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59화 (59/345)

# 59

얼굴만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았다.

‘다행이군. 마족들을 만나기는 껄끄러웠는데.’

그러나 분노한 모습은 연기에 불과하였다. 성문에서 멀찍이 물러난 호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십장들에게서 ‘보고’를 들었을 때는 꽤나 당황하였다. 뭐, 원정대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왔으면 군주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추장이 알아서 호영과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호영으로선 그야말로 천만다행이라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추장님께 보고하러 가신다면서요?”

“다음에 오라더군.”

“……우리는 나름 목숨 걸고 싸운 건데 참 너무들 합니다. 공로를 치하하기는커녕 만나 주지도 않다니. 이번에도 포상은 물 건너간 거 아닙니까?”

“…….”

“세 명이나 죽었는데, 제기랄. 충원이나 제대로 해 줬으면 좋겠네.”

당연히도 호영은 십장들의 불만에 동조하지 못하였다. 그는 대왕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호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십장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 유용한 정보가 되는 것이었다. 호영은 벌써 호위대가 추장 및 마법사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불만이라고 해 봤자 ‘우리들의 노고를 몰라준다.’, ‘하는 일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이 적다.’ 정도의 서운한 감정에 불과하였지만 말이다.

“기분도 꿀꿀한데, 대장, 술이나 먹으로 가죠. 막내가 고기도 구했다는데.”

“아니, 오늘은 너희들끼리 먹어라.”

“엥? 대장이 술자리를 피하시다니, 웬일이십니까?”

“따로 할 일이 있다.”

의심은 되도록 받지 않는 게 좋겠지만 오늘은 첫날이었다. 호영은 무투파 유저이니 무투파 유저로서 새로운 아바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였다.

한마디로 수련을 통해 몸 상태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까 전투할 때도 근육이 너무 우악스럽게 느껴졌어. 보기는 위압적이지만 창술을 사용하기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근육들이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하루빨리 몸을 창술에 적합하게 만들어 낼 필요가 있어.’

정치나 인맥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그에게 최우선 순위는 어디까지나 ‘무력’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무력만 있으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는 법. 만에 하나 내일 당장 토사구팽 당한다고 해도 무력이 있다면 상황을 역전시키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애들은 해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차가운 인상의 십장이 하는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해산하여 뿔뿔이 흩어지자 호영도 자신의 집으로 향하였다.

동부 거리에 위치한 대씨 일족의 저택들. 나무 집에 불과한데도 왠지 모르게 으리으리해 보이는 저택들이었다.

그중에서 호영의 집은 독보적이었다. 흙으로 된 담벽에 넓이도 어마어마했다. 확실히 대씨 일족의 수장이 쓸 만한 집 같았다.

‘수련은 집에서 할 수 있겠어.’

집이 넓다는 것은 호영에게 무척이나 흡족한 일이었다.

#봉씨 일족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습니까, 족장님!”

저택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

대씨 일족의 수장을 향한 인사였다.

호영은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감회가 뭉클 샘솟았다.

100년 전만 해도 보잘것없던 일족이었다.

아니, 사실상 일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사내라고는 대준밖에 없었으니까.

호영의 피땀 어린 노력 덕분에 보잘것없던 일족이 명실상부 현리를 대표하는 일족 중 하나가 되었다. 호영으로선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대왕이 가주가 되면서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지만.’

겉으로는 영광의 날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대씨 일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족의 수장이 친위대의 역할을 대신하는 호위대의 대장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집안 문제였다.

형제들부터 시작하여 아내와 친척들까지, 일족의 주요 인사라 할 수 있는 자들이 호영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씨 일족의 혈맹이라 할 수 있는 몇몇 일족들과도 최근 들어 소원해진 상태였다.

이 또한 대왕이 대씨 일족의 수장이 되면서 생겨난 일이었는데 그만큼 대왕의 평판은 좋지 못하였다.

‘차라리 일족의 수장이 아닌 것이 나았을 텐데 말이야.’

호영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쟤가 왜 여기에 있지?”

“네?”

“저기 서 있는 놈 말이다. 저놈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체격이 조금 클 뿐, 전체적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내. 하지만 호영은 그 사내를 보고서 눈을 빛냈다.

‘이름이 봉하였던가? 어쨌든 아까 아바타 선택할 때 봤던 얼굴이잖아.’

센추리는 유저들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은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유용한 정보들을 시기적절하게 쥐여 주고는 한다.

특히나 자신의 혈족에 대한 정보만큼은 확실하게 쥐여 주는데, 덕분에 유저들은 AI들과의 집안 다툼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호영은 튜토리얼을 마치고 아바타를 선택할 때, 능력치 좋은 아바타들의 정보를 모조리 외워 두었다.

