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준기와 원재의 지원을 바랄 수 없는 것? 1회 차에서도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권력을 쟁취하였던 호영이었다.
조금 상황이 안 좋아졌을 뿐, 2회 차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호영은 대왕의 몸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접속하자마자 동기화를 시도하였는데 전혀 모르는 장소에 와 있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까 전까지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긴 해도 분명 현리였는데 말이다.
“이제 슬슬 공격하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호위대장.”
그때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호영에게 다가와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내의 머리 위를 힐끔 보니 ‘배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고로 배 씨 성은 현리의 네 마법사 일족 중 한 곳이었다. 배씨, 남씨, 유씨, 정씨. 이렇게 네 개의 성을 가진 마족 출신의 마법사 일족 중 한 곳이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호영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아직 상황 파악이 끝나지도 않았고 배상의 빈정거리는 말에 기분도 상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대략 70년 전, 난데없이 부족에 나타나 초강 일족을 쫓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일곱 명의 마족. 그중 세 명의 마족은 권력 다툼 때문인지 현재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나머지 네 명의 마족은 현리 부족의 권력자가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현리의 지배 일족으로 자리 잡았다.
마법사들이 권력자가 되자 현리 부족의 신분제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오직 노예와 부족민으로 이루어졌던 신분제에 최상위 계급, 마법사가 추가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호영의 눈앞에 있는 배상이라는 인물은 지배 일족의 일원이자 ‘마법사’라는 신분을 가진 상급자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힘이 없으니 참지만 내게 힘이 생긴다면…….’
그때는 마법사라는 족속들을 모두 처죽이거나 때려눕힌 뒤 굴종시키리라.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략 여든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면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힐끔힐끔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호영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내였다. 배상이 무엇을 요구했고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에게 어떤 것보다 익숙한 ‘전장’의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전쟁’일 터.
호영에게 있어 전쟁이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낸 호영은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하라!”
“와아아아아!”
공격 명령을 내린 호영은 자신도 정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호영의 눈에 ‘적’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렵게 굴종시킨 고블린과 왜 적대 관계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정리해 주마!’
호영이 상대해야 할 적. 그들은 바로 고블린이었다. 한때는 현리와 원만한 관계를 가졌던 종족. 하지만 지금은 그저 적일 뿐이었다.
* * *
전투가 끝났다. 당연하겠지만 인간 측의 완승이었다. 인간의 피해는 고작해야 열 명 정도. 사망자는 세 명에 불과하였다.
이 정도의 완승을 이끌어 낸 지휘관이라면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아무리 상대가 마물에 불과하다고 해도 비슷한 숫자를 상대로 꽤나 선전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오히려 자책하였다.
‘되도 않는 연기를 해 버렸군. 너무 어색했어.’
대왕이라는 아바타는 멧돼지 같은 인물이었다.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며 투박한 성격의 인물. 어떻게 보면 단순 무식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호영으로선 대가창법을 사용하기가 곤란하였다. 대왕 같은 인물이 고강한 창술을 사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호영은 창술을 쓰려는 마음을 억지로 참아 내며 무식한 전투를 하였다. 창을 쓰더라도 최대한 투박하고 직선적이게 사용하였는데 막상 연기하고 나니 후회되었다.
연기라는 사실이 너무 티가 났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전투가 끝난 뒤 배상이 갑자기 다가와서는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오늘따라 왠지 다르게 느껴지는데? 전투 방식도 조금 다른 것 같고.”
호영으로선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막 아바타로 전이된 상황. 벌써부터 의심을 받는 것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의 호영은 자세하게 조사하면 의심스러운 점이 분명 존재하였다. 바로 그의 몸속에 존재하는 마나였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제대로 호영을 조사한다면 마력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을 터. 그리고 호영은 마력의 존재에 대해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뭐, 어쨌든 말은 잘 듣는 것 같아서 좋군, 호위대장. 오늘처럼만 하자고.”
“……알겠습니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하는 배상을 보며 호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크게 의심을 받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배상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십장 정도의 지위를 가진 병사들 같았다.
“대장, 저 쥐새끼가 이번에는 뭐랍니까?”
“쥐새끼가 할 말이 뭐 있겠냐. 또 개지랄했겠지.”
“하! 맞는 말이네. 빌어먹을. 마법도 못 쓰는 주제에 유세는 겁내 떨어.”
