 누구에게 도망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

호영은 거인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거인과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예상치 못한 패배. 그것도 압도적인 패배였다. 과연 다음에 붙는다고 전투의 양상이 달라질까?

호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은 ‘아직 모르겠다.’였다.

“폭군과 비슷한 약점을 가진 것 같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다른 이라면 진작 포기할 일이었지만 호영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너무도 무서운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항거 불능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전하고 또 도전하리라.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호영은 곧바로 거인을 찾아갔다. 워낙에 존재감이 강렬하기에 거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워어어어어!”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패턴이었다. 호영을 보자마자 공격을 시작하는 거인, 그런 거인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 내며 반격하는 호영. 마지막은 거인의 변신으로 끝났다.

어제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것으로 끝났지만 호영이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죽일 수 있겠어.’

* * *

흉물스럽게 변한 대지. 그 대지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던 거인, 현군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을 상대로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이지?”

더 이상 분노도 생기지 않았다. 말 그대로 허탈할 뿐이었다. 과연 그 인간 녀석을 죽일 수 있을까?

솔직히 현군으로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영악하고 지나치게 날렵한 인간이었다. 인간의 움직임은 굼뜨기 짝이 없는 현군으로선 따라가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폭군은 그 녀석이 죽였다고 봐야겠군. 그렇다면 그 녀석은 마족인 것인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마나’라는 것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마족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분명 있긴 했다. 실제로 10년을 주기로 마족이 세상에 등장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가 마족이라고 해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현군이 아는 마족은 결코 그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아. 문제는 광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거다.”

인간이건 마족이건 뭐가 중요한가? 지금 당장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현재 가장 큰 문제는 ‘광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그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상황.

광군이 내려오기까지 시간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광군이 내려온다면? 그 녀석도, 자신도 모두 죽는 것이었다, 같은 거인이라고 봐주는 존재가 아니니.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건가.’

철저히 무시한 채 남쪽으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항복하거나. 물론 마족으로 보이는 상대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패배를 인정하기도 뭐한 상황.

녀석을 죽일 방도가 없긴 하지만 반대로 녀석 또한 자신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서로 동등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그 녀석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시간만 충분했다면 항복은커녕 인간의 약점을 공략했을 터. 하지만 현군은 자존심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광군은 무척이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오히려 같은 거인이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인데, 괜히 광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미친 거인. 그것이 광군의 정체였다. 이제 광군도 현군의 존재를 파악하였을 것이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 터. 도망치기도 이제 늦었다.

그렇기에 현군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다. 거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선택이라 해도 말이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힘을 합쳐야 해. 마족이랑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든 광군을 막아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항복을 받아 주지 않거나 광군을 상대로 도망치는 선택을 한다면…….”

그때는 공멸밖에 없으리라.

* * *

하루가 지나 거인의 앞에 선 호영의 모습은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이미 거인의 약점은 파악이 끝난 상태.

오늘이야말로 이 기나긴 전쟁을 끝내게 될 것이었다.

‘오크?’

그런데 거인에게 다가가니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거인의 옆에 서 있었다. 그 존재란 다름 아닌 오크였다.

한 마리의 오크가 마치 호종하듯 거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 간.”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오크가 인간의 언어를 쓰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호영으로선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너는 뭐지?”

“나…… 오크 족장. 너, 마족이다?”

중간마다 ‘취익’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회화 실력이었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지?

속으로 그런 의문이 생겼지만 호영은 오크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상대가 대화를 원하는 상황에서 굳이 대화를 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내가 왜 마족이라고 생각하지?”

“마족, 아니다?”

마족이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크는 거인에게 고개를 조아린 채 말하였다.

“취이익. 취익.”

“우어어어어.”

“취익.”

호영으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거인과 오크 간의 대화가 끝이 나자 오크가 다시 호영에게 말했다.

“폭군, 죽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상대도 폭군과 같은 거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분명 거인들 간의 무슨 교류가 있었던 것이겠지. 그렇다면 폭군을 죽였다는 것을 숨기는 게 좋을까?

잠시 그런 고민을 하였지만 이내 사실을 말하기로 하였다. 굳이 상대를 의식하며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그 거인을 말하는 것이라면 내가 죽인 게 맞다.”

“…….”

거인을 죽였다는 발언에 충격을 먹은 것일까? 오크는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얼음이 되었다.

하기야 오크로선 충격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크족은 과거의 현리 부족 이상으로 거인에게 충성하며 신앙심까지 갖춘 종족이었으니.

그러나 멍청히 서 있는 것도 잠시였다. 오크는 이내 거인의 독촉을 받고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마족 아니다. 폭군 죽었다. 우리 싸움 안 한다.”

제법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호영은 용케 알아들었다.

“전쟁을 그만두자는 건가?”

“맞다. 손해다, 싸우면.”

오크는 말했다. 싸우면 손해라고, 그러니 이제는 화해하자고. 호영은 그런 오크의, 아니 사실상 거인이 하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은 항복 선언과 다를 게 없었다. 1회 차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거인이 인간에게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유저로서 어쩔 수 없이 ‘업적’을 생각해야 하는 호영으로선 이만큼 즐거운 일은 또 없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하였다. 아직 평화협정을 맺지도 않은 상태였고 무엇보다 호영으로선 거인의 항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싸우면 내가 이길 텐데, 왜 굳이?’

거인에게 투항을 받았다는 업적보다 거인을 죽였다는 업적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굳이 평화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지역의 한계로 받을 수 있는 업적이 적으니만큼 거인을 죽였다는 업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싸움이 두렵지 않아. 왜냐하면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거든.”

호영은 거침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오크도, 거인도 그런 호영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어어어.”

하지만 침묵도 잠시, 거인이 오크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 지시에 따라 오크는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싸움을 원하는 호영으로서도 오크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강적, 취이익, 온다. 너 혼자, 취이익, 안 된다.”

역시나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였다.

‘강적이 내려온다는 것인가? 나 혼자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었다. 눈앞의 거인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상황이건만, 호영이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라니?

호영을 설득하기 위한 기만책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감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야.’

전장에서 살아온 세월만 십 수 년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전장에서 살아가다 보면 간혹 직감이라는 것이 발휘될 때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단지, 위기가 남아 있는지 남아 있다면 어느 정도의 위기인지. 호영은 자신의 직감을 제법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직감이 말하기를, 아직 위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현군을 상대할 때도 그렇게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이 없는 호영이었기에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 *

“추장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흘 만에 보게 된 얼굴. 하지만 준기는 반가운 내색도 하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호영에게 물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다.”

“어쩌다가라니. 분명 적이었는데…….”

준기의 얼굴이 굳어진 이유는 단순했다. 호영의 옆에 절대 있으면 안 될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 현군!

얼마 전까지, 아니 이틀 전까지만 해도 호영과 치열하게 혈투를 벌였던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동료라도 되는 양, 호영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준기로선 놀랍고 꺼림칙한 일일 터. 호영은 그런 준기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거인을 막기 위해 거인과 힘을 합친다니.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영, 그가 현리라는 약점을 가진 이상에는.

‘설마 거인이 그리 똑똑할 줄은 몰랐지. 현리를 가지고 협박하다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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