선택이야 대왕으로 하겠지만 적이 되든 아군이 되든 좋은 능력치의 아바타들은 미리 알아 두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기 종복들 사이에 숨어 있는 봉하라는 사내는 호영이 제법 눈여겨본 아바타 중에 한 명이었다.

무력 자체는 평범하지만 지력 수치가 꽤나 높은, 35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어떤 수치든 30만 넘겨도 선방했다고 할 수 있는 법.

더군다나 체력이나 근력이 아닌 지력이라면 선방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얼마 전에 사 부인께서 데려온 종복입니다.”

“……그래?”

일종의 집사라고 할 수 있는 중년 사내의 말에 호영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연한 얼굴과는 달리 속으로는 의심을 품었다.

‘비록 성이 봉씨라지만 나의 혈족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이다. 정확히는 대성의 증손자지. 그런데 종복으로 받아들였다고? 왠지 모르게 수상하군.’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봉하라는 사내의 신분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명문 일족이라고 불렸던 봉씨 일족의 일원이자 대씨 일족과도 혈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내.

하지만 수상하기에 오히려 내색할 수 없었다. 지금 호영은 모두를 속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새로 들어왔으면 잘 가르치도록.”

“소인이 책임지고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

“사 부인께서는 안채에 계십니다.”

“안채라.”

역시 100년이라는 시간은 작지 않은 것일까? 호영에게는 다소 이질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현리 곳곳에 생겨났다.

마족의 등장으로 부족이 크게 발전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달라진 것이 많다는 뜻이었다.

안채라는 것도 그렇다.

사유재산이 생겨났기 때문에 담벽이 만들어졌고, 담벽이 생겼기 때문에 안채라는 것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호영이 통치했을 때도 어느 정도는 사유재산이 존재하였다. 애초에 노예라는 것부터가 사유재산의 일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현리는 지금의 현리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부족 사회 특유의 공동재산 제도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니까.

그리고 사실 담벽이나 안채 그리고 석벽 같은 것은 변화의 축에도 끼지 못하였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마법사로 인해 생겨난 정신적, 문화적 변화였다.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진 신분제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종교. 호영이 가장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호영은 고개를 회회 저었다. 잘못된 것들이야 언제가 되었건 바로 잡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수련’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해가 지고 있는 상황. 수련하는 것이야 지장없다지만 시간 관리는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었다.

곧장 창을 들고서 마당으로 향하였다. 저택이 워낙 넓었기에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 * *

“오늘 같은 날에도 늦게 들어오십니다.”

수련을 마치고 안채로 들어가니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연, 안자고 있었나?”

“……남편이 원정 갔다 돌아왔는데 먼저 자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호영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일.

애초에 대왕의 아내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개인 정보를 열람했을 때도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다.’라는 식으로만 쓰여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영은 자신의 실수를 알았으면서도 그녀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아내라고는 하나 그녀 역시 경계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저택 입구에서 보았던 봉하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호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호영은 사과 대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온 걸 봤으니 이제 그만 자도록.”

“하실 말씀은 그게 끝입니까?”

호영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하나 사연은 대왕의 아내야. 괜히 말을 길게 하면 의심만 받을 테지.’

그런 호영의 태도에 사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아 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국 말문을 다시 여는 일은 없었다.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는 곧장 자리에 누웠고, 그런 사연을 보며 호영 역시 방바닥에 누웠다.

오늘 하루 고달팠는지 잠에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크르렁. 크르렁.”

아바타가 잠에 빠져든 순간 호영으로선 센추리 세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곧장 로그아웃한 호영은 원재와 만나 정보를 교환하였다.

원재의 아바타는 현재 ‘반마족 혈맹’에 가담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명칭은 원재가 만든 것이었고, 실제로는 유력 일족들 간의 비밀스러운 모임을 뜻하는 말이었다.

대씨 일족, 이씨 일족, 중씨 일족, 수씨 일족, 그리고 원재의 일족인 우씨 일족 등 현리에서 한때 최고라 불렸던 명문 일족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모임이었다.

원재가 말하기로 이 모임은 최근 들어 마족에게 적대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봉씨 일족을 몰락시켰던 것처럼 마법사들의 전횡이 늘어나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참고로 사연의 사씨 일족 역시 이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은데?’

무언가 감이 오려는 것을 느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다음 접속 때부터 수련하는 것 이상으로 정보를 얻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로 하였다.

물론 원재에게도 정보를 최대한 모아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어느 정도 윤곽이 보였다. 그 윤곽은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겠는데?”

무언가를 확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

그러나 호영에게는 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타고난 감이 아닌, 전쟁터를 전전하며 간신히 얻게 된 직감.

지금 그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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