한눈에 봐도 거친 인상의 사내들이었다. 호영은 그런 십장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병사들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군.’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며 심지어 무식하기까지 한 대왕이라는 인물은 필연적으로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충견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 윗사람, 즉 마법사들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았지만 그래 봤자 사냥개 처지에 불과하였다.
언제든지 내쳐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호위대 병사들이라는 아군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잡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애들아! 대장님이 회군하시란다!”
십장 한 명이 호영을 대신하여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하니, 여기저기서 시큰둥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복명복창이라면 복명복창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1회 차의 친위대를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군기 빠진 모습들. 군대라기보다는 용병 부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호영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하루빨리 권력을 잡아야겠어.”
그래야 저런 군기 빠진 모습도 더는 안 볼 것이다.
호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호위대는 회군 준비를 끝마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군이 시작되었다.
당연하겠지만 대열의 선두에 선 것은 호영이었다.
대열을 이끌며 현리로 복귀하는 호영.
대왕 특유의 위풍당당한 발걸음을 하고 있었지만 호영은 속으로 이곳의 지리를 파악하는 데 열중하였다.
원정 부대의 수장이라는 자가 지리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예백산이잖아? 그럼 아까 그곳은 여 부족이 살았던 지역인가? 허! 100년도 전에 진출한 땅을 아직도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회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익숙한 배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예백산이었다. 현리 부족의 남서부에 위치한 예백산.
호영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장소였다. 그러자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신만만한 척을 할 필요도 없이 그는 이곳의 지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속도를 높인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사라지자 호영은 곧장 속보를 명령하였고, 호위대는 투덜거리며 호영의 명령을 이행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도착하겠군.’
언제나처럼 호영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해가 지기 직전, 호위대 전원이 현리의 목책에 다다랐던 것이다.
호영이 병사들을 이끌고 목책을 향해 걸어가니 순박한 얼굴을 한 농부들이 보였다. 목책 바깥에서 농사를 짓는 부족민들 같았다.
“그런데 왜 우리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처음으로 부족민을 마주하는 상황. 나름 감격스러운 상황이라 볼 수 있었지만 호영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호영을 바라보는 부족민들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족의 군대를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다니!
100년 전의 과거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민들에게 있어 호영이 이끄는 군대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물론 그 군대를 이끄는 호영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 새끼들 때문에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군.’
마족을 생각하면 절로 이가 갈렸다. 자신의 것을 이렇게나 망가뜨려 놓다니!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대, 대장, 갑자기 그런 얼굴을 하면 무섭습니다.”
“저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는데 대장의 얼굴로 그런 표정은 좀…….”
갑작스러운 십장들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러나 호영과 눈을 마주친 부족민들의 표정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압도적인 외모를 가진 대왕이었다. 그런 대왕이 얼굴을 찌푸리니, 평범한 사람들로선 감당하기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왠지 기분 나쁜데.’
아무리 자신의 진짜 얼굴이 아니라지만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었다. 호영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앙!”
심지어 어떤 아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 결국 호영은 인상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풀기 무섭게 들려오는 한숨 소리.
호영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1회 차처럼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기는 그른 것 같았다.
* * *
부족의 중심부. 그곳에는 주변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건축물이 떡 하니 지어져 있었다. 바로 석벽이었다.
돌로 지어진 석벽. 이 석벽 안에는 부족의 지배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네 일족들이 살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부족의 추장 역시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호영이 석벽에 온 이유도 바로 그 추장을 보기 위함이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호영은 성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종이라는 직책을 가진 30대 중반의 사내.
그 사내가 호영의 앞길을 가로 막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왕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화를 냈을까?’
단순 무식하고 저돌적인 대왕. 그라면 분노를 표출했을까?
하지만 상대는 무려 추장의 시종이었다.
신분이야 노예에 가깝다고는 해도 추장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자리가 결코 가벼울 수는 없었다.
호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무표정한 얼굴로 되묻는 것을 선택하였다.
“어째서요?”
“추장께서는 바쁜 용무가 있으십니다. 보고는 나중에 하십시오.”
그 말에 이를 악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실제로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대왕이라면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호영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시종은 호영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름 연기가 통한 셈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거칠게 발을 굴렀다.
쿵쾅쿵쾅!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성문에서 물러나는 호영. 누가 봐도 분노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